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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코 있던 기삭과 디로단은 감탄한 눈으로 두 학생을 바라보았다. 발리율은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듯 땅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바라보다가를 반복하더니 한숨만 계속 푹푹 쉬어 대었다. 휘미의 예상대로 그는 많은 고난을 겪은 듯 보였지만 세세한 것까지 이익을 따질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었다. 발리율은 더 이상 동의의 말도 부정의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일행은 그가 완전히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걸음속도를 다시 높인 일행은 말없이 쫒아오는 적월을 등지고 미지의 도시인 오윰으로 향했다.
발리율의 계산대로 슬며시 서광이 땅에서부터 올라올 때쯤 멀리 오윰으로 예상되는 시가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디로단이 제일 먼저 그것을 발견하고 발리율에게 말했다.

“ 저길 그냥 들어가면 위험하지 않겠소? 사핀군이 있을지도 모르고. ”

발리율은 코웃음을 치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저긴 누구에게나 위험하오. ”

그는 그 말과 함께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발리율의 짧은 설명에 따르면 오윰은 정확히 말하면 도시가 아니었다. 발리율 같은 도망자, 범죄자, 밀매상, 부랑자, 모험가, 투기꾼, 창녀, 도적단, 가로소 피난민들이 모이면서 생긴 거대한 무법 부락이었다. 그렇다고 또 법이 없는것은 아니었다. 오윰에 들어온 자들은 그곳만의 규칙을 모두 지켰고, 그게 오윰에 입장하는 조건이었다.
오윰의 외곽문을 들어서자 흙투성이 누더기를 몸에 붕대 감듯 두른 거렁뱅이가 비료더미 위에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피로와 싸우며 졸면서 걷고 있던 휘미는 순간 그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거지는 갑자기 일어나더니 번개같은 속도로 품속의 칼을 뻗어 제일 앞서가던 발리율의 목을 겨눴다. 그와 동시에 비료 더미 뒤에 숨어 있던 대여섯명의 사핀인들이 동시에 일행에게 활을 겨눴다. 일행은 뻗뻗하게 굳어 있었지만 발리율은 피식 웃으면서 칼을 겨눈 자의 머리통을 헤집었다. 칼을 겨눴던 자는 매우 반가운 표정으로 발리율에게 말했다.

“ 발리율?! 근데 뒷놈들은 대체 뭐야? ”

“ 군인 아냐. 도망다니는 자들이지. 걱정마. ”

발리율이 태연하게 말하자 거렁뱅이는 일행을 한번 쏘아보더니 칼을 거뒀다. 뒤쪽 무리들도 무기를 거두고 제자리로 돌아가자 발리율은 그의 어깨를 한번 친 뒤 뒤의 일행에게 손짓했다. 활을 겨눴던 몇몇 사핀인들이 발리율의 뒤에다 대고 말했다.

“ 이번에 오면 바니시좀 나눠 주기로 했자나. ”

“ 다음번에 줄게. 더 죽이는 걸로 ”

“ 난 바니시면 돼! ”

발리율은 등을 돌린 채 손을 한번 흔들고는 오윰 시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행도 꺼림칙한 기분으로 그를 바짝 따라갔다.
오윰은 발리율이 말한것과 정 반대라고 해도 맞을 정도로 매우 깔끔한 도시였다. 도로의 눈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건물들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으며 인적은 한산했다.

“ 젠장. 우리나라에서 처음 보여준 도시가 오윰이라는게 매우 자랑스럽군. ”

“ 이상해 보일만한 건덕지도 전혀 없는데요? ”

“ 그럴리가. ”

발리율은 오윰에 도착하자 조금 기분이 좋아졌는지 일행에게 먼저 여러 가지 이야기를 건냈다. 높은 건물은 거의 없었고 바람의 피해를 막기위해 쇳조각을 촘촘히 매단 지붕들만이 길가 양옆으로 펼쳐졌다. 휘미는 그림에서 보던 사핀의 도시와는 다른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신경쓰기 싫었다.

“ 이 도시의 유일한 숙소를 잡아 줄테니 들어가 있어. 물도 나올 거야. 돈이 별로 없으니 밑에 가서 바니시를 좀 팔아 와야겠다. ”

발리율은 길가 언덕을 오르다가 뾰쪽한 바늘 모양의 지붕이 인상적인 커다란 여관을 잡아주고는 혼자 어디론가 향했다. 기삭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 저놈 혼자 보내도 돼? 바니시도 들고가는데. ”

“ 놔둬. ”

일행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1층은 ㄱ자 모양으로 구부러진 홀이었는데 식당으로 사용 될 뿐 펍이나 바의 형태는 아닌듯 보였다.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덩치가 좋은 곱슬머리 남자가 무표정하게 키를 건냈다. 건물 곳곳의 털장식이나 다소 높은 의자, 두꺼운 삼나무를 덧댄 바닥등 전체적인 건물 모습은 이국적이지만 매우 소박했다. 천장이 높은 2층 침대방에 들어간 일행은 마치 수면제에 취한 듯 씻을 기운도 없이 바로 담요에 쓰러져 버렸다.

휘미가 한번 눈을 살짝 떴을때는 이미 방안이 온통 깜깜했다. 그는 다시 그상태로 누워 한참을 더 잤고 두번째로 눈을 뜨자 또 세상이 어두워 지고 있었다. 디로단과 기삭은 자리에 없었고 메지는 몸을 뒤척이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 설마 이틀이나 잔건가? ”

휘미는 몸의 관절을 풀었다. 아직까지 몸 곳곳에서 욱신거림이 느껴졌지만 전체적인 뻐근함은 많이 가셔져 있었다. 그는 온몸이 땀에 배어 있는것을 느꼈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연통에서 뜨거운 열기가 나와서 방은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비록 차가웠지만 세면장에서는 물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정말 오랜만에 몸을 씻을 수 있었다. 길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몸의 상처들과 물집과 굳은살로 뒤덮인 발을 깨끗이 씻었다. 그가 개운한 몸으로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을 때는 메지도 깨어있었다.

“ 후 ”

휘미는 한숨을 쉬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얼마만에 취하는 휴식인가? 휘미는 그동안의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것을 생각하자 숨부터 막혀왔다. 메지가 샤워장으로 가자 어두운 방 안에는 그 혼자 남았다. 그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 지는것을 느꼈다.

“ 정말, 말도안되는 일들만 겪었구나. ”

그는 자신도 모르게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메지가 씻고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휘미를 향해 물었다.

“ 어라, 휘미. ”

휘미는 메지를 바라보았다. 어둠 사이로 메지의 쓱 웃는 얼굴이 보였다. 그도 깨끗이 씻으니 다이지에서 학자복을 입고 평화롭게 살던 때의 얼굴로 다시 돌아온듯 보였다.
그렇게 한시간정도 지난 뒤 방문이 열리면서 두 남자가 들어왔다. 새로 산 듯한 털이 잔뜩 붙은 사핀인 외투에 두꺼운 솜바지를 입은 기삭과 디로단이었다. 그리고 디로단의 다리 옆으로 번뜩이는 눈동자도 두개 보였다. 휘미는 순간 놀랐지만 그게 사미잇 이라는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습게도 사미잇은 등에다가 이상한 보자기 같은 것을 두르고 있었다.

“ 이렇게 해놓으면 검은 털이 안보여. 발톱이나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그냥 썰매개 정도로 보이겠지. ”

디로단이 말했다. 그는 워낙에 어떤 상황이건 얼굴에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은 한층 더 편안한 표정이었다. 행동은 항상 절도있고 단정했었고 지금은 좀 더 그래보일 뿐이었다. 기삭은 얼굴의 피로가 완전히 가신 모양이었다. 수염도 깨끗이 밀고 정리안된 그의 곱슬 머리를 갈색 띠로 두르고 있었다. 기삭이 신나는듯 말했다.

“ 이틀을 꼬박 잤다고! 난 너희가 죽은줄 알았어. ”

디로단은 역시 새로 산 듯한 커다란 가방속에서 옷 두벌을 꺼냈다.

“ 갈아 입어. 챙길것은 다 챙겨넣고. ”

“ 우리거에요? 설마 그 사핀인의 돈으로? ”

메지가 물었다. 디로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학생은 새 옷을 펼쳐 몸에 대어보며 좋아했다.

“ 얼른 입기나 해. 밑에다가 식사 시켜놨으니까. ”

기삭이 먼저 날아가듯 내려가버리자 디로단은 사미잇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목줄을 매어 침대에다가 묶어놓았다. 그는 발리율에게 도로 받아 온 듯 처녀이끼가 잔뜩 든 가방에서 잎사귀 한개를 꺼내 사미잇의 귀에다 대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먹였고 사미잇은 곧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허술한 침대에 묶어놓는다고 해서 사미잇이 아랑곳 할 것 같진 않았지만 사미잇은 디로단의 말을 이해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계단의 등불을 따라 밑으로 내려온 두 학생은 고개를 갸우뚱 했다. 1층은 여전히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멀리 창가에 늙은 남자 하나가 테이블 위에 발을 올리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바깥 풍경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눈은 오고 있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외투를 싸맨 채 저마다 바삐 갈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무법 도시라는 이름과는 전혀 걸맞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로운 시골 마을같은 풍경이었다.

“ 얼른 와 뭐해. ”

일행은 텅 빈 테이블 두개를 붙여 넓게 자리를 잡았다. 기삭은 계속해서 싱글벙글한 표정이었고 뭔가 떨떠름한 두 학생은 긴장하는 것이 버릇이 된 듯 주변을 끊임없이 두리번거렸다. 잠시 뒤 갑자기 땅이 울리듯 하면서 지하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창문에 있던 노인이 일어났다. 그가 앉아있던 의자를 치우고 테이블을 돌리자 테이블 밑 바닥이 드르륵 소리와 함께 커다랗게 양쪽으로 열렸다. 두 학생은 깜짝놀라 일어나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식사 드실꺼죠? ”

커다란 몸집의 대머리 사내 하나가 발판 밑에서부터 올라오더니 일행에게 다가왔다. 그는 비대한 팔뚝이 다 드러나 보이는 얇은 셔츠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다. 셔츠 목부분에 야수같은 그의 노란 가슴털이 풍성하게 드러나 보았다. 기삭과 디로단은 미소만 지을 뿐 전혀 놀라는 표정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휘미가 물었다.

“ 도대체 어디서 온 거에요? ”

“ 다른 세상에서 올라 온거지. ”

기삭이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디로단도 팔짱을 끼고 있다가 살짝 웃고는 말했다.

“ 밥먹고 내려가 보자. 발리율이 기다리고 있어. ”

사내는 어리둥절해 하는 두 학생을 힐끗 쳐다보고는 발소리를 쿵쿵 내며 다시 지하로 들어가 버렸다. 휘미는 지하 문이 닫히기 전 무언가 커다란 함성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식사는 양도 많았고 맛도 있었다. 일행은 지칠 줄 모르고 그릇을 비워나갔다. 배가 불러지자 휘미는 또 다시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릇을 다 비운 일행은 한동안 여운을 즐기다가 일어났다.
아까의 그 노인은 계속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일행이 그쪽으로 다가가려는 시늉만 했는데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기계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수천 번을 해온듯 부드럽게 의자를 치우고 테이블을 돌려주었다. 테이블 밑으로는 꽤 넓은 계단이 나 있었다. 휘미가 첫 계단을 밟자 알 수 없는 온갖 것이 섞인 듯한 알 수 없는 냄새가 그의 코를 바늘처럼 찔렀다. 계단은 20미터는 더 아래로 나 있었고 돌벽에는 오래된 램프들이 퀘퀘한 빛을 내고 있었다. 한참을 나선형 으로 휘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간 휘미는 눈앞에 보이는것에 기절할 뻔했다.

“ 진짜 오윰에 온 걸 환영하네 ”

시야가 확 넓어지면서 요지경이 벌어졌다. 지하에는 또다른 도시가 있었다! 뒤틀린 암석 동굴이 포효하는 짐승의 입안처럼 처럼 장관을 이루며 끝도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수천 수백개의 횃불들이 이 어두운 지하세계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천장이 없는 희한한 양식의 건물들로부터 기괴한 음악소리, 노래소리가 나와 지하세계를 가득 매웠고 타는냄새, 굽는냄새, 썪는냄새, 몽롱한 향내 들이 한대 어우러져 도시에 색깔을 칠하고 있었다. 좁은 길목이 있는가 하면 탁 트인 광장도 있었고 곳곳마다 지상과 연결되는 나선형 입구들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거리마다 있는것은 대부분이 술집이고 도박장이고 투기장이고 사창가였고 동물 서커스를 하는곳, 이상한 물건들을 파는 곳, 약을 태우는 곳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술에 취하거나 약에 취해 떠들며 방황했고 금화를 잔뜩 움켜쥐고 좋아하는 사람, 길 한복판에서 사랑을 나누는 사람, 술병속에 둘러앉아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목청껏 곡을 하는사람, 바닥에 쓰러져 기절한 사람, 노래하는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매우고 있었다.
휘미는 너무 충격적인 이 광경에 온 정신이 팔린 채 거리를 해쳐나갔다. 정신을 차리고 좀 더 세세히 도시를 훑어보기 시작하자 보이지 않던 광경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선 이 동네는 무법천지였지만 법이 있었다. 가슴에 휘장을 수놓은 옷을 입은 수십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길다랗고 두꺼운 사핀 칼을 등에 두른 채 조를 이뤄 도로 한복판을 걸어다녔다. 일행은 그들의 모습만 보고도 이곳의 감시자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 소리치는 자들을 둘러싸고 싸움을 중재하기도 하고 구토하는 자를 인도하여 오물장으로 대려가기도 했다.

또 하나는 이 동네는 아주 미친 사람들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거리에 앉아 긴 판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 수백권의 책을 쌓아놓고 책을 읽는 사람들, 저마다 무리를 이뤄 둘러앉아 구기 운동하는 사람,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가지고 게임을 하는 사람, 사람들을 빙 둘러모음 채 마술 같은 퍼포먼스를 뽐내는 사람,  커다란 구조물 위에 올라타 무얼 만드는 사람…

“ 저건 낯익은 광경인데. ”

메지는 손가락을 뻗어 한 술집 바깥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며 펜으로 무언가를 신경질적으로 휘갈겨 적는 남자를 가리켰다. 그 옆에는 백발의 노파가 의자에 걸터앉아 태연히 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남녀노소 제한도 없는듯 보였다. 메지는 신전으로 보이는 곳에서 가방을 들고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보고는 한동안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곳에는 신전도 있고 학교도 있었다. 말이 잘 없는 디로단도 이곳저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자신이 본 신기한 것들을 일행에게 알려주었다.
앞장서서 걷던 디로단과 기삭은 10분여를 걷다가 방향을 틀어 도시 구석에서 암석벽에 빙 둘러 자리잡은 높은 술집으로 들어갔다. 비좁고 복잡한 테이블들을 지나 바텐더 뒤로 들어간 일행은 분주하게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모퉁이를 돌아섰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깊숙이 파인 100평 남짓한 사각 모래판 위로 2층 높이로 둘러싸인 관람 테이블이었다. 사람들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하게 차 있었고 저마다 고기와 술을 앞에 두고 떠들고 있었다.

“ 어이. ”

낯익은 목소리에 일행은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발리율이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약에 취해 눈이 풀린 사내 너댓명이 앉아있었는데 발리율이 손짓하자 자리를 비켰다.

“ 쉬고 나니 다들 멀쩡하게 보이는군. ”

수를놓은 꽤 멋진 가죽 자켓을 입고있던 발리율은 기분이 매우 좋은듯 보였다. 냉소적인 말투와 목석철머 딱딱하게 행동하던 그와는 전혀 다른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술에 취했는지 약간 어눌한 발음으로 일행에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 여기가 진짜 오윰이야. 바깥은 국가가 지배하는 가짜 도시지. 이곳은 우리가 유일하게 자유로울수 있는 낙원이야. ”

“ 국가는 이런게 있다는걸 모르오? ”

디로단이 매우 궁금했다는 듯이 그에게 물었다. 발리율은 그답지 않게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왜 모르겠소. 여기를 공사할 때부터 알고 있었지. 원래 이곳은 텅 빈 광산이었어. 어느날부턴가 국가를 피해 도망다니던 사람들이 하나둘 씩 이곳에 모이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도시가 만들어 졌고. 이제는 보통의 사핀 시민들 까지도 이곳에 오고 싶어 안달이나는 성지로 변한거요. ”

발리율은 말을 하다가 고개를 뒤로 돌려 사핀어로 욕설을 마구 퍼부었고 곧장 청년 하나가 안주와 와인병을 들고 뛰어왔다. 발리율은 일행에게 술잔을 채워주며 계속 이야기했다.

“ 이곳에 사람들이 자꾸 모이면서 규모가 커지니까 국가도 이곳을 방치할 수 없었지.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여기 사람들도 방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어. ”

발리율은 멀리서 날카로운 눈으로 걸어가는 감시자 무리를 가리켰다. 그는 감시자중 하나와 눈을 마주쳤는지 손을 들어 과장스럽게 인사했다.

“ 우리는 저들을 쿰 ․  에나힌 이라고 부르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뭘 하던 자들인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애초에 사핀 안에만 있던 단체는 아니었을 거야. 여하튼 저들은 우리를 지켜주면서 황폐한 지하동굴이던 이곳에 도시를 짓자고 해왔지. ”

일행이 숨을 죽이고 듣고만 있자 발리율은 술을 한번 권한 뒤 술잔을 다시 채우면서 얘기했다.

“ 하지만 사람 힘만으로는 이 단단한 바위 사이로 도시를 짓는것은 불가능했어. 이건 쿰에나힌들도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그들은 멀리 동쪽에서 가나씨 기업인들을 데리고 오게 된거다. ”

“ 뭐라고요? ”

휘미와 메지는 동시에 소리쳤다. 발리율이 더 놀라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메지가 말했다.

“ 가나씨 코퍼레이션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니… 거기는 가구나 생활품이나 시계 같은 잡동사니를 만드는 곳인데. ”

발리율은 고개를 저었다.

“ 나도 잘은 몰라. 하지만 거긴 엄청나게 큰 곳이라고 들었어. 섬 하나 전체가 다 공장이라며. 그리고 배를 통해서 전 세계에 물품을 나르고 있다던데. 여기에 물건을 들여 온것도 전부 서쪽 미몰라 아나실 항구를 통해서지. ”

메지는 휘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 정말일까? ”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 글쌔. 거긴 굉장히 큰 곳이잖아. 우리 기숙사 거울 밑에도 가나씨 코퍼레이션이라고 써있는걸 보면. 거긴 생산하지 않는 물품이 없잖아. ”

발리율은 두 학생이 반응을 지켜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여하튼 가나시 기업인들이 가지고 온 기계를 사용해 이 도시를 건설했고 그게 벌써 20년 전 이야기야. ”

술만 연거푸 들이키며 듣고있던 기삭은 메지를 졸라 알아듣지 못한 내용을 물어본 뒤 말했다.

“ 잠깐, 그래서 국가는 이런 무법천지를 그냥 방치해 두고 있다는 얘기야? 내가 보기엔 이 나라는 군대를 윔으로 끌고 내려갈 일이 아닌거 같은데. ”

“ 국가가 군대를 어디로 움직이는지는 별로 관심 없어. 만약 우릴 저지하러 온다 해도 우린 항상 충분한 준비가 되어있지. 첩자가 와서 이곳을 어지럽혀도 상관없고 지하수에 독을 타도 상관 없어. 그리고 아마 국가는 절대 그러지 못할 거야. ”

발리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끄러운 나팔소리가 바로 옆에서 울렸고 우렁찬 함성소리가 술집을 가득 매웠다. 메지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귀를 막았다. 사람들이 일제히 모래판 을 보기위해 난간으로 달라붙기 시작했다. 기삭은 난간으로 달려들던 한 여자의 팔꿈치에 채이고는 고함을 질렀다.

“ 이건 또 무슨 일이야? ”

나팔소리가 사라지면서 수백명의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군대에서 듣던 규칙적인 납함소리 비슷한 걸로 바뀌었다. 북소리는 없었지만 박자가 점점 맞춰지면서 목소리가 통일되었다.
사각 모래판 안으로 무쇠로 된 철창 두개가 양쪽에서 쇠사슬로 끌려 나왔다. 철창 안에는 무언가 들었는지 철벽을 엄청난 힘으로 때리며 부셔버릴 듯 날뛰고 있었다. 사람 둘이 다가가 조심스럽게 쇠꼬챙이로 철창문의 잠금장치를 풀고는 이내 질겁하여 달아났고 문이 열리면서 안에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령청 동편의 잔디밭에 있는 거대한 노천 회의장에는 윔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이번 회의를 위해 멀리 윔의 미개척지인 동쪽 을 탐험중이거나, 주변의 바다에 나가있던 인사들까지도 전부 소집되었다. 사령청장, 경비청장, 첩보청장을 비롯하여 상급 기관인 경군사령본부의 본부장, 윔의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발전본부장과 해양관리와 해전을 책임질 해양사령본부장이 모였으며 그 세 본부 위의 가장 높은, 집행자 직속령인 중앙작전본부의 ‘총무관’ 까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한 이번 전쟁을 직접 수행할 윔의 3개 육지 군단과 1개 해양군단을 이끄는 군단장들이 직급에 관계없이 회의장 중앙에서 직접 브리핑을 하게 되었으며 지원병을 이끌고 올라온 뮤케넬의 장군도 보였다. 다들 참담한 표정이었다. 서로 처음 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들은 공통된 생각을 모두 하고 있었다. 전쟁 그리고 승리. 그렇기에 모두가 먼 길을 마다 하지 않고 달려온 것이었다. 이때만큼 더 단합이 잘 되는때가 있을까.

“ 집행자들이 모두 모이시는 집행의회가 이틀뒤 첫 와월이 뜨는날 밤에 있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
중앙작전본부의 총무관은 이 말과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윔 전국의 인사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 또한 군사 집행자 깨서는 이번 전투의 중요성을 그 옛날 ‘하늘전쟁’과 비교하셨습니다. ”

총무관은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뒤 회의장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잠시 시간을 둔 뒤 다시 얘기했다.

“ 이번에는 반드시 철저한 대책을 세워 전쟁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오늘 이 네 군단장들이 직접 여러분 앞에서 브리핑을 실시할 것입니다. ”

회의는 군더더기 없이 바로 다음 순서로 이어졌다. 제일 처음으로 나온 군단장은 이미 익히 들어 잘 알고잇는 자였다.
윔의 제1군단을 맡고 있는 잔질은 커다란 지도 앞으로 다가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 사핀의 군사는 더 늘어나 있습니다. 스니게치로 2~3만의 병력이 더 유입되어 현재는 4개군단 수준인 5만 군이 스니게치와 주변 두둔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 군은 대륙의 3개군단을 합쳐 3만6천 이며 뮤케넬에서 지원된 5천 군단을 합치면 대략 4만의 대륙군단과, 약 300척의 함대에 5천 해양군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리적 특성상 사핀과 윔은 시세움으로 이어지는 이 세갈래 길이 유일한 통로여서 난전 보다는 스니게치 회전같은 대규모 회전 한번으로 전쟁의 승패가 좌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교적 열세한 병력을 한곳에 모아 적을 상대해야 하기때문에 반드시 사핀군의 통로를 예상하여 맞아야 합니다. 병력을 나누는 것은 각개격파 당하여 멸망하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 안티크로니움의 설마(雪魔)를 등에 지고 스니게치를 기습한 저들이기에 그들이 사용할 통로를 속단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2군단장께서 설명하겠습니다. ”

“ 저들이 통과할 길목을 맞추기만 한다면 우리가 훨씬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싸움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핀군이 길목에 접어들기 직전까지 그들이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아는것은 매우 힘듭니다. 왜냐하면 사핀군쪽에서 갈라지는 길목은 매우 사이가 좁은 반면 윔쪽으로 빠져나오게 되는 길목들은 매우 사이가 벌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우리는 그들과 엄청난 신경전을 벌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제 2군단의 척후부대와 첩보청의 모든 첩보요원들을 동원할 것이며 산맥 곳곳에 배치할 것이며, 새로운 암호를 만들어 허위정보를 가려내고 적의 속임수 에 대비할 것입니다. ”

회의는 동쪽에 있던 해가 정 반대방향으로 흘러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적월기인 탓에 날씨가 꾸물거리더니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구름이 깔렸다. 이윽고 한방울 두방울 눈치를 보던 빗방울은 대지를 적시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회의장의 열기는 빗물을 증발시켜버릴 정도로 더 뜨거워져만 갔다.

뜯겨지고, 부딪히다가 허물어지고, 다시 도약하여 할퀴고… 오윰의 지하는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눈앞의 격렬한 싸움에 이들은 온 정신을 내다팔았다. 몸짓 하나하나 상처 하나하나에 이들은 열광했고 점점 술집은 광란의 도가니가 되어갔다.

메지는 새로운 것을 느꼈다. 이 느낌은 그가 만들던 기계부품의 결함을 발견했을 때나 수수깨기같은 수학문제를 풀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건 분명 직접 몸으로 닿아서 아프다는 것을 느꼈을 때 생기는 깨달음이었다.

“ 미쳤군. ”

디로단이 옆에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메지는 그가 고마워졌다. 그는 디로단에게 말했다.

“ 아픈 사람이 보통 사람 사이에 섞이게 되면, 병이 옮는거 맞죠. ”

디로단은 이해가 안되는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메지는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사미잇들의 싸움에 집중해 있는 휘미를 한번 보고는 말했다.

“ 음, 군에서 처음 느꼈어요. 계곡으로 마구 돌격하기 전에 우리 병사들이 달아나는 적을 보며 제각기 납함을 질렀죠. 어느새 저도 따라하기 시작했어요. 그들과 똑같이. 제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말이죠. 마치 제 이성을 등뒤에서 누군가 획 벗겨가는 느낌이었어요.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계곡을 향해 달려가고 있더라구요. ”

디로단은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며 생각에 빠졌다. 메지가 계속해서 말했다.

“ 그건 분명 사핀군의 계략이었어요. 우린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계곡으로 이탈하여 달려간 거에요. 그 젊은 무소냐쇼즈 사령관 녀석이 진격을 명했던 것은 아닌거 같아요. 어두워서 통제가 잘 안되었던거죠…그리고 보니 그때는 와월기였잖아요? ”

디로단은 잠시 생각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메지는 팔짱을 끼었다.

“ 와월기는 화를 누그러 뜨리기도 하지만 공포감을 없애주기도 하잖아요… 흐로게는 와월의 마력까지도 전투에 이용한 것 같아요. 달의 기운을 정확하게 받아서 공포감이 없었고 그런 상황에서 억지로 흥분까지 헀으니까. 흐로게란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군요. ”

메지는 침을 한번 삼킨 뒤 소음 속에서 다시 계속해서 그에게 말했다.

“ 여하튼, 지금도 똑같은 것 같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저도 모르게 사람들에 휩쓸려 사미잇들의 싸움을 응원하고 있었거든요. ”

여태껏 펄쩍펄쩍 뛰며 응원하고 있던 휘미는 고개를 돌렸다가 메지와 디로단이 심각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그에게 왔다. 휘미는 신이 난 얼굴로 숨까지 헐떡이다가 정신이 든 듯 자리에 앉았다.

“ 휴. 저건 참… 대단하군. ”

“ 뭐가 대단하다는 거야? ”

메지는 캐묻듯이 그에게 말했다. 휘미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

“ 글쌔. 잘 생각해 보니 별로. 아니 저건 좀 그런가?. ”

메지는 디로단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휘미와 디로단의 시선을 모은 뒤 말했다.

“ 휘미. 네가 전에 새가름 풀에 대해서 수업시간에 말했던거 기억나? 소량을 사용하면 내량을 늘려주지만 많은 양을 사용하면 전혀 다른 효과가 난다는거. ”

“ 그래. 조미료 같은 거지. 너무 많으면 오히려 해가되는… ”

“ 우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인거 같아. ”

디로단이 입을 열었다.

“ 맞아. 사람은 혼자 있을때랑 여럿이 있을 때랑 달라. 우린 혼자 있을때는 각각의 이슬처럼 보이지만 그 이슬이 서로 뭉치면 홍수나 해일이 돼서 나타날 수도 있지. ”

결국 사미잇 한 마리가 피주검이 되어 땅바닥에 쓰러졌고 살아남은 나머지 한 마리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대며 우리 안으로 억지로 몰아져 들어갔다. 경기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났을 때 기삭과 발리율이 어깨동무 까지 하고는 웃으며 자리로 들어왔다. 항상 티격태격 하던 모습과는 정 반대였다. 기삭은 떠들려고 준비를 하다가 일행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눈치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 왜? 내기에서 졌어? 걱정마! 발리율은 이겼다는군! 역시 맘에 드는 놈이야! “

“ 잠깐. 기삭 잘 생각해봐. 이건 좀 문제가 있는거야. 그리고 발리율. 이런 투기장이 여기 얼마나 있죠? ”

휘미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발리율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뒤 손가락을 꼽아보다가 말했다.

“ 여기말고 두군데가 더있지. ”

기삭이 펄쩍뛰었다.

“ 뭐? 한 곳당 몇 마리정도가 있지? ”

“ 글쌔. 한 30마리 쯤? ”

메지가 소리쳤다.

“ 어떻게 그렇게 많아요? 한 마리 잡기도 어려울텐데. ”

발리율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투기장 사냥꾼들 짓이지. 보통은 새끼를 포획해 와서 키워서 팔기도 하지만 유명한 사냥꾼들은 무쇠철창에다가 생포해서도 가져오더군. 근데 다들 뭐 잘못 먹었어? 눈빛이 왜이래. ”

디로단이 말했다.

“ 적어도 지금까지는 난 이 도시를 보는데에 긍정적이었소. 하지만 지금 저것은 매우 말이 안되는군. ”

발리율이 정색하며 말했다.

“ 사미잇 투기장은 오윰의 핵심기관 중의 하나요! 가장 규모도 크지. 이건 매우 상징적인 것이오. 경기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는 단결감도 느끼는 것이고. 또한 여기서는 배팅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정부가 운영하는 투기장들보다 훨씬 흥미진진하지.…여하튼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오. ”

휘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 휴, 진정해요 발리율. 그리고 당신 말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 생각도 이해하게 될거에요… 어 이건 기평회때나 쓰는 말투인데 여기서 또 쓰게 될 줄은… 아무튼 봐요. 당신들이 이 도시를 만든 목적이 뭐에요? ”

발리율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 자유를 위해서지. 진정한. ”

“ 그럼 이 투기장의 존재 목적은? ”

“ 우리의 단결을 위해서. 그 외에 재미있기도 하고 돈도 벌 수 있으니까. ”

“ 좋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당신들은 자유가 억압당하는 것이 싫어서 이곳에 왔죠. 그럼 당신들은 또 다른 누군가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은가요? ”

“ 그야 아니지. 물론. ”

“ 됐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까지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