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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

「명월 : 가장 밝은달. 역동성과 활동을 상징. 16～20일. 명월에는 낮에도 해의 절반가량 수준의 빛을 내뿜으며 밤은 대낮같이 매우 밝다. 날씨도 뜨거워져 기온이 상당히 올라간다. 모든 축제나 각종 행사는 명월이 떴을 때 한다.」

 이틀동안 양 진형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동이트면 모두 나와 진형을 갖추고 마주선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부터는 불가능해졌다. 명월이 찾아오면서 밤도 낮과 똑같이 밝아진 것이다. 전투를 하기에 아무런 시간제약이 없어진 것이었다. 게다가 날씨도 따뜻해져서 방한용 외피를 입은 상태에선 날씨가 약간 쌀쌀한 정도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명월의 첫 새벽은 자욱한 안개와 함께 시작되었다. 윔군도 날씨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척후병을 촘촘히 세워 횃불을 밝혔다. 안개가 가시자 사핀 진형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 엇!? ”

두 학생은 동시에 디로단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가 이정도로 놀랜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디로단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외쳤다.

“ 진형이 바뀌었다. ”

“ 무슨말이에요? ”

“ 어제 그게 아냐. 중대장, 아니 군단장은 알고 있나? ”

해와 함께 명월이 하늘에 뜨면서 평원의 안개는 급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휘미는 눈을 찡그려 적진을 바라보았지만 이틀 동안 하루 종일 보아 왔던 진형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 아하. 뭔가 입체감이 달라졌는데... 앞에 있던 가로소 놈들이 조금 중앙으로 뭉쳤다고 해야되나. ”

메지의 말에 그제서야 휘미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제까지는 앞열에 가로소 인들이 일자로 늘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살짝 가운데로 뭉쳐 있어서 가장자리로는 뒤편의 사핀인 병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에게 곧바로 든 질문점은 이것이었다.

“ 그런데 이게 뭐가 놀랍다는 거지? ”

휘미가 고민하고 있던 도중에 말을 탄 기수가 한손으로 뿔나팔을 불면서 한손에는 깃발을 든 채 진형 앞을 쭉 가로질러 갔다. 그럼과 동시에 중대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드디어 시작이구나! ”

주변이 시끄러워지면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백인대장들은 저마다 대원들의 사기를 돋구기 위해 우렁찬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곧 주변의 모든 소음이 커다란 전쟁 북소리에 묻혔다.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은 사핀군이었다. 재빨리 윔군도 전진하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이동할 때마다 눈바닥이 뿌연 물보라를 일으키며 땅을 가득 매웠다. 다들 마치 구름을 타고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양군은 점점 속력을 높이기 시작하더니 하늘을 울릴 듯한 발소리를 내며 금방 서로의 앞까지 다다랐다.
윔군의 선두인 용병으로된 경보병들은 전술대로 중앙을 꼭지점으로 만든 U모양의 진형으로 달려가다가 양옆으로 방향을 나누어 중앙을 비우고 대각선 방향으로 적들과 부딪쳤다. 경보병들이 맞닥뜨린 것은 가로소 인들이었다. 그들은 기세 좋게 달려왔고 이윽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쩐일인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가로소 인들은 중앙을 통해 일사불란하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언제 뚫어놨는지 가로소인들 뒤의 중앙 진형은 텅 비어있었다. 경보병들은 가로소 인들이 또 달아나기 시작한줄 알았고 열심히 쫒기 시작했다. 며칠간의 세차례 전투와 똑같은 광경이었다. 양옆으로 갈라져아 하는 경보병 행렬이 추격 본능으로 인해 중앙으로 쏠리면서 그들은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뒷쪽의 사핀 중보병들과 마주쳤다. 로소줌의 예정대로라면 경보병 부대는 이미 가로소인들의 가장자리를 뚫고 기병대와 함께 적진을 포위하기 시작했어야 하는 시각이었지만 중보병에게 진로가 막혀버리면서 경보병의 전열은 순식간에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아군 경보병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탓에 중앙으로의 돌격을 준비 중이던 잿빛칼날 중보병들은 앞에서 경보병들이 사핀의 중보병들에게 밀리고 있는것을 보고있을수 밖에 없었다.
갑옷과 장비의 차이가 심한 탓에 경보병들은 처음에는 분전했지만 전열까지 갈라지기 시작하자 사핀 중보병들에게 처참히 짓밟히기 시작했다. 잿빛칼날 병사들이 진형을 고쳐 잡고 사핀 중보병들에게 달려가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양옆에서 함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피해를 거의 입지 않고 뒤로 달아났던 가로소 인들이 양옆에서 잿빛칼날의 병사들을 둘러싸고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스니게치 평원의 눈바닥은 피를 머금고 붉게 반짝였다.
평원을 가득 매웠던 뿌연 물보라는 무대의 장막처럼 태양빛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에 는 윔군의 시체가 끝도없이 펼쳐졌다.
1만2천명이나 되는 윔군이 평원위에 무덤을 세웠다. 적진을 뚫고 달아난 자들은 2천명 뿐이 되지 않았다. 포로도 천명이나 되었다. 달아난 자들중 대부분은 끝까지 돌파를 해낸 중보병들이었으며 경보병들은 거의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기병은 전멸했다.

참혹한 패배였다.

휘미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통, 기쁨등의 감정은커녕 머릿속에는 아무런 느낌도 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지금 걸어가고 있었는데 주변은 지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만다행인 것은 이지경이 될 때까지도 메지와 디로단이 그의 바로 앞에 있다는 점이었다. 그 둘도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외에는 모두 모르는 자들이었다. 주변이 온통 사핀군인 걸로 봐서는 전쟁에서는 졌다고 생각했다.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일렬로 줄을 길게 서게 되었고 잠시뒤 사핀군 하나가 오더니 털옷을 벗기고 그의 몸을 거칠게 뒤져 풀을 벨 때 쓰던 작은 나이프를 수거해 갔다. 일렬로 줄을 다 설 때쯤이야 휘미는 정신이 돌아왔다.

아!! 가장 최악의, 있어서는 안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오른쪽 산기슭에서 사핀군들이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시체들의 전리품을 뒤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정면에서는 포로로 보이는 아군행렬이 손을 머리에 얹은 채 고개를 숙이고는 하나씩 성안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핀어 고함소리가 점점 가까이에서 들리더니 뒤쪽에서 누군가가 휘미의 발목을 걷어찼다. 그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따라 손을 머리에 올렸다.
성으로 이동하던 행렬은 어느순간 멈춰섰고 잠시 뒤 인원을 나누기 시작했다. 휘미의 앞에는 약 500명정도가 있었고 뒤에도 그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사핀군은 포로들을 성 앞에 종대로 쭉 늘어서게 만들었다. 다친 자들은 따로 모았다. 영문을 모르는 포로들은 저항할 힘도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줄이 정리되자 성루 위로 한 장수가 올라가 말하기 시작했다.
“ 인원이 너무 많으니, 전통에 따라 선택받은 자만 데려갈 것이다. ”

휘미와 메지는 그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학생은 다이지에서 배웠기 때문에 사핀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았었다. 휘미는 기운을 내어 앞의 메지에게 물었다.

“ 뽑아서 대려간다는 말이야? ”

메지는 지친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휘미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말했다.

“ 휘미? ”

“ 휘미? 메지? ”

메지의 바로 앞에 있던 디로단도 놀라 고개를 돌렸다. 다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휘미는 자기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억지로 표정을 펴고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디로단 마저도 얼이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메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휘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휘미가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단상 위에 서 있던 장수가 커다랗고 두꺼운 황금빛 삼각형을 양팔로 들고 있는것을 보았다. 사핀군은 삼각형을 보더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잠깐, 저게 뭐지? ”

메지는 눈을 찡그려 있는 힘을 다해 삼각형을 바라보았지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앞에 있던 디로단이 말했다.

“ 숫자야.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 우릴 죽이는 규칙이 쓰여져 있는거겠지. ”

“ 규칙이라고요? 대체 어떤? ”

“ 모르겠어. 그냥 무작위로 골라 죽이는걸지도. ”

디로단은 담담하게 말했다. 죽는다고? 휘미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마치 햇빛을 직접 쳐다봤을 때처럼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화살처럼 머릿속을 뚫고 지나갔다.

사핀군 병사들은 제일 앞에 대장이 선 채로 가장자리마다 한명씩 배치되었고 그 안에 포로들을 집단을 만들어 세워놓았다. 뒤쪽 줄로 갈 수록 더 많은 무리의 포로들을 세워놓았는데 다 세워놓고 보자 아래와 같은 삼각형의 꼴이 되었다.

                                        1
                                     1     1
                                  1     2     1
                               1     3     3     1
                            1     4     6     4     1
                         1     5     10    10    5     1
                      1     6     15    20    15    6     1
                   1     7     21    35    35    21    7     1
                1     8     28    56    70    56    28    8     1
             1     9     36    84   (126)  126   84    36    9     1

휘미 일행은 10번째 줄인 맨 뒷줄중 가운데, 즉 126명이 한 무리가 되는 집단에 세워졌다.
도대체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삼각형은 앞줄의 인접한 두 집단의 인원수의 합이 그 두 집단의 뒤에 있는 집단의 인원수와 같은 꼴이었다. 예를 들어 6번째줄 두 번째와 세 번째 집단 수(5와 10)의 합은 7번째줄 3번째 숫자(15)와 같았다. 
줄이 다 세워지자 병사들은 무리를 돌아다니면서 포로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윔군 포로들은 동료들이 바로 옆에서 죽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겐 분노보다도 살고 싶다는 욕망이 먼저 찾아왔다. 규칙을 아는 듯한 자들은 자리 순서를 바꾸려고 애썼고 줄 전체가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맨 가장자리에 한명씩 배치되었던 사핀군들이 길다란 창으로 포로들을 못 움직이게 막았다.
휘미도 절망적인 얼굴로 동료들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첫 사망자가 나온 세 번째 줄은 두명중 첫 번째 사람만이 죽었으며, 네 번째 줄의 두 집단도 둘 다 두번째 사람만이 살았다.
집단의 제일 첫 번째 사람은 무조건 죽고 두 번째 사람은 무조건 산다는 것이 알려지자 포로들 사이에서 엄청난 소란이 생겨났다. 사핀군은 벌써 7번째 줄의 포로들을 죽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메지가 탄성을 질렀다. “ 맙소사! ”

“왜?”

휘미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도 않은 채 126명으로 된 자신의 집단에서 순서를 세기 시작하였다. 그의 손은 미친듯이 떨리고 있었고 숨소리는 전력질주를 한 사람처럼 거칠었다.

“ 92,93,94,95,96… ”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휘미와 디로단은 비로소 그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알 수 있었다.

“ 106,107,108…109! ”

메지는 108에서 숫자를 멈췄고 자신을 가리키며 109라고 소리쳤다. 그의 셈이 끝나기가 무섭게 휘미가 말했다.

“ 어디로 가야돼!? ”

메지는 셈을 하기 시작했다. 사핀군은 바로 앞줄의 포로들을 죽이고 있었다. 뒤쪽으로 갈 수록 죽는 포로의 수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 113번째! ”

“ 또! ”

휘미는 디로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메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디로단을 바라보고는 다시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 119번째! ”

디로단이 쏜살같이 움직이려고 하자 메지가 머리를 움켜쥐며 다시 외쳤다.

“ 아니다! 아니야. 빌어먹을! 117번째!!…도 안되고 기다려봐. 107번째로 가면 된다! ”

디로단은 재빨리 메지의 두칸 앞으로 가서 줄을 섰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 안녕... 누구였지. 디... ”

디로단의 앞 106번째 자리엔 주저앉아 있는 기삭이 보였다. 기삭은 피식 웃으며 디로단에게 손을 내밀었고 디로단은 메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 106번째는? ”

메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핀군은 맨 뒷줄에 오자 훨씬 많은 병사들을 동원해서 포로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1분도 안되서 이쪽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디로단은 이를 꽉 깨물고는 멍하니 있는 기삭의 손을 뿌리치고 그의 앞으로 순서를 이동하여 자신이 106번이 되었다. “ 디로단! ” 뒤쪽에서 휘미와 메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디로단은 눈을 꼭 감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때 메지가 그의 어깨를 붙잡고는 말했다.

“ 두명 더 앞으로 가도돼요! 103번째로! ”

100번째 포로가 눈을 크게 뜬 채로 복부에 칼을 맞았을 때 디로단은 겨우 103번째 열에 도착했다. 101번째 포로는 두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자기 차례가 지나간 것을 알자 실신해서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102번째 포로는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디로단은 눈을 감고 운명을 기다렸지만 병사들은 디로단은 한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지나쳤다. 기삭에게 왔을때도, 메지에게 왔을때도, 휘미에게 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메지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000명의 포로중 절반도 안되는 인원만이 사핀의 삼각형 안에서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손목에 족쇄가 채워진 채 스니게치 성 지하의 얼음감옥 안에 갇혔다. 휘미는 스니게치 성 안을 지나가면서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윔군의 사령관인 로소줌이 사핀 장군의 발아래 무릎 꿇고 있었다. 사핀 장군의 키는 보잘것없이 작았으며 작은 머리는 듬성듬성 빠져 있어 볼품없는 용모를 더하고 있었다. 화려한 갑옷과 보검을 차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떻게든 그를 장군이라고 판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사핀군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서 있었다. 장군은 보검을 세워들어 로소줌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휘미는 그 뒤로 함성소리가 난 걸로 봐서 로소줌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막 끝-

제 3막 - 편자가 없어 말을 잃었네

“ 사핀어를 할줄 아는가? ”

“ … ”

“ 알아듣긴 할테지. 하나만 묻겠다. 잔질장군은 언제 떠났나? ”

“ … ”

흐로게는 그의 보검을 꺼내 로소줌의 목에 가져다 대었다. 로소줌은 눈을 뒤집어 흐로게를 바라보았다.

“ 저...저...아니... 나는. ”

그때까지 굳은 표정으로 최대한 위엄있는 태도를 유지하던 로소줌은 이젠 온몸을 떨며 애원하는 얼굴로 흐로게를 바라보았고 그의 표정에 변화가 없자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흐로게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로소줌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표정이 점점 더 일그러지더니 보검으로 그의 한쪽 어깨를 찔렀다. 로소줌의 비명소리가 성안에 울려 퍼졌고 병사들로부터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로게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 내가 싸움에서 이겼음에도 미칠듯이 화가 나는 이유를 알려주겠다. 나는 잔질장군이 끝까지 꾀를 쓰는 줄 알고 전투 직전까지도 속으로 조마조마 하고 있었지. 그런데 알고보니 잔질은 온데간데없고 이런 돼지만도 못한 버러지 새끼가 군단을 움직였다니! 장군이 끝까지 날 화나게 만드는 데는 성공한 셈이군. 화가나서 미쳐버릴 지경이니까! ”

흐로게는 로소줌의 등짝을 칼등으로 후려쳤고 로소줌은 땅바닥에 엎어진 채 울며불며 목숨을 구걸했다. 흐로게는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이 칼날에 묻은 피를 허공에 뿌리고는 보검을 집어넣고 주변 장수들에게 이야기했다.

“ 감옥에다가 가둬라. 죽일 가치가 없는 놈이니, 포로의 값어치라도 받아야지. ”

스니게치 성은 들쭉날쭉한 암반 위에 살을 붙여 세워진 천연요새였다. 암반이 물고기의 뼈라면  성벽과 건물들은 물고기의 살과 핏줄에 해당되었다. 각종 주요시설은 전부 암반 밑의 땅굴에 있었고 암반이 전부 길위로 이어진 탓에 모든 길은 탑처럼 성 외곽을 나선형으로 돌며 뚫어져 있었다. 아무리 예상을 하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기막힌 천연요새가 단 한번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는 것은 터무늬 없을 정도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스니게치 회전에서 패한 이후로 윔군 포로들은 이틀간 성의 천연 지하 얼음감옥 안에 갇혀 있었다.
그곳은 빛도, 소리도 없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끔찍한 정적과 회의만이 감옥 주위를 맴돌았다.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굳어있는 포로들의 동공 위로 지난날의 기억들이 혼란스럽게 부딪치며 죽음의 경종을 치고 있었다. 모든게 끝이었다. 그들에겐 이제 죽음밖에 남지 않은것 같았다.
아니 이미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포로들 사이엔 더 이상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메지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육중한 소리와 함께 감옥문이 열렸다.

간수들이 감옥 아래로 내려와 포로들을 거칠게 바깥으로 몰아내었다. 포로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며 밖으로 떠밀려 나갔다. 새 찬 눈보라 소리가 죽어가는 청각을 반겼다.

메지는 밖으로 나가자 주변이 온통 하얗게 바뀌는것을 느꼈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동공이 벌어졌다. 눈에 새하얀 잔상이 남았다. 빛. 얼마만에 보는 빛인가? 태양과 명월에서 내리쬐는 반사광은 계속해서 그의 눈에 잔상을 만들었다.

밖으로 나온 포로들이 족족 현기증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눈속으로 쓰러졌다. 메지는 계속해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지만 잔상은 점점 강해지며 눈앞에서 가시질 않았다. 그는 머릿속을 찌르는 통증에 바닥의 눈을 움켜쥐며 잠시 호흡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내 어디선가 그의 옷깃을 강하게 위로 잡아챘다. 어쩔 수 없이 저절로 고개가 들려지자 이번엔 눈보라가 칼날처럼 그의 얼굴을 할퀴었다. 억지로 정신이 깨이기 시작했다... 기억들과 함께.
모든 포로들이 밖으로 나왔다. 하나...둘...셋... 거의 떠밀다시피 해서 줄을 맞추었다. 곧 억센 손아귀들이 손목을 잡았다.
메지는 헛숨을 들어 삼켰다. 족쇄였다. 차고 숨막히는 손길이 그의 손목을 잠식해 갔다. 손목이 죄여 욱신거리면서 맥박의 불규칙한 두근거림이 족쇄를 따라 온몸에 울렸다. 그는 죽음을 얼핏 느꼈다.

메지는 눈길을 끌려가면서 최대한 차분히 앞으로 발을 뻗어나갔다.
눈 조각들이 빽빽하게 발 위로 부서지는 것이 보였다. 그는 흔들리는 눈에 초점을 바로 세우고 그것을 노려보았다.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위해 집중하며 한걸음, 한걸음, 무릎까지 오는 눈을 해치고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꽤 걸었다고 느꼈을 때쯤 몸을 움직이기가 수월해 졌다. 무릎까지 차던 눈이 없어졌진 것이다. 어디로 데려가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졌다고 생각했다.

잠시뒤 지면이 깎여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메지는 다리가 풀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내리막길에 이어진 구덩이였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이 꽤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구덩이 가운데에는 모닥불이 있었고 포로들은 집단을 이루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었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따뜻한 물과 음식이 주어졌다. 그는 고목처럼 말라 굳어있던 식도를 타고 몸 안으로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음식도 억지로 다 씹어 삼키자 그는 기운이 나는걸 느꼈다. 얼음감옥에 있으면서 줄곧 가지고 있던 풀들을 씹었기에 망정이지 그러지 않았더라면 다른 포로들처럼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휘미도 죽기 직전의 얼굴을 하고는 메지 옆으로 몸을 파고들어와 앉았다. 그리고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 우리 살은거지? ”

메지는 대답할 여력이 없어 그에게 힘겹게 고개만 끄덕였다. 몸이 점점 녹으면서 서서히 주변상황이 자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살아남은 포로들은 대략 300명 정도가 되어 보였다. 구덩이는 스니게치 성 안의 방공호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방공호 위로는 사핀군들이 짐수레를 끌며 줄을 맞춰 서고 있었다. 아마도 이동을 할 모양이었다. 잠시 뒤 포로들의 족쇄가 풀어졌고 가로소인들의 옷이 주어졌다. 시체에서 벗겨낸 것들 중에 비교적 양호한 것을 수거해 놓은 것이었다.
사핀군은 포로들에게 충분한 휴식시간을 준 뒤 이들을 두 갈래로 나누었다. 하나는 맨 앞에서 행로에 얼음을 때내는 역할이었고 나머지는 짐수레를 미는 역할이었다. 디로단이 두 학생을 찾아와 뒤쪽으로 끌고 갔다. 그는 약간 피로한 듯 보였지만 거의 평소 때와 다름없었다. 얼음감옥에 이틀 동안 갇혀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족쇄는 다시 손에 잠겼고 이동이 시작되었다.
사핀군은 다행히도 가도를 이용했다. 명월과 태양이 남쪽에 있는 걸로 봐서는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분명했다. 평원에서 뻗은 길을 조금 지나자 사핀의 가도가 펼쳐졌고 그 뒤로 짐수레를 끄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우려와는 달리 사핀군은 포로들에게 매질을 하거나 모질게 굴지는 않았다. 휘미의 착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부는 그들에게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자들도 있었다. 휘미는 가죽으로 단단히 묶어놓은 짐수레 안에서 쇳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전리품들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타 얼은 물이나 전투식량, 건초와 자제 등은 가죽을 씌우지 않은 채 밧줄로만 수레에 고정시켜 이동시켰다. 전리품들이 있다면 분명 가도를 타고 사핀 영토 안으로 가져갈 것이 분명했다. 그는 기껏 채운 기력이 다시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사핀으로 이동하게 되면 도망가기도 힘들 테고 놓아줄 가능성도 없었다. 노예로 팔려가거나 평생 군사공장 같은 곳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쓰러져 죽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는 절망감에 눈앞이 컴컴해지고 현기증이 나서 순간적으로 대열에서 흐트러졌다. 사핀군 하나가 얼른 그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그의 입에 물을 한 모금 먹였다. 휘미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다시 대열을 따라 수레를 밀었다.
가도로 이동하던 짐수레들은 오후가 되자 어느 순간 눈밭으로 방향을 돌려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기에도 길이 있었지만 눌어붙은 얼음들 때문에 이동속도가 늦어졌고 수레를 끌기도 어려워졌다. 산등성이를 어느 정도 오르자 다시 내리막길이 시작되었고 멀리 산속으로 울타리로 둘러싸인 건물들과 야영지가 나타났다. 휘미의 염려처럼 사핀 깊숙이 들어가진 않았지만 만약 저곳이 최종 종착지라면 탈출은 역시 불가능해 보였다. 길이 난 남쪽 외에는 모든 면을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남쪽으로 난 길로 나가봤자 뻥 뚫린 가도이기 때문에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만약 산을 넘는다고 해도 북쪽으로는 그 악명 높은 눈보라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3미터가 넘는 울타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미 안에서 일하고 있던 포로들이 지친얼굴로 입구쪽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전쟁용품들을 만들고 기계를 고치며 식량을 나르는 등 각종 노역을 하고 있었다. 스니게치성에 있다가 함락된 뒤 끌려온 자들이 분명했다.
노역소 전체의 광경은 이렇다. 남동쪽으로 난 입구는 무장을 한 사핀군 다섯이 지키고 있으며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사핀군 숙소가 있다. 중앙에는 식당과 창고가 있고 바로 옆에는 눈을 깨끗이 치운 민틋한 공동 작업장이 있다. 숙소 북쪽에는 포로 수용소가 있으며 서쪽에는 굴뚝위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재련장과 목공소가 있었다. 노역소 곳곳마다 감시자가 배치되어 있었고 그 외에 울타리를 따라 노역소 가장자리를 두겹으로 순찰하는 보초도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사핀군은 짐수레를 창고 앞에 세운 뒤 종류별로 나누어 집어넣기 시작했다. 짐을 나르는 동안 새 포로들은 작업장에 줄을 맞춰 섰다. 잠시 뒤 총 책임자로 보이는 자가 단상 위로 올라가 말했다.

“ 일을 잘 하는 자는 말고기를 주고 게으른 자는 보리를 먹인다. 탈출하는 자는 동료들 손에 맞아 죽는다. 몸값이 지불되면 너희는 풀려난다. 너희는 선택받은 자들이다. ”

멀리서 한 무리의 포로 노동자들이 수레를 끌고와 각각의 다로기에다가 징을 박아 넣기 시작했다. 가로소 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예상대로 그들은 모두 스니게치 성에 있던 군인들이었다. 하나같이 핏기 없는 얼굴들로 기계적으로 징을 박아 넣는 모습은 마치 유령을 보는것 같았다. 휘미는 그들의 다로기에도 길다란 징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징은 ㄷ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눈길을 걸으면 징 안에 눈이 차 매우 무거워지게 되어 있었다. 일어서서 한발자국 내딛자 무거운 쇠가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기분 나쁜 소리를 내었다. 징을 박은 뒤 새로운 포로들은 질긴빵을 배급 받고는 바로 노역에 투입되었다.

노역소에서의 새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