[ 그녀 ] 주말 아침이었다. 약속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거리는 꽤 멀었다. 급하게 씻고 최대한 깔끔하게 입었다. 이어폰을 끼고 친구에게 늦을 것 같다고 문자를 보냈다. 종종걸음으로 정류장에 갔더니, 다행히 타야할 버스가 금방 도착했다. 버스는 생각보다 붐볐다. 주말 이른 아침인데도 빈 좌석은 세 개 뿐이었다. 다행이네. 중얼거리며 버스카드를 찍었고, 좋아하는 뒤쪽 빈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를 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아니, 없다고 착각했다. 내가 이끌리듯 옆자리로 가 앉을 때까지만 해도 내 진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 했으니까. 나는 옆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다. 하얀 피부. 길고 검은 생머리. 제목은 모르겠지만 집중해서 읽고 있는 책. 하얀색 가오리니트에 검은 핫팬츠. 가끔 앞으로 흘러내리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길고 가는 손가락에선 현실감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어폰에서 나오던 음악도 잊고, 꽉 깨물고 있던 아랫입술의 통증도 잊었다. 시각만 생생히 살아서 홀린 것처럼 그녀를 보고 있었다. 상당히 오랫동안. 너무 뚫어지게 보고 있나? 내가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울 만큼 고개를 홱 돌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고, 그녀만 내리지 않는다면 계속 옆에 있을 수 있었다. 나도 모르게 이런 계산을 하며 설렜다. 나는 창 너머를 보는 척 하면서, 창가의 그녀를 훔쳐보았다. 하지만 천성이 소심해서 정류장에 정거할 때마다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돌려야 했다. 은밀하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나는 예술 작품 보듯이 그녀를 감상했다. 어떤 사람일까?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증이 커졌고, 그녀가 보는 책이 궁금했다. 조금이나마 그녀를 알 수 있는 단서라 여겼기 때문에. 책을 슬그머니 보려 했지만 글자가 작았고, 내 시력은 좋지 않아 알아 볼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살핀 이래로 페이지는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내가 지켜보는 것을 알아챘나? 고개를 들었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놀랍게도 그녀는 내게 미소를 지었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아마 내 심박을 측정하는 기계가 연결되어 있었다면 계기판이 폭발했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미소를 보이려 애쓰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심스럽게도 내릴 역이 될 때까지 식은땀만 흘리고 앉아 있었다. 말 건넬 생각도 하지 못 하고, 목적지에서 후다닥 내렸다. 그녀는 날 잡지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돌아보질 못 해 모르겠다.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놈이었다. 그 때로부터 7년이나 지났다. 그 동안 숱하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별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여자는 버스의 그녀다. 이상하리만큼 뇌리에 박혀서 나오질 않는다. 이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그건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낀 것이다. 두 번째 이별을 겪고서야 그 때의 감정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구나. 짧은 순간 내 모든 것을 줄만큼 사랑했구나. 솔직히 그 사랑 자체는 이해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를 사랑할 수 있다니. 15분가량 옆자리에 앉았을 뿐인데.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7년이나 걸려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었음을 확신하는 그녀를, 이렇게 글로 남긴다. 이건 하나의 기이한 경험이고, 경이로운 진실이며, 달콤한 추억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낸 사진작가가 전시회에 사진을 전시하듯이 나도 이 경험을 종이 위에 옮긴다.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서 나는 영원을 봤고, 한 겨울에 피는 꽃 한 송이가 내포한 불가능의 아름다움을 경험했기에. 기억 속의 가장 아름다웠던 사진 한 장을 여기에 남기는 것이다. 추억을. 그녀를. - 창게가 흥해서 좋아요 |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4 06:02: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