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 http://blog.naver.com/irregulars/140210337725
킬리언 머피를 참 좋아한다.
처음 그를 봤던게 28일후였는데, 늘상 박살나는 뉴욕이나 LA같은데가 아니라 영국, 그것도 런던이라기 보다 야트막한 언덕과 초지가 가득한 영국의 교외가 주된 배경이었던게 굉장히 신선했다. 달리는 좀비라는 소재는 오, 그럴수도 있겠다 라는 느낌에 불과했고, 그 풍광이 이질적이지만 잘 와닿았다(그런 영국의 교외는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영화에서나 나올법 한데 말이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그의 모습은 히어로도, 서바이버도 아니라 그냥 비쩍 마른 청년 A에 불과했다. 분명 그렇게까지 잘생긴 얼굴도 아니고 신경질적으로 마른 체구의 그였지만 뭐랄까,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엔 킬리언 머피를 보고 '멋있다'라고 생각해서 찾아보게 만들었으니까.
그래서 킬리언 머피 주연의 영화는 지나치다가도 한번 선택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대니 보일 감독과 합을 맞춘 선샤인에서는 막막한 우주공간에서 어떻게든 미션 완료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학자 그 자체였고, 또 그렇게 메소드에만 매몰되지 않고 배트맨 비긴즈와 같은 작품에선 스케어크로우라는, 어찌보면 진부한 빌런에 대해 나름의 신선한 해석으로 접근했다고 생각한다. 뭐 조커같은 포스를 내는 빌런이 매 작품마다 있으면 배트맨 리부트 시리즈도 너무 무겁고 숨막히지 않았을까. 너저분한 넝마같은 원작 빌런과는 대조적으로, 댄디함을 살린 느낌의 연기에 꽤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인셉션과 같은 작품에선 배역 특성상 인상깊은 느낌은 받지 못했지만, 디카프리오라고 하는 리딩 롤에 특화된, 그래서 어찌보면 쟝고-분노의 추적자에서의 제이미 폭스와도 같이 묻히는 감 없이 그 나름의 존재감을 잘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작에도 나름 기대하는 바는 있었다. 게다가 로버트 드 니로와 시고니 위버라니, 이건 머피 입장에선 기라성같은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것이다. 물론 드 니로는 최근엔 영 예전만 못하지만, 히트에서 발 킬머를 이끌어 줬듯이 킬리언을 도와줄 수 있을것 같았다. 시고니 위버도 아바타에서의 샘 워싱턴을 이끌어 줬던 경력이 있었고, 얼마나 이 두 선배들과 합을 잘 맞춰 나갈지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개봉후 얼마 지나지 않아 봤던 영화는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아니, 배우들의 연기는 내 생각엔 그렇게 트집잡을 곳이 없었다. 드 니로의 중후함도, 시고니의 고뇌하는 연구자의 모습도, 킬리언의 화장실 격투 씬도 다 맘에 들었다. 다만 마지막의 반전이라고 넣은 반전이 너무 지나쳐서, 이제껏 영화를 본 시간을 깡그리 부정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배우만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건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절감했다. 굳이 영화를 위한 변명을 해보자면, 관객인 내가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것-개연성이 결여된-에는 늘 박하게 굴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만.
만약에 생각을 바꿔서 반전을 아예 없애버리고, 킬리언이 자신의 믿음을 당당하게 증명해 보이고 끝나는 식으로 마무리됐다면, 차라리 괜찮은 인간승리 영화로써 남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많이 아쉽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7 17:1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