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의 아침]

김 노인은 귓가에 울리는 쿠웅쿠웅 소리에 눈을 떴다. 밤새도록 들린 콩콩 거리는 소리는 버틸 만 했지만, 새벽녘 귓속에 울리는 진동은 그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눈을 뜨니 새벽이었다. 찢어진 창호 문 너머로 꼬마 중 머리 같은 푸른 산이 드러났다. 해의 붉은 기라고는 없는 새벽. 사실 새벽의 시골은 고요하다. 포탄 소리는 김 노인의 착각일 뿐.

김 노인은 몸을 일으키려다 짧은 신음을 흘렸다. 양 무릎 사이를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찌르는 것 같았다. 자리끼 곁에 둔 진통제를 입에 털어놓고 김 노인은 숨을 몰아쉬었다. 진통제 기운이 돌면서 귓가의 포탄 소리도 잦아들었다. 대신 다른 목소리가 떠올랐다.

[집사람도 아버지 모시고 싶어 합니다. 손주들 더 크기 전에 재롱도 보시고 해야죠.]

[아니다…….]

[농사도 더 짓기 힘들고, 나이도 있으신데……. 몸도 성치 않구.]

아들이 권유할 때면 김 노인은 먼 곳을 응시했다. 그 눈빛은 어느 곳을 바라본다기보다 어느 시점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부자가 말없이 반 갑 넘게 담배를 태우고 나서야 아들은 담배를 비벼 끄고 일어났다. 김 노인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더 재촉하지 못 했으리라.

김 노인은 자리끼를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진통제 덕분에 조금 몽롱한 기운이었다. 아직 시간은 남았지만 언제나처럼 툇마루에 앉아 기다렸다. 그 사이에 수탉이 시끄럽게 울어댔고 암탉은 알을 품었다. 하지만 김 노인은 달걀을 먹지 않았기에 밤사이에 얼어 금이 간 달걀이 가득했다. 김 노인은 시선을 돌려 흙길의 끝을 응시했다. 입가에 허연 김이 나왔지만 김 노인은 그 자리에 꼼짝 않았다.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잠든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하지만 눈은 무언가를 좇는 양, 흙길의 끝을 응시했다. 아들의 설득도 김 노인의 이 행동을 멈추진 못 했다. 그에겐 남은 삶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으므로.

새벽의 고요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잘그락 거리는 소리와 열을 맞춰 올리는 발검은 소리. 군화를 신은 무리의 행진 소리였다. 아침이면 근처 육군 훈련소에서 훈련병이 줄지어 김 노인의 집 앞을 지나갔다. 김 노인은 투박하게 다듬어진 두 개의 나무 지팡이로 대문가를 나섰다. 그리고 행군을 지켜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행군을 나선 어린 군인들의 표정은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바닥에 끌리는 군화 소리와 허연 입김 때문에 거대한 구름 같아 보였다. 김 노인은, 그러나, 행군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 했다. 젊은 청년의 얼굴에서 십수년 전의 그 얼굴을 떠올리려 애쓸 뿐.

김 노인은 갑자기 얼굴에 닿은 시린 바람 때문에 눈을 감았다. 굳게 닫힌 눈꺼풀 너머로 당시의 일이 생생하게 보였다. 어린 아이에게는 일어나기 버거운 이른 새벽이었다. 잠에서 덜 깨 칭얼거리자 형님은 삶은 달걀을 손에 쥐어주었다. 우리 상현이 착하지? 어머니를 따라 가라. 곯은 뱃속에 삶은 달걀을 밀어 넣느라 형님 얼굴을 보지조차 못 하고 헤어졌다.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전쟁의 기억은 참으로 단순했다. 포탄 소리. 산 너머의 흙먼지. 걷고 또 걸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 아버지의 굳게 다문 입술. 지겹도록 보고 들었다. 하지만 종군한 형님의 얼굴만은 다시 볼 수 없었다.

김 노인은 머리가 찰수록 당시를 기억하는 것에 애를 먹었다. 거북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모멸감이 들었다. 그 해의 기억은 언제나 또렷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형님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기에.

청년 장병의 행렬이 멀어지고, 마지막 한 명까지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김 노인은 그 흔적을 마지막까지 좇다 눈을 감았다. 바싹 마른 눈물을 삼켰지만 메마른 목에 턱 막혔다. 김 노인은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갔다.

언제까지고 되풀이 될 그 해의 아침을 위해, 김 노인은 또 하루를 걷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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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7.논산 훈련소. 주간 행군을 마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