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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월

『26～30일. 새카맣거나 빛나지 않는달. 평소보다 어두우며 밤이 가장 춥고 길다. 묵월이 뜬 밤에는 쉽게 졸립지 않으며 밤이 깊어갈 수록 정신적인 능력이 오른다. 평소보다 더 깊은 집중이 가능하며 기억력과 암기력이 대폭 올라가 학자들에게 매우 사랑받는 달이다. 』

“ 사핀인들은 바보가 아니군. ”
기삭는 묵월기가 되면서 빽빽해진 보초조를 보며 메지에게 말했다.
날은 다시 몹시 추워져 밖에 있으면 눈동자가 얼어붙고 코가 마비되어 숨쉬기가 힘들 지경이었으며 바람은 미친듯이 거세어 천막은 줄로 두 번 이상 묶어놓았는데도 기둥이 뽑혀 날아갈 지경이었다.

“ 사핀인들의 지식수준은 생각보다 상당해. 윔 집행부가 사핀인들을 다이지에 입학하지 못하게 해서 그렇지 만약 허락만 했어봐. 특히 저들은 수학을 종교처럼 맹신하지. 웃긴거 하나는 피스너가 저들에게는 사핀의 대표적인 수학자로 알려져 있어. ”

기삭은 피스너 라는 말에 손뼉을 쳤다.

“ 피스너? 하늘 전쟁 때 유명한 장군이었지 않나? ”

옆에서 조심스럽게 천막 틈 사이로 보초의 주기를 파악하던 휘미가 킥 하고 웃었다. 메지가 웃으며 대답했다.

“ 그사람은 여자에다가, 음악가고, 스물 몇살밖에 안됐다던데. ”

디로단은 풀뿌리 하나를 물고 옆에서 열심히 단검의 칼날을 갈고 있다가 일행 쪽을 바라보았다.

“ 피스너는 앗사나 고원에 왔었다던 대륙사람의 이름이다. ”

“ 예? ”

휘미와 메지가 거의 동시에 외쳤다. 기삭이 놀라 그들의 입을 막았다. 노역소 안의 포로들이 모두 지쳐 자고 있다고는 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이들이 말하는 것을 듣는다면 좋은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들은 다시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 보초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 정말 정교하다. 눈바람이 미친 듯이 부는데다가 너무 어두워서 가시권이 3m 정도로 줄어들었지만 보초 인원이 더 늘어나서 틈새가 생기는 양에는 크게 변함이 없는 듯 해. ”

“ 설마 단월주기 까지는 계산하지 못하겠지. ”

휘미의 물음에 메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묵월이 뜨자 머리가 잘 굴러가는지 그의 계산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는 별로 계산하지도 않고 곧바로 말했다.

“ 음. 결과적으로 이대로라면 묵단월이 뜬다고 해도 주어진 시간은 20초 정도야. 그리고 아직 우린 울타리를 넘는 법도 정하지 않았어. ”

휘미가 디로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 디로단. 울타리를 넘을 방법은요? ”

“ 생각중이야. 그보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더군. 어째서 저 보초들이 뒤쪽까지 전부 살펴보며 순찰할거라고 생각한 거지? ”

메지만이 이해하고는 탄성을 질렀다.

“ 맞아. 억지로 뒤를 돌아본다면 모르겠지만 저들은 거의 순찰 내내 앞만 보고 걷는다고 ”

메지는 천조각에 있던 원들을 전부 반원으로 줄였다.

“ 이렇게 되면 시간이 좀 많아져. 묵단월을 기준으로 대략 30초정도가 날 거야. ”

“ 디로단, 20초안에 4명이 동시에 3m 짜리 울타리를 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

휘미는 저번과 똑같이 디로단에게 물었다. 디로단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얘기했다.

“ 발판 하나만 마련한다면 3m 정도는 다들 넘을 수 있을거 같은데. ”

기삭이 비스듬히 고개를 치켜들고 디로단에게 말했다.

“ 디로단. ‘뭐뭐 같다’는 말은 재수가 없어. 그리고 나라면 발판이 없어도 이정도는 한손으로도 뛰어넘겠다. ”

“ 그럼 문제는 저랑 메지네요. ”

휘미는 팔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눈꽃송이 뿌리를 계속 먹은 뒤로 한결 부드러워 졌긴 하지만 온몸이 비정상인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만약 틈새가 생기는 짧은 시간동안 발을 한번이라도 잘못 디뎠다가는 곧바로 붙잡혀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미 넘어간 다른 사람들도 자기로 인해 붙잡힐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휘미는 얼굴에 눈보라를 맞으면서도 천막 멀리 보이는 울타리를 걱정되는 눈빛으로 계속 쳐다보았다. 메지는 눈을 감고 울타리를 넘는 것을 상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때 갑자기 천막 문이 열리면서 사핀군 다섯이 들어왔다. 횃불로 인해 수용소는 환해졌고 구석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던 네 포로는 곧바로 그 자리에 엎어져 자는척하기 시작했다.

‘ 무슨 일이지? 설마 숫돌을 훔친 것이 걸린건가? ’

‘ 혹시 우리가 말하는걸 누군가가 고자질한 게 아닐까? ’

하지만 사핀군의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 모두 일어나라! 눈 속에 파묻혀 죽고싶냐! ”

사핀군은 일어나지 않는 자들은 횃불을 눈앞에 까지 가져다 대고는 얼굴을 태워버릴 듯이 위협했다. 포로들이 전부 일어나자 조를 나누어 노역소 곳곳에 쌓인 눈을 치우게 했다. 이들이 밖으로 나갔을 때는 눈보라가 미친 듯이 거세어져 비명 같은 고함소리를 지르며 노역소를 맴돌고 있었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공포와 증오를 구체화시켜 담아놓은 듯한 소리였다. 그 와중에 눈도 엄청난 속도로 쌓여갔다. 한곳의 눈을 치우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면 치워놓은 곳에 더 많은 양의 눈이 쌓여있는 꼴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눈 위의 어떠한 흔적도 몇 분 내에는 사라질 지경이었다. 바람은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불어서 눈을 삽으로 푸면 삽 위의 눈이 전부 바람에 날려 얼굴로 달려들었다.

“ 이 미친놈들은 왜 야밤에 이걸 시키는 거지? ”

메지의 뜯겨나간 듯한 고함에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람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 이거 놔두면 다 굳어서 노역소가 사라질 거야. ”

“ 그건 우리가 바라는 일 아니었나요? ”

메지의 목소리는 삼킬 듯 파도처럼 밀려오는 눈보라로 인해 묻혀버렸다. 포로들 일부가 눈보라에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 젠장. 사메시아여! ”

기삭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삽만 연거푸 퍼내었다. 눈보라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수백 명의 포로들이 노역소를 다 복구했을 때는 이미 많은 수가 탈진해 쓰러져 있었다. 휘미는 눈 바닥에 누워 정신이 자꾸 아득해져 가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풀뿌리를 씹기 위해 품속을 더듬었다.

쌓인 눈이 얼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미처 치우지 못해 달라붙은 눈들은 돌처럼 뗘지지 않았다. 건물들의 바깥문마저도 전부 얼어버리자 감독관들은 횃불로 문을 한참동안 녹여야만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날 낮 동안의 노역은 없었고 대신 수용소 안은 시체 보관 장소가 된 듯 쓰러져 신음하는 포로들로 가득했다. 그나마 휘미 일행은 좋은 풀을 먹어서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다.
물론 다른 많은 포로들도 허기를 못 참고 풀을 뜯어먹었다. 하지만 사람 먹을 풀과 돼지 풀을 구분 못하고 다 뜯어 먹어 풀독에 올라 눈이 팅팅 부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두 학생은 그런 포로들을 보며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탈출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차마 말리지 못한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특히 노역소 주변에는 해 34가 많이 나 있었는데 이 풀은 향기도 좋고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 풀은 밧줄용으로나 쓰일 뿐 줄기가 질기고 섬유질이 거칠어 씹고 나면 목이 깔깔해서 넘어가지 않는다. 그걸 먹은 자들은 소화가 안되어 변을 못 봐 꼬챙이를 들고 항문을 파내며 고통스러워했다. 디로단도 두 학생의 표정을 읽었는지 침착하게 그들에게 말했다.

“ 얼른 나가서 윔군에게 이곳 위치를 알려주자. ”

디로단의 말에 기삭도 밝게 얘기했다.

“ 응. 우리가 여길 나가는게 저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울타리를 어떻게 넘을지 생각났어. ”

세 포로의 시선이 쏠리자 기삭은 천막 밖으로 손을 뻗어 눈을 한 움큼 가져왔다. 그리고 그것을 단단하게 뭉치며 말했다.

“ 이렇게 눈을 뭉쳐서 울타리에다가 미리 붙여 놓으면 꽁꽁 얼 거라고. 그럼 그걸 딛고 올라가면 될 거야. ”

“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

디로단은 기삭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휘미가 말했다.

“ 그럼 준비가 다 된 거죠? ”

“ 변수만 없다면. ”

기삭이 대답했다.

묵단월

『특정 달의 31일. 단월의 주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다. 만약 나타난다면, 단월은 무조건 그 월기의 마지막 날인 31일에 나타난다. 단월은 20～30분 정도 잠깐 짧은 시간 고개를 내밀다가 없어지는 달이며 묵색의 단월은 많아야 1년에 세 번 정도 모습을 드러낸다. 묵단월이 뜨면 잠을 자고 있던 자들도 전부 깨며 누구도 절대 잠을 잘 수 없다. 바깥은 매우 어두워져서 불빛까지도 어둠이 삼켜버린다. 대신 정신적인 능력이 상승하여 한번 본 것은 모두 암기되고 가지고 있던 거의 모든 기억들을 곧장 떠올릴 수 있다.』

“ 흙 50알 뒤 종이고양이 4장 한번만 물해줘.(50초뒤에 보초 4명 한번만 확인해줘)  ”

“ 수인(맞아) ”

묵단월날 아침은 여전히 추웠지만 노역은 다시 시작되었다. 메지는 마지막으로 계산을 점검하고 있었다. 휘미는 음어를 이용해서 작업 중에 지나갈 때 마다 계속 메지에게 정보를 알려줬다. 감독관들은 이들의 이상한 대화를 들으면서 인상을 쓰는 것 외에는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메지는 계산이 끝나자 무뚝뚝하게 앞만 보고 있는 보초 코앞에서 휘미에게 말했다.

“ 고양이는 파란색 들쥐가 있는 것을 알까?(감독자는 오늘 도망이 있는 것을 알까?) ”

“ 그건 절대 불과 같은 일이겠지. (절대 그렇지 않겠지) ”

사실 사핀어와 윔어는 비슷한 면이 많아 처음 듣는 자도 어느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다. 그러나 휘미와 메지가 계속해서 보초의 앞에서 태연하게 음어를 주고받는데도 보초는 전혀 모르는지 시선자체를 다른쪽에 두고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포로들만이 두 학생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노역을 시작한 후로 정신이 나가 헛소리를 하는 포로들은 흔했으니까.

창고에서 노역 중이던 디로단은 주머니속에서 나이프를 어루만지다가 순간적으로 옆에 있던 기름 주머니 하나를 잘라내었다. 탈출할 때 가져갈 물건을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기삭은 수용소 외곽의 화장실 안에 숨어서 문틈으로 망을 보고 있었다. 잠시 뒤 휘미와 메지가 나타났고 메지는 모르는척 지나가다가 기삭에게 무언가 손짓을 한번 했다. 그러자 기삭은 보초의 눈을 피해 울타리로 달려가 눈뭉치를 곳곳에 박아 넣고 돌아왔고 그러기를 몇 번 더 반복했다.

달은 아직 없었다. 밤이 되자 휘미, 메지, 디로단, 기삭 네 윔군 포로는 미동도 없이 수용소 구석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음장같은 바람이 이들 곁으로 별빛을 실어다 주었다. 그들의 옆에는 이미 다로기에서 깨끗이 분리된 징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오늘 아니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휘미는 나가고 난 뒤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눈보라 사막은 어떤 곳인가? 그곳을 넘으면 오히려 적의 본거지로 들어가게 되는데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청단월날 뽑은 풀에 대해 알아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휘미는 머릿속에서 맴도는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나하나씩 꺼내보았다. 기삭은 변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변수들, 또 눈을 치우라고 우리를 불러내면 어쩔 것인가? 만약 적들이 단월이 뜰 것을 이미 파악했다면 어떡할 것인가. 한편 메지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적군이 탈출을 발견하는 시간은 언제쯤이며 그들의 추적속도는 얼마나 될 것인가. 우리는 얼마나 빨리 이동해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디로단은 탈출 과정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눈을 밟고 울타리를 넘는 과정에서 소리를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맥 어디에 숨어서 밤을 보내야 하는가. 불을 피울 수 있을까. 터놓고, 탈출도중 다수의 적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휘미는 디로단의 작은 가죽보자기에서 풀을 한참 뒤적이더니 파란 기운이 도는 이파리를 때내어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기삭이 눈앞에 풀을 바짝 가져다대더니 말했다.

“ 못 보던 건데. ”

“ 해122야, 원래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청월 밤에 울타리 밑에 핀 것을 발견했어. ”

휘미는 효과는 말해주지 않고 먼저 입안에 풀잎을 넣었다. 디로단과 기삭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따라 넣었고 메지는 잠시 망설이더니 입안에 풀을 넣었다. 해122는 진통제와 비슷한 것이었다. 졸음을 유발하지만 어차피 묵단월날이라 잠이 올 리가 없기 때문에 상관이 없었다. 휘미는 당장 뻐근했던 팔근육이 풀리면서 긴장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은 점점 결전의 순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 떳다. ”

디로단이 나직하고 조용하게 말했다. 묵단월이 완연히 그 모습을 내밀었다. 밤하늘보다도 더 새카맣고 커다란 원모양이었다. 모래같이 깔린 별 사이에 난 공허한 구멍였다. 묵단월의 검은 기운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만물을 잠식해 나가고 있었다. 달의 기운으로 인해 포로들이 자기도 모르게 하나둘씩 깨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메지는 앞으로 튀어나와 보초의 주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들 주먹을 꽉 쥐고 울타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메지는 뒤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 저 보초조 불빛이 모퉁이를 돌면 바로 달리면 돼! ”

메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보초들은 모퉁이를 돌았고 모두 달려가기 시작했다. 울타리에 도착한 탈출자들은 기삭이 박아놓은 눈덩이를 밟고 올라가 울타리를 껴안듯 매달렸고 잠시뒤 한번 더 도약해서 울타리 가장 윗부분을 붙잡았다. 제일먼저 반대편으로 떨어진 것은 디로단이었다. 디로단은 먼저 던져놓은 배낭을 챙겨 일행을 기다렸다. 다음번에 보인 얼굴은 놀랍게도 메지였다. 메지는 머릿속으로 그린대로 침착하게 울타리를 넘었고 떨어지면서 두꺼운 눈밭 위를 굴렀다. 몇 초 뒤 한 그림자가 더 보였다. 휘미였다. 그는 한손만 붙잡고 올라와 반대편으로 불안하게 떨어졌다. 그가 손을 짚은 곳에는 선혈이 선명했다. 울타리의 모난부분을 움켜쥐면서 상처가 난 것이었다.

‘기삭은!’

메지는 휘미를 부축하며 말했다. 휘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계산된 20초가 다 지났음에도 기삭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멍하니 울타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을 디로단이 불렀다.

“ 늦었어. 얼른 뛰어! ”

휘미는 피가 나는 왼손을 움켜쥐고 있는 힘껏 북쪽의 산맥 속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기삭은 붙잡힌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곧 이들이 도망간 것도 들통 날 것이 분명했다. 휘미는 눈을 질끈 감고 뛰다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울타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울타리 위에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 들켰나? “

휘미의 외침소리에 앞서 뛰어가던 디로단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질 듯 하더니 갑자기 밝게 변했다. 그가 외쳤다.

“ 기삭! ”

기삭은 울타리에서 떨어져 잠시 절뚝거리더니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와 이들 앞에 다다랐다. 그는 앞의 동료들에게 계속 달리라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 성공이야! ”

기삭은 밝게 웃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제일 놀란 것은 메지였다. 기삭이 빠져나온 것은 일행이 탈출을 시작한지 1분도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걸리지 않았을까? 메지는 기삭이 혹시 착각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어 물었다. 아니 물으려고 했다. 기삭은 뛰면서 먼저 이들에게 말했다.

“ 밟고 있던 눈뭉치가 깨졌어! 근데 뒤에서 보초가 오더라고. 그래서 눈 속에다가 내 몸을 묻었다, 그러다가 다시 나온거야. ”

그제야 메지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는 자유롭게 달리는 것이 이토록 기쁜 일인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잔질은 잠시 현기증이 다시 나는 것을 느꼈다. 건강을 거의 되찾은 그는 금방 주변사람들이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의무병 한명의 멱살을 붙잡고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다.

“ 내 옷을 가져오게! 당장! ”

갑옷을 다시 갖춰입은 그는 위머에 있는 사령청의 의무부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역사적인 인물의 갑작스런 등장에 의무부 앞의 광장은 소란으로 가득 찼다.

“ 장군님! ”

어디선가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잔질은 소리가 난 쪽으로 몸을 틀었다. 키가 매우 크고 덩치 가 산만한 한 장수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쓰러진 뒤로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키던 자였다.

“ 기스크 ”
1중대 1소대에서 잔질을 15년이나 모신 백인대장의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그는 스니게치 회전에서 살아남아있던 것이었다. 기스크의 목소리에 이곳저곳에서 잿빛칼날 병사들이 하나 둘 씩 광장으로 모여 그의 사방을 가득 매웠다. 기스크는 흐느끼며 그에게 말했다.

“ 면목이 없습니다. 장군님. ”

“ 얘기 다 들었네.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

“ 부하들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장군님을 따라 수없이 많은 전장을 누비던 그 병사들이 주검이 되어버렸습니다. ”

“ … ”

잔질은 잠시동안 눈을 감고 묵념하듯 움직이지 않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 얼마나 살아남았는가. ”

“ 지원군 300과 잿빛칼날 2000명정도가 적진을 뚫고 이곳으로 왔습니다. 대부분은 저와 같이 이곳에서 요양중입니다. ”

“ 2500명이라... ”

잔질은 광장 주변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자들도 간간이 보였지만 예전과 비교하여 턱없이 적은 숫자였다. 때마침 윔 중앙로의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려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종소리는 그의 머릿속을 해일처럼 휩쓸고 지나갔고 그는 한동안 마비된듯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눈을 감고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다시 타오르고 있었다. 결의에 가득 차 있었다. 순간 기스크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는 이미 잔질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았다.
잔질은 광장의 병사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말했다.

“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형제들을 위해서! ”

잔질의 소리에 병사들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축 쳐져 죽을상을 하고 있던 자들까지도 무슨 마력에 걸린 듯 모두 예전의 힘을 되찾은 듯 했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영웅의 귀환이었다.

잔질이 다시 움직인다는 말에 흩어져 있던 병사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살아난 장교 몇몇도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그를 찾아왔다.

“ 일단 사령청장을 뵐걸세. ”

그 말 한마디와 함께 사령청의 중앙 회의실로 들어간 잔질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환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와 장교들에게 말했다.

“ 곧 윔 전역에 비상령이 내려질 것이네. 뮤케넬로는 이미 원군을 요청했고 윔 동부산간지역까지도 모병소를 설치하고 있고. 아울러 지금부터는 예전보다 다섯배의 액수로 모병을 실시할 것이며 건축가, 장인, 의사, 기술자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이 함께 전쟁에 대비할 것이다. 온 나라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

실로 그러했다. 스니게치 성을 빼앗긴 뒤 군단 한개를 통째로 날려버린 윔은 수도의 관문격인 시세움 까지 위험한 상황이었다. 병사들을 있는대로 끌어모아 군단 두개를 수도 위머와 관문도시 시세움 부근에 배치했지만 한번만 더 패배할 경우에는 수도가 그대로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긴급하게 집행자들이 모여 집행회의를 열었고 국가 전체에 비상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잔질은 이 모든 사실을 듣게 되고는 한가지 궁금한 것이 생각났다.

“ 그래서. 그 젊은 사령관은 어떻게 되었는가? ”

“ …강화를 맺을 조건으로 흐로게가 포로로 잡아두고 있다고 합니다. ”

잔질은 장교의 대답에 지그시 눈을 감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 잿빛칼날의 병사들을 다시 모으게. 기존에 살아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군단을 다시 편성하고.흐로게를 죽이지 않는 한 우린 절대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네 ”

미월

『눈썹모양의 그믐달, 혹은 초승달의 형태. 1～5일. 순수함과 여성을 상징. 여성의 힘이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진다. 아이를 갖거나 출산하지 못한다. 출항이나 사업 등 큰일의 시작을 미월에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긴다. 미월에 결혼을 한다거나 술을 먹어도 좋지 못하다. 매우 경건한 기간이기 때문에 각종 제사나 의식은 모두 미월에 벌어진다.』

메지는 외투를 싸맨 채 바위틈에서 죽은듯 누워 있었다. 험준한 석산 위로 도망치는 동안 다리는 완전히 풀려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석산은 메지가 만난 가장 강한 적이었다. 바위사이로 떨어져 구르고 얼음판에 미끄러져 온몸에 멍이 들었고 마른 나무등걸이 정강이를 걸어 수도없이 넘어졌다. 도중에는 층암층의 오르막이 나타나 절벽과 계곡을 동시에 건너야 했다. 이들은 등산을 하듯 돌부리에 매달려 그것을 겨우 건너갔다. 밧줄이 없는것이 이들에게는 통탄의 한이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싸워 이기는 수 밖에 없었다. 사핀군이 행방을 알아차리고 언제 쫒아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석산이라는 눈앞의 적 외의 일체 것들은 어떠한 관용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어느새 다로기는 너덜너덜해졌고 발은 탱탱 부어올랐다.
게다가 안티크로니움 산맥 깊숙한 곳의 밤은 얼음감옥보다도 더 지독했다. 멀리서 산을 바라볼 때와 실제 이곳에 도착했을때의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산턱 밑에서 사방을 바라보니 도무지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것은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 주었다. 메지는 앞장서서 길을 뚫어주는 디로단 마저도 없었다면 이미 졸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산을 넘는 동안 언 바람이 계속해서 등 뒤에서 불어왔기 때문에 그는 허리와 뒷목에 아무런 감각을 느낄수가 없었다. 몸에 감각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산정을 넘고 나서야 바람은 조용해졌고 깊은 바위 틈새에 쉴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디로단은 얼지 않은 나뭇가지를 찾아와 그 위에 불을 지폈다. 옆에 있던 휘미가 다로기를 신은채로 발을 주무르며 말했다.

“ 위치가 노출되지 않을까요? ”

“ 나뭇가지는 연기가 나지 않아. ”

디로단은 침착하게 숫돌을 튕겼고 10여분이 지나자 나뭇가지에 파랗게 불이 붙었다. 기삭은 온몸을 옷 속에 둥그렇게 말은 채 바위틈새에 몸을 구부리고 있다가 말했다.

“ 그게 그거군. ”

그래도 기삭은 몸을 돌려가며 골고루 체온을 녹였다. 휘미는 눈꽃송이 풀을 불에 녹여 나눠주었다. 온몸이 녹아들자 하루 동안의 피로가 막혀있던 혈관을 타고 쏟아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호흡을 가다듬자 짙은 농도의 얼어붙은 어둠이 그의 폐를 질식시켰다. 그는 몸을 떨며 기침을 했다.
디로단은 항상 그렇듯 침착한 목소리로 이들에게 말했다.

“ 내일은 저기를 건넌다. ”

그는 멀리 미월 아래의 지평선을 가리켰다. 나머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산맥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가면 눈보라 사막이 나온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다. 죽은 듯이 몸을 옆으로 뉘인 채 쓰러져 있던 메지가 말했다.

“ 가만히 있는게 이렇게 힘든건지 몰랐어. ”

그는 장갑을 벗고는 동상에 걸린 엄지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휘미는 울타리에 찔린 왼쪽손의 천을 풀고 약초를 입에 물어 씹었다가 상처위에 뱉었다. 쉬지않고 이틀간 산을 넘은 이들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디로단은 하늘에서 북극성을 찾아 위치를 대충 찍어보더니 일행에게 말했다.

“ 사막을 넘은 후도 문제야 ”

휘미와 메지는 지리학 시간에 얼핏 봤던 지도를 떠올렸다. 하지만 사막위의 사핀은 그다지 흥미가 없는 지역이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 제길 묵단월 때라도 한번 떠올려 볼껄. ”

휘미가 기침이 섞인 한숨을 토했다. 메지가 아쉬운데로 설명했다.

“ 가도를 찾으면 주변에 마을도 가까이 있을거에요. ”

“ 마을만 찾으면 모든게 끝인거지? ”

기삭이 힘없이 말했다. 휘미는 고개를 저었다.

“ 다시 윔으로 돌아가는 것도 큰 문제지. ”

“ 아무튼 일단은 이 빌어먹을 가로소놈들 옷부터 벗고 싶어. 이 빌어먹을 풀도 그만 씹고싶고 젠장... ”

기삭은 그 뒤로도 얼굴을 옷속에 파묻은채 한참을 중얼거렸다. 일행이 아무런 대답없이 가만히 앉아있자 그는 불평을 멈추고는 옷 밖으로 얼굴을 들어 세 사람을 한번 바라보며 씩 웃고는 다시 기절하듯 바위틈에 머리를 끼었다.

불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디로단은 다시 나뭇가지를 구하러 주변을 탐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씨가 꺼지는 순간 모두가 얼어 죽는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