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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월

「푸른 빛을 내는 달. 21～25일. 자연의 모든 동 식물들이 생동하는 때. 청월기의 밤에는 본능을 따라 희귀한 생물들이 달빛을 받으러 나온다. 날씨는 매우 맑고 깨끗하며 몸에 상처를 입은 자는 밖에 나가 달빛을 받는 것만으로도 상태가 호전된다. 」

“ 지금 무언가를 생각하는것은 사치일까? 잠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잠을 자면 배가 고플테고 배가 부르면 잠이 온다. 무언가를 생각할 시간은 없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걸까. 하긴 어쩔수 없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건 그들이 바라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끔 만드는것. 의지를 망각하는것. ”

휘미는 차가운 수용소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품속에 손을 넣어 풀잎 몇 개를 집어들었다. 굉장히 쓰고 떫었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입속에 넣고 씹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과 동시에 뱃속이 따뜻해졌고 조금이나마 몸의 통증이 조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수용소 안은 지옥과도 같았다. 힘든 노역을 못이기고 끙끙 앓는 자, 죽은듯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잠을 자는 자, 가끔씩 경련을 일으키며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자 등 공기는 매우 탁하고 분위기는 음산했다. 휘미는 있는힘껏 풀을 씹으며 못했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들이 그의 눈앞에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그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가며 그것들을 차곡차곡 정리하였다. 잠시 뒤 그는 기민한 동작으로 옆사람을 타넘고 뒷벽으로 가서 수용소 뒤쪽 천막을 들춰보았다.

“ 역시 그렇군. ”

하늘에는 청월이 빛나고 있었다. 이곳에 온지 3일째 되는 날이니까. 휘미는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얼음장같이 상쾌한 기운이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신이 조금 더 밝아졌다.

“ 쓸만한 풀들을 찾을수 있겠는데. ”

휘미는 고개를 밖으로 빼들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멀리 좌우측에서 보초가 걷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얼른 천막을 닫고 벽에 몸을 붙였다.

“ 세걸음, 두걸음, 한걸음 ... ”

2개의 보초조가 정확히 수용소 뒤편에 멈춰 서로 만났다. 그들은 서로 웃으면서 사핀어로 떠들어대더니 정확히 1분이 지난 뒤 수용소를 떠났다. 휘미는 다시 조심스럽게 천막을 열어젖힌 뒤 주변의 풀들을 살펴보다가 두 발자국정도 떨어진 화장실 앞으로 녹색으로 빛나고 있는 새끼손가락 만한 풀을 발견했다.

“ 해78... ”

휘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막사를 벗어나 두 손과 무릎으로 풀이 있는 곳까지 있는 단번에 기어갔다. 그냥 걸어갔다가는 발자국이 남는데다가 다로기의 징소리 때문에 보초에게 걸려 보리만 먹는 벌을 받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풀은 정작 신경도 쓰지 않고 풀 주변의 땅을 긁어 파내어 풀뿌리만 조심스럽게 밖으로 드러내었다. 해78이라 불리는 눈꽃송이 풀은 밖으로 나온 줄기와 잎사귀보다도 뿌리의 크기가 훨씬 더 굵고 길었다. 뿌리는 황갈색이었으며 수많은 잔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뿌리전체가 마치 숨을 쉬듯 면적이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는 점이었다. 휘미가 뿌리를 다 드러낼 때쯤 또다시 양쪽에서 보초의 불빛이 보였다. 휘미는 화장실 안으로 몸을 숨기고는 불빛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는화장실 안에서 뿌리 끄트머리를 잡고 힘껏 당겼지만 워낙에 강하게 박혀있는지라 움직이지 않았다. 불빛이 사라지고 그가 다시 양손으로 뿌리를 강하게 잡아당기자 그제야 지면에서 끊어지듯 분리되었다. 분리된 뿌리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잔뿌리들을 꿈틀대며 오그라들듯 움직였고 그는 그것을 얼른 한손으로 움켜잡고는 풀이 있던 곳을 눈으로 덮은 뒤 수용소 안으로 들어왔다.

“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

메지는 휘미가 들고있는 뿌리를 보고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휘미는 대꾸하지 않은 채 뿌리 절반을 때어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두 학생은 흙을 손으로 대충 털어버린 뒤 뿌리 한쪽을 씹어먹었다. 눈꽃송이풀은 식물로된 고기와 같은 것이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뿌리 안에는 많은 영양소가 들어있어서 병에 걸린 자도 뿌리를 갈아 만든 음료를 마시면 다시 태어난 듯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뿌리를 얼마간 씹은 뒤 두 학생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잠시 뒤 웃음을 터뜨릴수 밖에 없었다. 윤기없는 머리카락은 이미 헝클어져 머리와 달라붙어 있었고 얼굴은 매마르고 홀쭉해져 병자처럼 보였다. 눈동자는 힘이 풀려 초점 없이 흔들리고 입술은 가뭄이 난 듯 갈라진대다가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메지는 왼쪽 팔을 조금씩 떨고 있었고 휘미는 허리에 힘을 주기가 힘들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불과 1달 전만 해도 이들은 앞으로의 다이지를 책임질 촉망받는 학생들이었다. 그 누구도 두 학생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 자신도 마찬가지다. 기운을 조금 차리자 이들은 곧바로 앞으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정말 몸값을 지불받고 우리를 풀어줄까? ”

메지의 말에 휘미는 고개를 저었다.

“ 우린 용병이야. 다쳤는지 죽었는지 모를 우리 몸값을 지불하고 다시 사오는 거랑 다시 우리만큼의 용병을 새로 모집하는 거랑 뭐가 더 가격이 쌀 것 같아 ”

메지는 자못 놀란 표정으로 휘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만약 정말 몸값을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전쟁이 끝난 뒤의 일일 가능성이 높았다. 메지 생각에도 그때까지 그가 살아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 그럼 어떻게 해. ”

휘미는 메지의 물음에 나직하게 말했다.

“ 들쥐인거지. ”

“ 고양이는 어쩌고? ”

메지가 대답했다. 휘미는 잠시 생각하다가 디로단을 조심스럽게 깨웠다. 그는 기침을 크게 한번 한 뒤 메지가 내민 뿌리를 씹어 삼키며 말했다.

“ 이미 생각중이야. ”

“ 들쥐를요? ”

“ 들쥐? 그래... 윔어 사투리중에 그걸 들쥐라고 하는곳이 있던가? ”

“ 뭐 그런거죠. 그림자로 손짓(음어로 대화) 한거니까요. 아무튼 ‘그걸’ 생각하고 있었던거죠? ”

“ 응. ”

디로단은 품속에서 천조각 하나를 꺼냈다. 두 학생의 입이 벌어졌다. 디로단이 설명했다.

“ 여기 지도다. X 표시는 낮에 놈들이 서 있는 곳이지. 저녁때는 노역소 가장자리를 2명씩 4조를 이뤄 순찰하고 안쪽은 3인이 한조가 되어 건물을 따라 순찰을 하지. ”

“ 철통같군요. ”

디로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 전부 호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발견만 하게 되면 당장 불어버려. 발각 자체가 되면 무조건 실패한다. ”

메지는 가만히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말했다.

“ 뚫어야죠. 순찰 주기를 계산해야겠어요. ”

“ 저번 삼각형처럼? ”

휘미는 밝은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로단의 표정도 밝아졌다. 메지가 삼각형에서 생존규칙을 알아낸 것은 정말 꿈만같은 일이었다. 당장이라도 설명을 듣고싶었지만 하지만 휘미는 그것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것은 뒤로 미룰수 밖에 없었다. 메지는 진지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 발걸음수로 시간을 재야겠어요. 반드시 규칙이 있을거에요. ”

휘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 아 맞아. 녀석들은 서로의 순찰시간을 정확하게 알고있어. 만나서 잡담을 하는걸 봤어. ”

디로단도 고개를 끄덕였다.

“ 일리가 있는 말이다. 어느 곳이나 보초시간은 지루하니까. 만나는 시간에 빼돌린 술병을 전달할 수도 있는 거고 ”

디로단은 마치 자신이 사핀군이라도 된 듯 실감나게 설명했다. 두 학생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없던 캄캄한 암흑 속에서 빛이 새어져 나오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 바위에 고양이 주황 ”

“ 불났네. ”

기삭은 톱질을 하다말고 얼이빠진 얼굴로 두 학생을 쳐다보았다. 휘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메지에게 중얼거렸다.

“ 가장자리 순찰은 모래 10알이 거의 수인이야. ”
“ 역시 그렇군. ”

메지는 눈치를 보더니 품속에서 천조각을 꺼내 나무가시에 숯을 발라 숫자를 썼다. 궁금증을 견디다 못한 기삭이 물었다.

“ 지금 너희가 하고있는건 내가 가장 원했던 일이길 바래. ”

기삭은 오늘아침까지만 해도 얼이 빠져있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전쟁터에서 뼈가 굳은 그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데에는 패배의 아픔이나 육체적 고통보다는 더 큰 무언가가 있는듯 보였다. 기삭은 메지가 준 뿌리를 마구 씹고 나서야 기운을 차리고 이야기 했다.

“ 싯딜이 없잖아. 내 검도 없고. 난 이제 반쪽일 뿐이야. ”

마른 눈물을 계속해서 쏟는 그를 두 학생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는 기억이 돌아오는지 그는 메지의 손을 덥썩 잡고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 메지가 살려준건 맞는 얘기지만 너 대신 죽으려는 건 디로단이었어. ”

옆에있던 휘미가 대신 말해주었다. 기삭은 디로단에게도 똑같이 그런 뒤 다시 풀이 죽어 축 쳐졌다.

“ 기운내. 싯딜은 아마 윔으로 도망가서 잔질하고 같이 여기를 박살낼 계획을 하고 있을거야. ”

“ 맞아. ”

기삭이 금방 기운을 차리는것을 본 일행은 서로 귓속말을 하고는 의사를 교환했다.
메지는 기삭이 천조각을 보고 있자 휘미를 쳐다보았고 휘미는 디로단을 보았다. 디로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기삭을 놔두고 가기에는 그의 몰골이 너무 안쓰럽다고 생각한것 같았다. 메지는 입모양으로만 기삭에게 말했다.

‘우린 탈출할거야. ’

기삭이 놀라 뭐라 말하기 전에 휘미가 얼른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 휘미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조용히 말했다.

“기삭. 우리가 여길 뜨려면 알아봐야할게 좀 있어. 고양이들이 악수하는 모래를 물 해야되지.(보초들이 만나는 시간을 확인해야 되지) ”

기삭이 흥분하여 제대로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휘미가 좀 놀란 표정으로 메지에게 말했다.

“ 기삭은 누굴 좀 닮은 거 같지 않아? ”

“ 누구? 아. 그 녀석 말이지?…”

기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휘미에게 말했다.

“ 아니 무슨 말인지 대충 알겠는데? ”

휘미는 이번엔 정말 놀라서 그에게 말했다.

“ 이 친구 방금 우리가 손짓(대화)한 그림자(음어)에 대해서 얘기한거야? ”

“ 물같기도 불같기도...(그런것 같기도 하고 아닌것 같기도 하고) ”

그러자 기삭이 말했다.

“ 아까 누군가 서로 만나는 장소를 알아봐야 된다고 비유한거 같은데… 아니었어? ”

“ 맙소사, 비슷해. 고양이는 감독, 순시를 뜻하는 우리끼리 음어야. 모래는 시간을 뜻하고. 고양이들이 서로 만나는 시간을 알아야 돼. 아무리 빼곡히 순찰을 해도 분명 빈틈이 있다. 그 틈은 ‘고양이들의 모래’ 만 파악하게 되면 메지가 알아서 계산할거야. ”

기삭은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감독관 한명이 일행에게 다가와 지시봉을 이리저리 흔들었고 이들은 다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휘미는 탈출할 거라는 일념이 생기자 육체적으로는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기평회때 보다도 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고 눈동자는 예전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곁눈으로 순찰 주기를 계산하며 거기에 맞춰 대패질 횟수를 맞추었다.

디로단과 기삭은 민첩한 몸짓으로 감독관들의 눈을 피해 계속해서 자료를 모았다. 노역소 전체의 크기를 발걸음으로 재기도 하고 노역소 안을 이동하는 보초들의 경로를 파악하고 보초들이 서로 마주치는 위치를 확인하기도 했다. 자료가 정리되면 메지는 숫자를 전부 입력해서 빈틈을 찾아내었다.
밤이 되고 수면시간이 되어 감독관이 수용소 안에서 사라지자 이들은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핀뒤 달빛이 새어들어오는 한쪽 벽으로 모여들었다. 메지는 천조각에 있는 숫자들을 정리한것을 앞에 내놓았다.

“ 가장자리를 다니는 놈들은 두겹이고 각각 4조씩이에요. 저녁때 횃불을 들면 가시권은 넉넉잡아 15m 내외이고. 보통 안쪽2조와 바깥쪽 2조는 거의 이쪽방향에서 가시권을 가지게 되고 노역소내를 지그재그로 감독하는 보초들은 그와 별개로 80분에 한번씩 이쪽을 지나지나요. 가시권을 포함해서 보초주위에 원을 그리면 이렇게 큰 원들이 계속해서 수용소 뒤쪽을 지나가다보면 원이 없는 때가 우리가 들쥐를 잡는 상황인데 그럴 틈은 전혀 없다고 봐야 맞죠. ”

메지의 설명에 다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메지는 펜으로 쓰던 나뭇가지로 머리를 마구 긁더니 다시 설명해 나갔다.

“ 다만 노역소 내를 순찰하는 보초들이 이쪽에서 가장자리를 도는 모퉁이에서 보초들과 만날 경우때가 80분에 한번씩 있는데 이때는 가장자리를 도는 보초끼리는 잡담을 안하죠. 그러면서 틈이 벌어지는데 그 틈이 대략... ”

메지의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쫑긋했다. 메지는 암산을 하며 손가락을 천에 다가 움직이다가 말했다.

“ 12초에요. ”

“ 불가능해. ”

디로단이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휘미는 기운이 빠져 고개를 바닥에 파묻었다. 메지는 다시한번 계산을 해봤지만 여전히 같은 결과가 나올 뿐이었다.
그때 휘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박수를 쳤다. 너무 크게 친 탓에 주변에 자고있던 포로들이 꿈틀거렸다. 휘미는 자세를 낮추고 쉰소리로 소리쳤다.

“ 곧 묵월기잖아! ”

“ 어? 아 그렇지! ”

“ 그리고 이번 31일은 묵단월일거야. ”

휘미의 말에 기삭이 혀를 내둘렀다.

“ 어이 그걸 어떻게 알아? ”

“ 세는 규칙이 있지. ”

기삭은 안믿긴다는 표정이었다. 잠자코 있던 디로단이 입을 열었다.

“ 묵월기가 훨씬 어두워 지긴 하지만 가시권이 그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을 거야. 일단 적어도 여기서 울타리까지 뛰는데만 10초가 걸려. 물론 징박힌 신발로는 어림도 없지. 그리고 저 큰 울타리를 어떻게 넘느냐도 문제고, 어떻게 넘는다고 해도 10초는 더 걸릴거야. ”

“ 20초라… 묵월기가 된다해도 힘들 수치인데요. ”

메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휘미가 말했다.

“ 묵단월이라면 어떨까. 묵단월이 뜨는 동안에는 어둠이 안개처럼 풀어져서 가시권이 엄청나게 줄어들지. ”

기삭이 대답했다.

“ 내가 그때 돌아다녀봐서 아는데 불빛이 있어도 바로 앞의 사람만 피해 걸어갈 정도야. ”

“ 휘미 만약 원이 3m로 줄어들면 몇초정도 여유가 생겨? ”

메지는 슥슥 계산을 하더니 손가락 세개를 흔들었다.

“ 25초라고? 별로 늘어나진 않는군. 다시 계산해봐. ”

기삭이 조바심을 냈지만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마 맞을 거야. 디로단, 네명이 한꺼번에 15초안에 3m짜리 울타리를 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뭐가있죠? “

디로단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 울타리를 부시고 가는거지. ”

“ 매우 바람직해. ”

기삭이 박수를 치며 덧붙였다. 휘미는 고개를 저었다.

“ 내가 약을 먹은 상태면 부실수 있지 않을까? ”

메지가 품속에서 잉크통을 꺼냈다.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메지는 그와중에 잉크통을 아직까지도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다. 휘미도 동시에 자신의 신발속에 구겨 넣은 채 잊고 있던 풀을 손으로 한번 만져보았다. 디로단이 고개를 흔들고는 말했다.

“ 너무 위험해. 울타리를 쉽게 넘을 수 있게끔 조치를 취해놓아야겠어. 그리고 가져갈 것도 챙겨야지. ”
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다들 착각하고 있는점이 하나 있는데 이대로 아무 준비도 없이 들쥐를 한다면 죽는건 마찬가지에요. ”

메지가 물었다.

“ 근데 우리 들쥐는 어디로 가는데? ”

일행은 모두 디로단을 바라보았다. 디로단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피한 채 말했다.

“ 고원에서만 살던 나에게 자꾸 묻는군.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잖아. 산을 넘어야지. ”

“ 윔쪽으로요? ”

디로단은 고개를 저었다.

“ 놈들은 분명 그쪽부터 찾을 거야. 우리가 가도로 들쥐? 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테니까.”

“ 뭐, 그럼 북쪽으로? 그럼 눈보라 평원을 넘을 텐데요. ”

디로단은 아무말도 않았다. 그러자 기삭이 이상한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 차라리 그때 평원에서 죽을걸. ”

휘미는 예전 지리학 수업시간의 기억을 떠올렸다. 부를빙 교수의 환청이 들리는 듯 했다.

「 이곳...아래에는 언 들판인 동야(凍野,툰드라)가 퍼져있으며 산맥의 북쪽 끝자락 너머로는 드럼린(drumlin) 과 에스커(esker) 들이 쭉 펼쳐진 사막, 눈보라 사막이 산맥에 이어 곧바로 나타난다...눈보라 사막은 여행하기 별로 좋은 곳이 아니니까. 졸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이곳을 구경시켜줄 생각도 있다. 」

그때 휘미는 머릿속으로 눈보라 사막을 여행했었다. 막연한 동경에 산맥을 넘어 상상해본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휘미는 정말 눈보라 사막을 가는 것도 멋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지금은 정 반대였다. 그는 위머의 번잡한 길거리, 술집의 시원한 증류주가 그리웠다. 또 다이지의 따뜻한 기숙사와 친구들, 나스치, 체루디, 그리고 쥬디하...

“ 그러고 보니 쥬디하 우리랑 놀러가기로 했었는데. ”

휘미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꺼냈고 메지는 한 대 얻어맞은 듯이 초점 없는 눈으로 휘미를 바라보았다. 기삭도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휘미에게 말했다.

“ 뭐, 쥬디하, 그것도 무슨 비밀어냐? ”

휘미는 고개를 홱홱 저은 뒤 말했다.

“젠장! 그건 정말 몸살나게 사랑스럽고 이쁜 여자라는 음어지. ”

그러자 디로단이 말했다.

“ 아무튼 31일 전까지 할일이 다 정해지는군. ”

다음날부터 이들의 하루일과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우선 휘미와 메지는 쓸만한 풀들은 전부 꺾어 품속에 넣었다. 특히 날이 어두워져 청월이 모습을 내밀었을 때는 이들은 거의 혈안이 되어 풀들을 뽑으러 다녔다. 감독관들은 이들이 풀을 뽑는 것 자체에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두 학생이 해76의 커다랗고 꿈틀거리는 뿌리를 드러냈을 때는 깜짝 놀라 그걸 칼로 몇 동강을 내어 끊어버렸다.
디로단은 만일을 대비해 제련 중이던 작은 철제 이음새 하나를 슬쩍했다. 감독관의 눈을 피해 이음새를 엷게 펴서 길쭉하게 만드는데 성공했고 천막 조각과 버려진 털옷을 찢어 손잡이를 만들어 단검을 완성했다.
기삭이 맡은 역할은 불씨를 훔치는 일이었다. 산을 넘어 눈보라 평원을 넘는 것은 하루 만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숫돌은 사핀군 숙소에서 필요할 때만 사용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결국 기삭은 특별한 방법을 선택했다.

“ 으악! ”

점심 직후 어깨에 잔뜩 나무를 지고 가던 기삭은 갑자기 물거품을 물며 쓰러져 바닥에서 뒹굴기 시작했다. 다른 포로들도 가끔 탈수증으로 인해 비슷한 증상을 보인적이 있었기 때문에 감독관들은 몇 번 그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일으키다가 안 되자 맷돼지처럼 긴 막대기 두개 사이에 기삭을 묶은 뒤 사핀군 숙소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들이켠 기삭은 멋대로 지껄이며 몸을 조금 더 뒤틀더니 온몸을 부둥켜 잡고는 떨기 시작했다. 의무병으로 보이는 다소 어려보이는 사핀 군인 하나가 그 모습을 무덤덤하게 바라보고는 이상한 손 그물 같은 도구로 그의 머리를 고정시키고는 입에다 고약한 액체를 흘려 넣었다. 기삭은 발작은 멈춘 뒤 계속 으슬으슬 떨었고 의무병은 그 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쉰 뒤 조그마한 숫돌을 이용해 화로에다가 불을 지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그는 다시 발작을 일으키며 몸을 뒤집어 일어났고 이곳저곳에 부딪치고 의무병을 밀치는 등 난동을 쳤다. 어린 의무병은 놀랐는지 사핀어로 바깥에 고함을 질렀고 곧바로 병사 둘이 와서 기삭의 양팔을 붙잡고는 온몸을 밧줄로 묶었다. 그 뒤로는 기삭은 잠잠히 시키는대로 있었다. 그의 다로기 안에는 이미 훔친 숫돌 두개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