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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미는 계속해서 가벼운 말투로 발리율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발리율은 그가 스스로 대답을 다 했을 때 무언가가 머리통을 한대 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휘미의 대화법은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발리율은 입에 풀이라도 칠 한 듯 시선을 다른데에 고정시키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군. 우리들도 정부랑 똑같은거야. 저 동물들 한테는’ 발리율은 끝내 입을 열진 않았지만 충분히 스스로 느끼고 있는것 같이 보였다.
물론 그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동물의 자유를 따진다면, 네가 지금 먹고있는 양고기는 사람이 직접 감금하고 도살한 것인데, 왜 투기장에게만 시비인가? 사미잇을 직접 도살하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발리율은 자유라는 개념에 대해 몇번의 사고를 거친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 중심되는 것은 ‘자유’ 였다. 자유를 위해 태어난 이 도시에서 다른 무언가의 자유를 억압하는 행위가 벌어지는 것은 그 행동이 일반적인 기준에서 어떻게 인식되는가에 관계없이 - 윔의 산간지방에서도 사슴을 굶긴 뒤 결투시키는 풍습이 있다. -  직설적으로 자신들의 모순을 증명하는 행위인 것이다.

여태까지 가만히 있던 기삭이 코를 몇 번 후비더니 말했다.

“ 아아 - 다들 됐고, 방금 떠올랐는데 좋은 생각이 있어. 아마 놀랄 거야. ”

기삭은 혼자서 먼저 마구 웃고는 테이블에 엎드릴 정도로 과장대로 몸을 밀착시켰다. 일행도 그의 유도대로 몸을 수그렸다. 그는 테이블에다가 낙서를 해가며 말했다.

“ 사미잇 30마리가 3개 투기장에 있으면…젠장 90마리. 한놈당 장정 5명씩 쓰러트리면… 몇 명이냐 도대체… ”

발리율이 답답한듯 말했다.

“ 450마리잖아. 돌대가리야. ”

“ 이놈아. 앞에 직접 안보이는데 그걸 어떻게 세어! ”

기삭은 발리율과 사이가 좋아진듯 하다니 곧장 다시 얼굴이 벌게져 화를 내기 시작했고 휘미가 두 사람 앞에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 발리율, 윔사람들은 산수를 배우지 않아요. 기삭, 대신 너는 눈에 보이는 것들의 개수는 금방 새잖아. 어서 하던 말이나 계속 해봐. ”

“…아무튼 450명? 그래. 450명을 쓰러뜨릴 그 훌륭한 사미잇을 말야… 윔군에게 가져가는게 어때. 가지고 있는 바니시를 전부 먹여서. ”

발리율은 기어코 소리를 지르려다가 기삭이 테이블 밑의 그의 발을 세게 밟자 의자에 앉은 채 옆으로 쓰러졌다. 발리율을 제외하고는 다들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디로단은 발리율을 다시 억지로 앉히고는 기삭에게 말했다.

“ 기삭. 그러니까 이 도시의 사미잇에게 약을 먹인 뒤 그 사미잇들을 전부 끌고 전쟁에다 사용한다 이거지? ”

“ 갇혀서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

휘미가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내가 지금까지 기삭에게 들은 말중에… ”

그는 다시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말을 맺었다.

“ 제일 신선한데. ”

메지가 이어서 입을 열었다.

“ 가만, 이건 내가 조금 전에 안건데, 사미잇이 한 마리가 있을 때 다섯 명을 상대한다고 해서 90마리가 450명을 상대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 특히 인간은 더 그런데, 뭉쳐있을 때는 하나만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효과가 나거든. 내가보기엔 사미잇 90마리는 450명보다 훨씬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아니, 혼전 중에 그 괴물들을 전쟁터에 풀어놓으면 적들을 전멸 시킬 수도 있을 거 같아. ”

“ 배에 한명만이 살아남으면 곧 좌초되지만 만약 세 명이 살아 있다면 동해 너머까지도 건너간다는 속담과 비슷한 얘기군. ”

기삭이 중얼거렸다. 그때 디로단이 말했다.

“ 그런데 좀 그렇군. 사미잇을 우리를 위해 도구로 이용하는건 마찬가지잖나. 인간의 전쟁 때문에 사미잇들을 끌어들여 희생 시킨다니. ”

휘미는 고개를 저었다.

“ 좀 다를지도 몰라요. 솔직히 합리화같이 보이긴 하지만, 평화를 위해 잠시 도움을 요청하는거니까. 어차피 전쟁은 사핀이 시작했고 우리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하잖아요. 만약 사미잇이 인간처럼 생각할 줄 알았다면 우리를 도와줬을거에요. 그리고 도움을 받은 뒤에는 당연히 풀어줄거구요. 기삭 말대로 투기장에서 쾌락의 도구가 되는 것 보다는 훨씬 나은 거 아닌가요. ”

기삭은 휘미의 말을 듣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디로단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말했다.

“ 여하튼,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만약 될 수만 있다면 전쟁에 큰 도움이 되겠군. ”

“ 지금 윔이 얼마나 위험할까요? ”

메지가 물었다.

“ 그 많던 병사들이 다 죽었으니 아무리 큰 윔이라도 굉장히 위태로울 거야. ”

디로단이 대답했다. 기삭도 주먹을 쥐고 외쳤다.

“ 그럼 더욱 해야겠군. 내 나라가 망하려는데 발 뻗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안 그래? ”

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사핀놈들이 위머까지 함락시키면 우리 다이지 도서관을 불질러 버릴수도 있으니까 꼭 이겨야 돼. 메지는 어때? ”

메지는 머리를 긁적였다.

“ …좀 무서운데, 꼭 우리가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길이 있으니 그 길을 걸어야지. 맙소사 근데 무슨 집행자들이 모여 회의하는 기분이군. ”

일행은 이번에는 디로단을 보았다. 그는 윔 사람도 아니었고 용병계약도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더욱이 일행은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고 있는 점이 많았다. 그가 왜 여기에 있고 왜 용병이 되었는지도. 디로단은 일행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한참을 있다가 말했다.

“ 아무래도 그런 고생을 시킨 놈들인데, 우리도 본때를 보여줘야지 않겠어? ”

“ 좋았어! ”

기삭은 들떠 일어나 말했고 일행은 마지막으로 발리율을 보았다. 디로단에게 붙잡힌 뒤로 잠잠해진 그는 테이블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아무반응 없이 앉아 있다가 일행이 전부 쳐다보자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입만 열었다.

“ 안되는 이유 두가지를 알려주지. 첫째로 우린 정부의 미움을 일부러 살 필요가 없다. 정부가 우릴 좋아할 리는 없지만 만약 전쟁에 오윰이 낀 것이 그들 귀에 들어가면 이젠 우린 완전히 반역자들이 되는거야. 둘째로 이곳의 생명과 연결된 문제야. 이곳은 막대한 이익이 되는 투기장이 없으면 재정에 큰 문제가 생긴다. 당장에 지하수를 퍼올리는 펌프 가동을 중단하게 될지도 몰라. 펌프가 중단되면 이 도시는 며칠도 안되어 물에 잠기게 된다. ”

일행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았다. 발리율의 말대로 일행이 사미잇을 가져가 전쟁에 사용한다면 이 도시는 큰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다. 휘미가 입맛을 다시다가 말했다.

“ 대충 알고는 있었어요. 발리율. 이 도시를 망가뜨릴 수는 없겠죠. 게다가 며칠 전부터 당신은 우리 동료였으니까 당신이 반대하는 것을 우린 강행하진 않을거에요. 대신 다르게 방향을 잡아볼 수는 있겠죠. 우리가 막대한 돈을 지불해서 여기 사미잇들을 전부 산다던지, 아니면 오윰 이외의 다른곳에서 사미잇을 가져온다던지. ”

기삭이 말했다.

“ 우리가 온 곳 동쪽에 사미잇들 서식지가 있다며. 직접 잡자. "

발리율은 고개를 저었다.

“ 그건 너무 위험해. 한번에 서너 마리 데려오는것도 힘들어. 그보다는… 아니 이건 더 미친짓 같은데 ”

발리율은 말을 갑자기 끊고는 중얼거렸다. 기삭이 눈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 야 뭐뭐 같다라고 말하지 마. 내생각엔 어차피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건 다 미친일이야. 묵단월날 탈출한것부터 해서 얼어죽는 사막을 건너온 것 까지. 디로단. 지금까지 미친일 하닌게 하나라도 있었나 생각해보라니까 ”

발리율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일행은 모두 집중한 채 숨을 죽이고 그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 미몰라 아냐실 항구에는 정부가 몰래 지원금을 대주는 사미잇 투기장이 있어. 오윰 투기장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야. ”

“ 미몰라 아냐실? 사핀어가 아닌데. ”

휘미는 메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메지도 계속 발음해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발리율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 당연하지. 그곳은 먼 옛날 부호이자 아주 위대한 대상인 … ”

휘미와 메지가 동시에 말했다.

“ 피스너? ”

“ 또 피스너야? ”

“ … 싀드람 이라는 분께서 지은 곳이지. ”
그때 갑자기 기삭이 벌떡 일어나더니 양 팔을 벌리고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고 말했다.

“ 그분을 존경하오. ”
발리율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이상한 얼굴로 기삭을 바라보았다. 기삭은 당당하게 다시 제자리에 앉았고 발리율은 킥킥대며 웃어대었다. 메지가 발리율에게 물었다.

“ 뭐가 어떻게 되가는 거에요?”

발리율은 한참을 더 웃은 뒤에 기삭에게 말했다.

“ 바닷바람을 좀 맞았나 보군. ”

“ 해양경비단에 있었지. ”

“ 선원들한테 배웠나. ”

“ 경비대장이 탐험선 항해사 출신이였어. ”

발리율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휘미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 잠깐, 나도 기억이 나는데. 성이 위스타…민지 였나? 메지 그때 기억 안나? 대도서관에서 내가 빌렸던 ‘상업’ 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야. ”

메지는 전혀 기억이 안나는지 머리만 긁적였다. 기삭이 말했다.

“ 그분은 선원들의 영원한 인도자야! 아마 다른 책도 있을 거야. 그에 대한 발자취는 끝이 없지. ”

“ 그래서 그 사람이 지은 도시가 미몰라 아냐실이라구요? ”

“ 응. 그분 고향이 뮤케넬이니까 저 단어는 뮤케넬의 고어(古語)이지. 혹시 무슨 뜻인지 알겠어? ”

휘미는 고개를 저었다. 디로단이 말했다.

“ 여하튼 방향은 결정됐군. 거리는 여기서 얼마나 되지? ”

“ 걸어서 나흘정도. ”

“ 제길. 중간에 쉴곳은? ”

기삭이 투덜거렸고 발리율은 코웃음을 쳤다.

“ 중간에 남부에서 가장 큰 도시가 있지. 하지만 거긴 검문이 심해서 근처도 가기 힘들어. 들어가는건 아예 불가능하다. ”

“ 뭐야. 그럼 미몰라…어쩌고 항구는 어떻게 들어가려고? ”

“ 거긴 개방되어 있다. 사핀 영토라고는 해도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이는 무역항이라 자유롭지. 또 가나씨 기업 선박들이 자주 들어오기 때문에 정부도 항구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어. ”

“ 이 나라는 먹다남은 빵처럼 이곳저곳에 살점을 뜯기고 있군. 생각보다 국가 공권이 강하진 않은 나라인데 왜 그렇게 국민들에게는 제약이 심하지? ”

휘미가 빈정대듯 말했다. 기삭이 포크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 그러니까 주민들이 다 몰래 빠져나가지. ”

“ 말을 사용할 만한 길은 없나요? 난 말타는게 좋은데 ”

메지의 물음이었다. 발리율은 손에 깍지를 끼고는 이마를 두드리며 말했다.

“ 담가라? 담가라를 타려면 가도만 이용해야 하는데 그러면 한참 돌아가게 될거고…결국 걸리는 시간은 똑같을걸. ”

“ 흠, 골치 아파지는데… 그냥 야영하면서 가죠? ”

“ 그래 뭐 큰 문제 없겠지. 사막도 건너왔는데. ”

일행은 거기서 대화가 멎었고 제각기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리율은 곁눈질로 일행을 하나씩 훑어보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다리를 의자에 붙이고는 테이블 밑을 훑어보며 말했다.

“ 참. 그건 어디갔어? ”

기삭이 고개에 힘을 뺀 채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 뭐? ”

“ 그거 있잖아. ”

“ 뭐, 개? ”

발리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지는 입맛을 다셨다.

“ 묶어놨어요. 그러고 보니 그 친구는 이름도 없네. 같이 다니는데 뭔가 부를거라도 있어야 할거 아냐. ”

메지의 말에 휘미가 말했다.

“ 싀드람 어때? ”

갑자기 기삭이 벌떡 일어나더니 손을 뻗고는 외쳤다.

“ 그분을 존경하오! ”

일행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메지가 웃으며 말했다.

“ 그것좀 안하면 안돼? ”

“ 내 자유를 구속할테냐? ”

기삭이 과장되게 말했다. 메지는 재미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름을 생각하느라 일행은 골머리를 앓았고 여러 가지가 오고갔지만 별로 흡족할 만한 건 없었다.

“ 디로단이 정해봐요. 주인이잖아. ”

“ 방금 정했다. ”

디로단은 손가락을 절도있게 튕기며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 ‘개’ 라구요? ”

메지가 심각하게 물었다. 기삭은 의자 밑으로 내려갈 정도로 웃음을 터트렸고 발리율은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휘미는 긍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하긴 그것도 괜찮네요. 밖에서는 사미잇이라는걸 숨겨야 되니까. 이름을 개라고 붙이면 녀석이 좀 더 개처럼 느껴질거 아니겠어요? ”

“ 어때. 부를것만 있으면 되는거잖아. ”

기삭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낄낄대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멀리 다른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잠시 뒤 일어나 발리율의 팔을 잡고 그곳으로 향했다.

남은 세 사람은 대화가 끊긴 채 자리에서 와인병을 기울였다. 이들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화제는 사핀군의 삼각형 이었다.

“ 메지 네가 비상하다는건 알고 있지만 그 빌어먹을 삼각형에서 규칙을 찾아낼 줄은 꿈에도 몰랐어. ”

메지는 휘미와 디로단의 칭찬에 멋쩍게 웃고는 말했다.

" 내가보기엔 이 나라는 수학을 정말 신봉하는 것 같아. 그때 사람들이 죽는 순서를 정한 것은 ‘소수’라는 거였어. 첫 번째 사람은 무조건 죽고 두 번째 사람은 무조건 사는 것에서 일단 규칙이 있는 것은 알았지. “

휘미가 말했다.

“ 소수? 웃기는 개념이군. ”

“ 101, 103, 107, 109, 111, 113 모두 소수야. 117과 119도 소수인지 알았지만 아니었어. 잘못하면 디로단을 골로 보낼 뻔했지. ”

메지는 친절하게 소수에 대해서 설명을 해 나갔다. 기초적인 연산밖에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꽤 흥미롭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메지는 오랜만에 자신의 설명을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자 온몸과 주변 도구들을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가 한창 삼각형에 대해서도 설명할 때 쯤 기삭이 메지의 뒤로 뛰어와 그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 메지! 잠깐 와봐. 네 도움이 필요해. 아니 다들 와! 재밌는게 널렸어. ”

메지는 좀 더 얘기하고 싶었지만 기삭이 하도 재촉하는 터에 일행과 같이 그를 따라갔다. 기삭이 인도한 곳에는 홈이 파인 둥그런 테이블에 수많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채 열 명의 도박사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엎어놓은 옆면이 뚫린 바가지를 앞에 놓고 있었다. 바가지 안에는 동전이 몇 개 들어있는 듯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시작을 알리는 호각을 불자 이들은 시계방향으로 한 번씩 자신의 바가지 안의 동전을 미끄러트려 다른 사람의 바가지로 전달하였다. 수십 번을 전달하고 나자 주변에서 구경하던 자들이 챙이 긴 모자를 쓴 늙은 남자에게 돈을 걸었다. 그중에는 발리율의 모습도 보였다.

“ 동전을 제일 많이 먹은 자를 고르면 되는 거야. ”

기삭이 시끄러운 와중에 귀를 막고 일행에게 설명했다.
한판이 끝나자 바로 다음 판이 시작되었다. 각각 그릇에 동전을 5개씩을 넣은 상태에서 서로 차례대로 하나씩 상대방 아무에게나 보내는데 처음에는 눈이 따라가다가도 조금 시간이 지나자 혼동되어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눈썰미가 빠른 휘미도 기를 쓰고 따라갔지만 맞추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동전을 많이 가져가는 자는 그나마 알아보기 쉬웠지만 누가 동전을 빼내어 보내는지를 알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누가 가장 많은지를 알기는 거의 불가능한 듯 보였다. 동전이 전부 섞이고 나자 여기저기에 돈을 거느라 소란스러워졌고 기삭은 눈에 보였던 대로 동전을 제일 많이 받았던 자에게 돈을 걸었다.

“ 기삭 잠깐만, 저 사람한테 걸어야 될걸. ”

메지가 말했다. 기삭은 머뭇거리다가 메지가 자신있게 재차 말하자 그의 말을 따랐다.

“ 모두 그릇을 열으시오! ”

그릇이 하나씩 열릴 때 마다 탄성과 환호가 오고갔다. 메지가 지목한 사람의 그릇이 열리자 가장 큰 환호성이 터졌다.

“ 우와! ”

기삭은 펄쩍 뛴 뒤 테이블로 바짝 다가갔고 메지를 돌아보고는 그의 목을 껴안고 날뛰었다.

“ 맞았어! 맞아! ”

메지는 밝게 웃었고 휘미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기삭이 이기는 것을 본 발리율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다가왔다.

“ 한 번 더 해보자. ”

게임은 다시 시작되었고 현란한 손동작들이 오고갔다. 메지가 말했다.

“ 한명 당 한명씩만 맡아서 확인해 줘. ”

이윽고 섞기가 끝나자 그는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더니 한 남자를 가리켰다. 기삭은 이번에는 쏜살같이 달려가 돈을 걸었다.

“ 자. 그릇을 여시오! ”

이번에도 메지는 정확하게 동전이 가장 많은 곳을 맞췄다. 기삭은 흥분해서 소리쳤다.

“ 다 걸어! 전부! 걸어. ”

다음번 경기 때에도 메지는 어김없었다. 발리율과 기삭이 딜러에게 상금을 청구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메지는 금세 유명해졌는지 사람들에게 휩싸여 이리저리 끌려갔다. 그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의 눈빛은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메지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휘미는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 나 그의 뒤를 쫒아갔다.

“ 사기다! ”

누군가 그렇게 말한 순간이었다. 다시 한 번 메지가 지목한 자가 돈을 따자 주변이 떠나갈 듯 시끄러워졌고 사람들이 마구 날뛰는 사이 그가 휘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휘미는 놀라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가갔지만 그는 감쪽같이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의 흔적은 간데없었다.

“ 어디 갔지? ”

그는 아무나 붙잡고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다급해진 휘미는 술집을 빠져나와 술집 옆으로 높게 쌓여진 돌 조각상 위로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는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와 다른 일행을 찾았다. 하지만 일행들마저도 사라져 있었다.
그는 그나마 회복되었던 기운이 다시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투기장 경기가 다시 시작되었는지 소란 때문에 생각하는것 조차 방해되자 휘미는 술집에서 뛰쳐나와 바깥의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지하도시의 공기는 매우 싸늘해서 그는 코트의 깃을 얼굴까지 올린 채 일행이 발견되기 만을 멍하니 기다렸다.

“ 정말 미치겠군. ”

휘미는 다시금 처량한 생각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살짝 감아보자 스니게치에 널린 아군의 주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는 이마를 무릎에 몇 번 박았다. 이번에는 청단월날 정체불명의 풀을 뽑았을 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오랜만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어 풀의 감촉을 느껴보았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으로 다가왔다. 그는 다시한번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지하도시의 한복판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기운이 빠진 탓에 주변의 광경도 더 이상 흥미있게 보이지 않았다. 단지 빨리 오던길을 되돌아가 여관에서 기다리다가 메지와 동료를 만나고 풀에 대해 알아낸 뒤 다이지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땅만 바라보고 가고 있던 휘미는 어느 한 술집의 야외 테이블 사이를 지나가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술집에 들어가기 전에 봤던 한 남자가 여전히 테이블에 홀로 앉아 술을 마시며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휘미는 체루디를 떠올리며 힘겹게 웃을 수 있었다. 그는 궁금한 나머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다가갔고 고개를 빼어 남자의 노트를 보았다. 그런데 남자의 글씨를 보는 순간 그는 흠칫 놀라 헛숨을 삼켰다. 남자는 눈치를 채고는 재빨리 종이를 손으로 가리더니 휘미를 쏘아보았다. 머플러 위로 어둠속에서 반짝거리는 그의 큰 눈이 휘미와 똑바로 마주쳤다. 둘은 그렇게 굳은 채로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휘미는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 윔의 알파벳을 쓰시네요. ”

휘미의 자연스러운 윔어에 그의 표정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는 머플러로 가린 입을 움직여 말했다. 목소리라기보다는 가래 낀 쇳소리에 가까웠다.

“ 담당 구역이 아닐텐데? ”

휘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 무슨말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