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E.] - #3



        시암과 애나는 연인이다. 노스로드 3번가 2층의 작은 원룸에서 함께 지낸지도 1년이 넘었다. 연인으로서, 동반자로서의 삶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시암은 음악평론가, 애나는 화가였다.

        시암의 평론 범위는 주로 클래식이었지만, 대중음악에도 어울리는 젊은 감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라디오에도 출현한다. 라디오에 등장할 때면, 유머러스하고 감각적인 표현으로 음악을 맛깔나게 표현했다. 물론 시각장애인 음악평론가란 점도 이슈화에 한몫 했다.

        애나는 화가다. 하지만 시암처럼 유명한 화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풍경화를 좋아하는 일부 고객이 있다. 평소에는 시암을 도우며 집에서 칼럼을 쓰거나 집안일을 한다. 주말이면 함께 교외로 여행을 떠났다. 시암은 보지 못 하지만, 애니가 기뻐하니까 기꺼이 동참한다. 대신 애니가 듣지 못 하는 새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느꼈다.

        시각장애 음악평론가 시암. 청각장애 화가 애니.

        둘은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며 사랑을 느꼈다. 동거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1년. 둘에게 시련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시암은 큰 절망을 느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축복’이라 느꼈던 전화 한 통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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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십니까? 고객님과 연락하게 되어 무한히 영광입니다. 시암 차크리씨 맞으십니까?]

        여성 기계음은 매력적인 발음이었다. 인공적인 목소리지만 꿀처럼 달았다.

        [반갑습니다. 저희는 ‘E.B.E’ 소비자 조사팀으로서, 시암 씨는 이번 추첨에서 선발되셨습니다. 시암 씨는 본인이 원하는 ‘가정’을 하나 선택하실 수 있으며, 저희 ‘E.B.E'는 본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술력을 동원하여 고객님의 ‘가정’을 현실로 바꿔드립니다. 고객님은 자신이 선택한 현실을 마음껏 누리시면 됩니다. 다만 소비자의 욕구를 측정하려는 본사의 의도에 따라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습니다. 만약 ‘가정’이 마음에 드시지 않다면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 언제든지 ‘원래의 현실’로 바꿔드릴 것입니다. 다만 연락은 저희가 드리며, ‘가정’을 선택하는 것은 처음 한 번의 기회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시암은 가능성을 믿는, 재치 있는 장난을 좋아하는 부류였다. 그는 검은 선글라스를 만지막 거리며 대답했다.

        [E.B.E. 라는 이름 흥미롭네요. 마치 성경에 나온 ‘이브(Eve)’와 비슷하네요. 선악과를 맛보게 한 유혹의 대명사. 인류가 지은 죄의 근원이자, 덕분에 우리가 삶의 고통과 환희를 맛보게 해 준 그녀 말이죠. 연관성이 있나요?]

        [죄와 유혹과는 연관이 없음을 고객님께 알려드립니다.]

        [그렇다면 E.B.E.가 정확히 무엇의 준말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시암은 미소를 지었다. 뭐의 준말일까? E는 최근 유행하는 혁신(Evolution)?

        [E.B.E.는 본사 방침에 따라 제한된 접촉만을 허락하기 때문에 준말로 된 이름만을 고객님께 제공함을 알려드립니다. 이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시암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바보 같은 칼럼 요청 때문에 불편했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런 장난이 즐거웠다. 베토벤의 청각 장애, 수은 중독을 요새 뜬 마약중독 작곡가와 비교하는 바보 같은 칼럼. 그런데 엉뚱하지만 즐거운 자극을 주는 장난 전화라니. 시암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정확히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여성 기계음은 여왕벌의 페로몬 같은 향을 수화기 너머로 풍기며 대답했다.

        [당신의 소원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시암은 오랫동안 꿈꿨던 것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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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은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았다. 강렬한 고통이 눈을 통해 들어왔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아침햇살이 눈을 할퀴었다. 하지만 시암은 고통보단 충격 때문에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빛을 느꼈다. 아니, 봤다.

        시암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주위에 여러 가지 것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물건들. 시암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물건을 만지고 나서야 눈을 떴다. 그래, 이건 내 선글라스구나. 시암은 그렇게 눈을 감고 주위를 만지고 다시 눈을 떴다. 세상을 다시 배웠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다.

        시야가 흐려진다.

        아, 눈물을 흘릴 때, 시야가 흐려진다는 것이 뭔지, 시암은 그제야 깨달았다. 환희와 놀라움. 시암은 마구 소리를 질렀다. 옆에 잠들었던 애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곤히 자고 있었다. 시암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눈을 감고 더듬거리던 얼굴을 이제 제대로 볼 수 있다. 시암은 그녀를 꼭 안았다.

        [일어났어요?]

        애나가 눈을 떴다. 청각장애인 특유의 어눌한 발음. 하지만 시암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그녀의 목소리였다. 시암은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애나는 눈을 부비고, 책상에 올려둔 점자자판기를 두드렸다.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시암과 애나는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눴다. 자판을 누르자 기계음으로 애나의 의사가 전달되었다.

        [그런데 시암 오늘 좀 달라 보여요.]

        시암도 점자자판기를 두드렸다. 평소 듣던 익숙한 기계음 소리가 들리고, 눈앞에는 까맣고 하얀 것이 반짝거리며 나타났다. 시암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글자임을 알았다.

        [맞아. 달라졌어. 나 달라졌어.]

        시암은 애나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한 문장을 마저 입력했다.

        [나 이제 눈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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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나와 시암이 함께 한 ‘서로를 바라 볼 수 있는 첫 주말’은 환상적이었다. 둘은 어느 때처럼 교외로 나갔다. 다른 점은 시암도 풍경을 즐겼다는 것이다. 애나는 붓을 놓고 시암에게 신나게 점자 자판기를 두드려 설명했다. 애나가 표현해줘야만 느낄 수 있던 풍경을, 이제는 시암이 직접 봤다. 애나는 기적에 감사하며 눈물을 흘렸고, 어눌한 목소리로 사랑해요. 감사해요. 말하면서 시암을 안았다.

        갓난아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보고 즐기면서 일주일을 지냈다. 시암은 환희 속에 이를 누렸다. 특히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제일 행복했다. 시암은 축복에 감사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정말 그랬다.

        그러나 시암은 깨달았다. 자신이 맛 본 것이 ‘선악과’였다는 것을. 다른 점이 있다면, 아담이 부끄러움에 눈 떠 괴로워했다면, 자신은 눈을 뜨며 괴로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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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은 최근 들어 귀가가 불편해졌다. 애나가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암이 볼 수 있단 사실에 누구보다 함께 기뻐했던 그녀가 변했다. 둘 사이에 작은 코끼리 한 마리가 끼어들어 불쾌한 소음을 내는 것 같았다. 시암이 애나에게 다가가려 하면, 작은 코끼리가 거리를 좁히게 두지 않았다.

        시암은 걱정하면서도 자신에게 찾아온 행복에 정신이 팔렸다. 애나에게 소홀했다. 그러는 동안 먼지처럼 작았던 코끼리가 이만큼이나 커진 것이다. 함께 살지만 남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그녀를 붙잡고 점자자판기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왜 변한 거야?]

        하지만 애나는 오히려 되물었다

        [당신이 변한거야. 모르겠어?]

        [내가 어디가 변했다는 거야? 눈이 보이게 되면서 당신과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런데도 뭐가?]

        애나는 전자자판기를 덮었다. 그리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 그리고 녹음된 테이프 하나를 남기고 떠났다.

        다음날 까지 애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암은 테이프를 재생했다. 이별하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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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이가 이렇게 끝날 거라곤 예상 못 했어요. 죽음만이 우리를 갈라놓을 거라 생각했어요. 죽음 이외에 우리를 갈라놓을 것은 없다 생각했으니까요.

        당신이 눈을 뜬 그 날, 전 정말 행복했어요. 당신에게도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이제 제 얼굴을 당신이 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어요. 당신은 눈을 뜨면서, 소중한 다른 눈은 감아버렸어요. 저를 바라보던 사랑의 눈 말이에요.

        저도 믿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이 변하다니. 하지만 당신은 눈을 뜨고 무심해졌어요. 제게 말이에요.

        시암. 당신은 제가 청각 장애가 있다는 것을 종종 잊었어요. 당신이 눈을 뜨면서 저 또한 귀가 열리게 된 것처럼 행동했죠. 애나, 방금 그 소리 들었어? 그렇게 묻는 당신에게 놀랐어요. 전자자판기를 두드리면서 서로를 기다리는 대화가 언제였는지 기억해요? 우리는 대화도 줄었죠.

        당신과 저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완벽한 한 쌍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이 부족한 점이 없어지자, 당신의 따뜻한 마음은 반대로 사라졌어요.

        미안해요. 하지만 당신에겐 더 이상 제가 필요 없는 것 같아요. 잘 있어요. 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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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은 울었다. 그제야 눈을 뜨고도 보지 못 했던 것이 보였다.

        왜 우리의 방에는 그토록 책이 많았지? 아, 내가 그녀의 목소리로 이야기 듣길 원해서. 그녀는 어눌한 발음일 거라며 부끄러워하면서도 꾸준히 책을 읽어줬다.
        모서리마다 스펀지가 달려있었다. 자주 부딪히는 자신을 위해 그녀가 남몰래 설치했으리라.
        우리가 쓰는 전자자판기는 점자식이다. 글자를 모르는 자신을 위해, 그녀가 점자를 대신 배워서 쓴 것이다.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시암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E.B.E. 소비자 조사팀입니다. 시암 씨의 인생은 충분히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시암은 쓰게 웃었다.

        [당신은 정말 이브였군요.]

        여성 기계음은 대답이 없었다.

        [선악과를 먹고 저는 수치심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시암 씨의 모든 것은 저희 ‘E.B.E.' 소비자 조사팀의 자산으로 기록화 되어 있으며, 이는 본사의 권한으로 처리 가능함을 다시 한 번 확인 드립니다. 이는 당초 계약 요건에 따른 것이며, 원하시면 계약 당시 영상을 사본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당초 계획대로라면, 제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있는 것이지요?]

        여성 기계음은 대답했다.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지, 지금 이대로 머물지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시암은 대답했다.

        [저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고, 이제 수치스럽습니다.]

        [알겠습니다. 고객님. E.B.E. 소비자 조사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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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암은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가 느꼈던 것, 후회한 것을 담아서.

        애나. 다시 돌아와요. 사랑해요.

        시암이 떨리는 목소리로 문장을 불러줄 때마다, 대필하는 사람의 손도 함께 떨렸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02 01:07: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