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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휘미에게 메지는 지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와월의 신비스러운 기운이 금방의 격렬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풀어버리고 안정을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 나 진짜 죽는줄 알았어. ”

휘미는 어색하게 웃는 메지의 얼굴을 보다가 그의 다로기와 칼을 보았다.

“ 맙소사. ”

그의 칼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휘미는 그의 칼집을 빼들었다.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 휩쓸려서 혼전속에서 헤매다가 적을 맞딱드렸는데. 내 앞의놈이 예상대로 움직여줘서 다른 대원과 같이 죽일수 있었어. ”

휘미는 놀란 얼굴로 어쩔줄 몰라 하다가 모자를 벗어 머리를 긁고는 그를 향해 말했다.

“ 와월은 화를 억제해주지만… ”

메지가 땀을 닦으며 휘미의 말을 이어 받았다.

“ 공포에 둔감하게 해주기도 하지. ”

휘미는 메지를 보며 다시 크게 한숨을 쉬고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우리 디로단에게 가자 ”

“ 와월기가 지나가면 또 추워진답니다. ”

전투가 끝난지 한시간도 지나지 않은 혼란스러운 와중에 회의가 긴급하게 시작되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로소줌은 당연한 사실임에도 일부러 새롭게 알아낸 것처럼 잔질에게 말했다. 다시 추워지기 전까지 결판을 내야되지 않겠냐는 의도적인 말이었다. 와월의 부드러운 기운으로 다들 금방 심리적으로 평온해진 모습이었지만 로소줌 만은 아직까지도 칼을 칼집에 넣지 않은 채 시뻘건 얼굴로 지팡이처럼 왼손에 지탱해 들고 잔질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잔질은 아무 대답이 없다가 기침을 몇 번 한 뒤 상황판 옆에 서있는 장교에게 물었다.

“ 정리 되었나? ”

“ 예. 부상 90명 사망 13명입니다. 숙영지 남쪽 울타리가 무너졌고 망루 4개중 3개가 무너졌으며 서쪽막사 일부가 불에 탔습니다. 적들이 눈을 파내면서 길을 만들어 온데다가 망루에 있던 보초병들이 한꺼번에 당한 탓에 대응이 늦어 4중대가 있던 북쪽, 2중대의 서쪽, 지원1중대가 있던 남쪽이 부채꼴 모양으로 포위를 당했습니다. 또 적은 별동부대를 만들어 창고와 본부를 노렸지만 다행히 선두소대와 지원중대들이 막아냈습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어제보다는 훨씬 계획적이고 효율적인 침투였습니다. 하지만 병사들 모두가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으며 또 적들 대부분이 가로소인들이었던 탓에 큰 피해는 없었고 적들도 일사불란하게 도망가버리던 탓에 협곡 안까지 도망가지 못한 300명 남짓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이상입니다. ”

로소줌이 말했다.

“ 군단장님. 이렇게 여기 눌러앉아있으면 사핀은 계속 가소로 놈들만 보내서 괴롭힐게 뻔합니다. 이제 슬슬 평원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잔질은 로소줌을 보며 말했다.

“ 내일 생각해 볼걸세. ”

로소줌은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에서 새어나오는 새벽 서광을 바라보고는 잔질에게 말했다.

“ 오늘 이동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

“ 내일 생각해 보는게 좋겠네. ”

 로소줌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 그럼 오늘은 진영을 확실히 짜고선 맞이하죠. ”

잔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똑같이 기다리게. ”

그제서야 로소줌도 포기한 듯 축 늘어진 표정으로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회의장을 완전히 빠져나온 뒤 그는 뒤따르는 장교들에게 흘리듯 말했다.

“ 어떤거 같나. ”

장교들이 말했다.

“ 이젠 정말 확실합니다. 사핀놈들은 우리가 두려워서 가로소 놈들만 보내어 시간을 벌고 있는것 아니겠습니까. 적들의 속셈인게 분명한데 군단장은 거기에 꼬박꼬박 당해주고만 있으니 원. ”

“ 밤에 당하고서도 군단 방침에 변경이 없을 거라는 사실이 전해지면 병사들 사기도 떨어질 것입니다. ”

로소줌도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아무튼 병사들 소집을 안할 수 없으니 연설장으로 모이게 하게. 방침에 대한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비밀에 붙이게. ”

“ 뭐야? 또? ”

기삭은 로소줌의 연설을 듣다가 들고있던 장갑을 내팽겨쳐 버렸다. 싯딜이 그런 그를 꾸짖었다.

“ 이자식아. 사령관님이 연설중이잖아. ”

“ 그래도 그렇지. 여기 그대로 있는다는 것부터 마음에 안 드는데 하던 말도 어제랑 똑같잖아. ”

“ 보초는 늘린다잖아. ”

“ 쳇 그거나 그거나. ”

기삭 뿐이 아니었다. 특히 용병으로 된 지원군단의 병사들 중에는 불만을 털어놓는 자가 많이 있었다.

숙영지를 수리하고 방어선을 보강하는 등 따분하게 하루를 보낸 이들은 수도에서 식량보급이 되었다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사기를 회복했다. 오후에는 따뜻한 양고기와 위스키 한 모금이 지급되었다.
휘미는 위스키 한 모금을 목구멍에 털어 넣자 온몸이 그대로 녹아내리듯 뜨거워져왔다. 일과를 마친 뒤 고단했던 터라 기분도 나른해져왔다. 메지는 양고기를 열심히 씹으며 휘미에게 눈짓을 했다. 항상 그가 기대어있는 기둥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었다.

“ 디로단. ”

단검의 칼날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던 그는 시선은 맞추지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돌려보였다.

메지는 휘미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는 그의 옆에 가서 앉았다.

“ 저번 전투 이후로 소대원들이 다들 당신에게 관심이 많아졌더군요. ”

디로단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 용병은 몇 년째인가요? ”

디로단은 여전히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단검에 시선을 향한 채 말했다.

“ 아직 1달도 안됐지. 너희랑 같이 왔으니. ”

“ 의외네요. 그전엔 뭐했는데요? ”

“ 글쌔. 이곳저곳 여행을 하기도 하고. 직업을 가진적도 있지. ”

“ 칼을 전문적으로 배운게 아니라구요? ”

“ 칼을 다루는 자에겐 항상 스승은 있지. ”

디로단은 간결하지만 친절하게 대답했고 메지는 욱신거리는 팔을 주무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휘미가 말했다.

“ 사실 크게 느꼈어요. 저희도 디로단처럼 칼을 잘 써야만 해요. 아직 죽어서는 안되거든요. ”

디로단은 싱긋 웃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말했다.

“ 가르쳐달란 이야기로 들리는군. 하지만 숙영지 안에서는 칼을 휘두르는 것조차 안될텐데. ”

“ 그럼 피하는 법이라도 알려줘요. ”

휘미가 매달리다시피 말하자 디로단은 팔짱을 끼고는 고민에 빠졌다.

“ 흠. 글쌔다.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거든. 우선은 너희 근력이 너무 약해. 그리고 만약 강하다고 해도 내 경우는... ”

디로단은 무언가 더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았다. 휘미와 메지는 휑한 표정으로 디로단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 차라리 나랑 같이 다니는게 어때? ”

“ 용병 안에서 또 용병을 고용한다? ”

휘미가 웃으며 이야기 했다. 메지는 말뜻을 이해를 못했는지 잠시 눈을 껌뻑이며 있다가 말했다.

“ 디로단. 우리가 여기서는 보상 해줄만한 것이 없어요. ”

“ 아, 있다면. 풀 찾는거 정도? ”

휘미는 메지의 말 뒤에 그렇게 덧붙이고는 디로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디로단은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좋지. 그거라면 나도 궁금했어. ”

두 학생은 서로를 기쁘게 바라보았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그는 예의를 아는 자였고 두 학생에게도 호의적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함께 있는다면 두려울 것이 없었다. 휘미와 메지는 당장에 디로단을 끌고 소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설령 디로단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봐서 인지 두 학생은 재빨리 디로단에게 풀에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연금술의 보안 따위는 뒷전으로 밀어두었다.

“ 이 주변에는 해23. 그러니까 눈꽃송이 풀이 자라 있죠. 매우 기초적인 약초로 쓰이는 풀이에요. 사과향 같은 담향이 나는 반면 잎의 맛은 떫고 쓰지만 피로를 회복시켜 주고 몸을 따듯하게 만들어줍니다. 가끔가다 해40, 해뿌리 풀도 보이는데 이건 계곡이나 분지에 많아요. 쑤운협곡에 꽤 많이 있을겁니다. 뿌리를 으깨서 고약을 만들면 좋지만 지금당장은 뿌리를 씹어서 상처에 올려놓거나 그냥 먹는 걸로도 효과를 볼겁니다. 그외에는, 너무 척박해서 잘 보이지 않아요. 아마 청월이 뜨면 더 피어날지 모르지만. ”

“ 청월이 되면 확실히 못보던 풀이나 동물들이 자주 보이더군. ”

디로단은 흥미롭다는듯 턱을 어루만지며 설명을 들었다. 그는 확실한 청자여서 중간 중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동조를 하면서 끝까지 집중했다. 신난 메지가 미치광이 풀과 같은 여러 진기한 풀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휘미가 그에게 눈치를 주었다. 메지는 그제야 설명을 끊고 말했다.

“ 어, 다른건 다음번에 알려드릴께요. 혼합법이나 제조법같은 건 힘들겠지만 유용한 풀들이 어떤게 있는지는 알아두면 정말 좋을거에요. ”

설명이 끝나고서 휘미는 디로단과 떨어진 곳으로 메지를 끌고가 말했다.

“ 메지 너 저 사람을 너무 믿는거 아냐? ”

메지는 그제서야 조금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휘미가 말했다.

“ 인상이 좋아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을 몇마디 주고받지도 않은사람이라고. ”

“ 음. 하긴. 그러고 보면 먼저 접근한 것도 디로단쪽이었네. ”

휘미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멀리서 혼자 숫돌을 가는 디로단을 슬쩍 바라보고는 말했다.

“ 물론 딱 보면 좋은 사람이지만, 그래도 조심하자 이거지. ”

“ 무슨 말인지 알아. 게다가 우린 도망가는 신세잖아. ”

메지의 말에 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순간적으로 우울해졌고 두 학생은 서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 밤이다! ”

대장이 소리치자 다들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밤이었다. 날씨 까지 도와준 덕에 적이 쳐들어올 가능성이 더욱 높아지자 모두가 긴장이 되면서도 설레는 표정이었다.

“ 한놈을 잡아 머리통만 남기고 통째로 몸뚱아리를 발라내어 깃대에 걸어놔야겠군. 생선뼈다귀처럼. 그럼 내일은 안오겠지 아마. ”

으롬의 끔찍한 말에 소대원들은 킬킬대었다.
오늘은 막사 안에서 노출하지 않은 채 무장을 하고 대기하는것이 허락되었다. 로소줌이 사정사정 한 끝에 잔질에게 얻어낸 지시였다. 휘미와 메지는 맨 뒷줄에서 디로단의 양옆에 앉아 칼을 꽉 쥐고 있었다. 디로단은 묵묵히 앞을 바라보면서 오른손에 주먹을 쥔 채로 손등을 자기 입에 가져댄 다음 다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관찰력 있는 휘미가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 내가 살던곳에서 하던 기도야. ”

“ 신앙인가요? ”

“ 그렇지. 루나인을 상징해. ”

“ 고양이? ”

메지가 순진한 얼굴로 말하자 디로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는 메지의 어깨를 손등으로 살짝 누른 뒤 말했다.

“ 그렇게 말하는걸 보니 신앙심이 없나보군. ”

메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 제가 살던 산동네에서는 산의 신 닥시온을 섬겼어요. 물론 늙은 사람들이나 어른들은 제사도 지내면서 굉장히 절실하게 섬겼는데 제 세대에 와서는 그런게 없어졌죠. 신전도 잘 가지 않고요. ”

휘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 도시에는 아예 그런게 없지요. 하지만 디로단. 좀 신기한건 말입니다. 지혜를 뜻하는 달의 신인 루나인을 섬기는 지역도 있었던가요? ”

디로단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메지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응 그거 신기하네. 휘미?  보통 자신이 사는 자연환경이나 직업에 따라 섬기는 신을 결정하잖아. 다이지에 공공연하게 지혜를 뜻하는 루나인의 동상이 있는건 그래서 말이 되지. 하지만 달에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디로단이 살던 곳에서는 루나인을 믿을까. ”

“ 도시사람들은 가나씨 코퍼레이션을 섬기잖아. ”

휘미가 비꼬듯이 말했다. 디로단은 더 이상 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할 생각이 없는지 미소만 지은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이 찾아왔다. 병사들은 서로 소곤거리는 것도 지쳤는지 넋을 놓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대하는 보초가 들어올 때 바깥상황에 대해 묻는 것 외에는 적막이 흘렀다. 시간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때쯤 주변이 갑자기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막사 문이 재껴지더니 보초병이 얼굴을 내밀고 소리쳤다.

“ 적이 보인다! ”

무기가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모든 소대원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이젠 놀라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아직 뿔피리가 안 울린 탓에 대장은 고개만 밖으로 내밀어 동정을 살펴보았고 무언가를 보고선 크게 놀라 고개를 빼었다.

“ 대장, 뭡니까? ”

대장은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

“ 바글바글 하다. ”

대장의 말에 소대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깊고 낮은 뿔나팔 소리가 숙영지에 가득 울렸다. 소대원들은 모두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스리며 밖으로 나갔다.

멀리 협곡의 입구를 기준으로 길쭉한 모양으로 펼쳐진 엄청난 수의 병력이 모여 있었다. 윔 군단 전체 인원과 비교했을 때도 거의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사핀군 전체가 전부 나온것이 분명했다. 불빛이 협곡 전체를 모두 매워버린 탓에 협곡은 마치 대낮처럼 환해져 있었다. 백인대장이 동요를 잠재우기 위해 깨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다들 조용! 싸우러 온 진영이 아니다! ”

확실히 사핀군은 전투적인 목적의 진형을 갖추고 있지 않았으며 이쪽으로 돌격하기에는 지형 또한 훨씬 낮은곳에 있었고 바람도 맞바람을 맞고 있었다. 협곡을 뒤에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계략을 감추고 있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회전이 벌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중대기 아래로 모인 윔의 군단은 날이 깨끗하여 사핀군의 모습을 모두 식별할 수 있었다. 잠시 뒤 사핀군의 맨 앞으로 다섯명의 장교와 함께 커다랗고 새카만 사핀말 ‘담가라’를 탄 화려한 갑옷을 입은 장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에 맞춰 윔 군단의 맨 앞으로도 갈색말을 탄 잿빛칼날의 군단장 잔질이 거칠게 앞으로 뛰쳐나왔다.

“ 흐로게!! ”

 잔질은 그 장수와 구면인듯 귓청이 찢어질듯한 크기의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휘미와 메지는 예상밖의 큰 목소리에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다. 잔질의 목소리는 군단을 넘어 협곡 너머 스니게치성까지 들릴 것 같았다.
흐로게도 잔질을 알아본듯 했다. 놀랍게도 그는 고개를 숙여 잔질에게 경의를 표했다. 동시에 그의 뒤에서 한손엔 백기를 들고 한손엔 전갈을 든 기수가 쏜살같이 윔의 진영을 향해 달려왔다. 윔 장교가 사핀 기수에게서 전갈을 낚아채어 잔질에게 가져다주자 잔질은 몇 초정도 훑어보더니 전혀 망설임 없이 뒤에 있던 횃불을 들고 그것을 친히 불태우기 시작했다. 달빛이 투명하게 비치는 눈 언덕 한가운데 횃불을 들고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위대한 영웅의 동상을 보는 것 같았다. 잔질이 전갈을 불태우기 시작하자 잿빛칼날의 군단에서부터 병사들의 규칙적인 납함소리가 퍼져나왔고 모든 군단이 합세하여 박자를 맞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 협곡의 적들을 모조리 주검으로 만들어버릴 기세였다. 흐로게는 마치 그래주길 바랬다는 듯 잔질이 전갈을 태우는걸 보자마자 군단을 둘로 쪼개 중앙의 군사들을 선두로 협곡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윔 군단의 납함소리는 흥분 섞인 환호성과 고함소리로 바뀌었고 군단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적을 향해 달려 나갈 기세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윔군도 마찬가지로 후퇴를 결정한 듯 보였다. 잿빛칼날의 군단기 역시 자기 숙영지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를 따라 중대기들도 전부 방향을 틀었다. 분명 지금 분위기로는 군단을 궤멸시켜버리고 모든 전투를 손쉽게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지 않을 모양이었다.
잿빛칼날 군단부터 방향을 틀어 몇 십 미터 퇴군하던 때쯤이었다. 지원중대들 또한 뒤를 따라가기 위해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지원군 선두 부대원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방향을 바꾸면서 협곡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지원중대 기수들도 재빨리 중대기의 방향을 바꾸었고 지원 군단 병사들은 그대로 떠밀리듯 협곡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앞뒤를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지원 군단은 협곡을 향해 가속도가 잔뜩 붙은 채로 달려 나갔고 점점 후퇴하던 사핀 군과의 거리가 좁혀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협곡 안으로 전부 들어간 줄 알았던 사핀군 일부가 순간적으로 협곡의 낮은 지대에서 웅크리고 잇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워낙 순식간이라 윔군은 멈추지 못한 채 적들을 지나쳐 버렸다. 사핀군은 후퇴시 안전을 위해 일부병력을 둔덕 아래로 몸을 낮춘 채 대기시키고 있던 것인데 언덕에서 보기에는 마치 이들이 협곡 안으로 전부 들어간 줄 착각한 것이었다. 선두중대들이 자리에 멈췄을 때는 이미 사핀군이 그들을 둘러싼 뒤였다.
휘미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은 전투들이 모두 혼전 혹은 난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상태는 전투라고도 할 수 없는 뒤엉킨 충돌에 가까웠다. 그 와중에서도 휘미와 메지는 디로단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조건 그의 등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확실히 사핀군은 지금까지 싸운 가로소인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무장부터가 훨씬 견고했으며 덩치가 좋고 피부색이 지나치게 희었다. 사핀군이 사방에서 달려들자 윔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중대기 하나가 꺾였고 너나 할 것 없이 둔덕을 기어올라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사핀군의 역추격은 더욱 거세어졌다.
디로단은 상황을 보아가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하며 적을 맞이했다. 난전중임에도 그는 확실히 돋보였다. 그는 왼손에 단검을 빼어들고 있었으며 오른손에 든 칼로는 번개같은 몸짓으로 적을 피하며 타격을 가했다. 평소처럼 정확하고 절도있는 칼부림을 하지 않고 힘을 모아 한번에 크게 휘둘러 적을 물러나게 하면서 자잘하게 접근하는 적들은 단검으로 상대하였다. 적을 죽이는 것 보다 퇴로를 만드는 데에 더 신경을 쓰고 있는 탓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주변에는 이미 네댓 명의 사핀군이 쓰러져 있었다. 지경이 여기까지 이르자 휘미와 메지도 동시에 적을 맞닥뜨리게 되었고 디로단은 그것까지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이내 두 학생은 적들에게 둘러싸였고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다는 생각조차 못하고 혼란중에 목숨을 잃을것이 분명하였다. 적 네명이 한꺼번에 두 학생을 노리고 길다란 창을 내뻗었고 메지는 있는 힘껏 그것을 내리치려다가 칼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안돼!” 메지의 고함에 반응한것은 디로단의 칼이었다. 사핀군들의 뒤편으로 돌아들어온 그는 한꺼번에 두명의 허리에 자상을 내었고 나머지 두 사핀군과는 2합을 싸우지 않은 채 투구를 쪼개어 버렸다. 마치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다 안다는 듯 두 명을 한꺼번에 상대함에도 움직임은 매우 여유롭고 탄력적이었다. 디로단이 적을 맡는 사이 휘미와 메지는 둔덕을 올라 도망가기 시작했다. 휘미는 있는 힘을 다해 눈을 감고 달려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디로단이 혼자서 20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한무리의 사핀군 안에서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어떡하지!” 휘미는 메지를 불러 세웠지만 그들이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디로단은 아직까진 밀리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라도 다가올 수백명이 넘는 적을 혼자서 다 쓰러트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메지가 잠시 망설이더니 품속에서 잉크병을 꺼냈다. 그는 장갑을 벗어 대충 뚜껑을 푼 다음 휘미가 말릴 새도 없이 입에 병속의 액체를 다섯방울정도 떨어뜨렸다. 휘미는 순간적으로 메지의 몸에서 연기가 난다고 생각했다. 메지는 마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칼도 없는 상태로 디로단이 있는 쪽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마주친 적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머리와 어깨로 적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적은 3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가떨어졌고 메지는 그의 칼을 빼앗아 미친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 맙소사. ”

제일 놀란 것은 휘미였다. 휘미는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도망가면서도 메지 주변으로 적들이 물방울처럼 튕겨나는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메지는 정말 어마어마한 속도로 칼을 휘둘러 대었고 휘두르던 칼이 깨지자 다른 칼을 집어 들어 또다시 엄청난 힘으로 휘둘렀다. 디로단도 메지를 보고는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움직여 길을 만들어 내는데 도움을 주었고 이윽고 퇴로를 확보하자 메지의 어깨를 붙잡고 언덕의 진영으로 퇴각했다.

참패였다. 사핀군이 후방병만 놔뒀었고 로소줌의 선두중대 일부만 둔덕을 넘어갔기에 망정이지 군단 전체가 그대로 없어져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특히 선두쪽에 있던 1중대,2중대 병사들 반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잿빛칼날 군단이 언덕 절반까지 나와 후퇴한 병사들을 맞이하였고 다친 병사들은 재빨리 의무막사로 옮겨지게 되었다.

메지는 뻣뻣하게 선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며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휘미는 의무막사 안에서 디로단 옆에 죽은듯 쓰러진 채 온몸의 통증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디로단 마저도 어깨와 팔 등 군데군데 옷이 찢어져 있었고 방한용 털옷은 아예 걸레가 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도 없었으며 적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 모르게 잔뜩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휘미는 듣지않는 팔을 억지로 들어 디로단의 너덜너덜한 옷을 살펴보았다.

“ 어라. 디로단 괜찮아요? ”

“ 걱정마. ”

그는 지친음색이었지만 밝게 이야기했다. 휘미는 그의 몸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놀라서 그에게 말했다.

“ 옷에 비해 멀쩡한데? ”

디로단은 땀을 닦고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털옷이 완전히 뜯겨져 나갈 정도로 칼을 맞았음에도 디로단의 피부에는 아무런 상처하나 없었다. 휘미는 뭐든 더 이상 생각하는 게 힘들어 다시 고개를 눈바닥에 뉘였다가 그때까지 씩씩대던 메지가 힘없이 쓰러지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일어났다.

“ 야 괜찮아? ”

휘미가 바닥에 엎어진 메지의 몸을 뒤집자 그는 멍하니 눈을 뜬 채로 숨을 계속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뭔가를 휘미에게 말하려고 했다.

“ ...약. ”

“ 뭐라고 ”

“ 그 약... ”

메지는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는 피로해보였지만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휘미는 마음이 놓였지만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한 채 그의 옆에 쓰러져 막사 위로 뚫린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너무도 깨끗했고 와월은 따스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로소줌은 몇시간 째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막사에 쳐박혀 있었다. 그의 양 옆으로 장교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 흐로게... ”

로소줌은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 흐로게가 왔을줄은,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

장교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옆의 장교 또한 말을 이었다.

“ 맞습니다. 당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

그러자 로소줌은 고개를 갑자기 들더니 촛대를 손으로 쳐내버렸다. 촛대는 텅 빈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고 막사는 어두워 졌다. 장교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로소줌이 소리쳤다.

“ 무리가 아니라니! ”

로소줌은 죽일듯이 장교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로소줌은 와월의 기운 정도로는 감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모양이었다. 장교하나가 조심스럽게 일어나 촛대에 다시 불을 붙였다. 로소줌은 한동안 말없이 그러고 있다가 다시 말했다.

“ 잔질은 이제 앞으로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할거다. 다 내탓이야. 군단이 그렇게 움직인것은. ”

장교들은 다시 무슨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면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로소줌은 잠시 뒤 고개를 들고 이야기했다.

“ 가자. 내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젠 군단장님의 말대로만 행동해야겠다. 항상 겸손하고 부족한 것을 남에게 배워야 하는게 진정한 무소냐쇼즈의 자세 아니던가. ”

“ 옳으신 말씀입니다. ”

장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나 잔질의 막사에 다다랐을 때 그는 힘이 쭉 빠져버렸다. 어젯밤 전투가 있은 직후로 잔질이 심하게 고통을 호소하며 병자리에 아예 몸져 누워버렸다는 것이었다. 잿빛칼날의 장교 하나가 로소줌을 보더니 말했다.

“ 간신히 의식은 유지하고 계시지만 지휘를 하실 수준은 아니십니다. 하루빨리 사령청에 알려서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

 로소줌은 잔질에 충성하기로 마음을 고쳐잡은 상태였음에도 이런일을 당하자 기분이 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잔질이 사라지는 것은 그가 그토록 원하던 것이 아니었던가. 로소줌은 잔질이 누워있는 침상 앞에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꾸벅 인사를 하고는 회의실로 나왔다.
모든 장교들을 소집한 그는 잔질이 앉던 군단장의 자리에 앉아 말했다.

“ ...사령청으로 전갈을 보냈습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겠지만 군단장님에 대한 소문이 새어나가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그리고... 사령청에서 따로 전갈이 있을 때 까지는 관례대로 제가 임시로 군단장 역할을 하겠습니다. ”

로소줌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잿빛칼날의 장교들의 눈빛을 그는 똑바로 상대하기가 버거웠다. 누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그에게 반항하진 않을까  심장이 터질듯이 긴장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없었고 오히려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새 군단장에게 우렁찬 경례를 붙였다. 로소줌도 그제야 자신감을 회복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 어젯밤 전투로 일부 병사들을 잃었지만 사핀군에 대해 더욱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스니게치 평원의 지형조사도 어제를 끝으로 마무리 되었기에, 내일 새벽 곧바로  평원 중앙으로 진군한 뒤 회전을 유도할까 합니다. ”

로소줌은 그렇게 말하고는 왠지 마음이 석연치 않아 다시 말을 덧붙였다.

“ 군단장님도 적의 정보를 파악하고 나서는 이동을 명령하실 것이라고 하셨으니... 예정대로 내일 이동을 하겠습니다. ”

장교들 모두가 하나같은 목소리로 경례를 붙였다. 로소줌의 가슴은 벅차올라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