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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 하나하나씩 얘기해 보자. 내가 먼저 말할까? 아님 네가. ”

“ 내가 먼저 할게. ”

메지는 손가락을 짚어가며 이야기했다.

“ 자 먼저, 우린 식물도감 에서도 못 본 엄청난 풀을 훔쳐왔어. ”

그러자 휘미가 말을 가로막았다.

“ 훔치다니. 우린 그냥 뽑아온 것일 뿐이지. ”

메지는 휘미를 진정시킨 뒤 다시 말했다.

“ 알았어. 여하튼 이렇게 특이한 형태의 풀이 도감 안에 있었으면 우리도 이미 알고 남았겠지. 일단 풀에 대해 생각해보자. ”

메지가 말하는 도중 휘미는 이미 풀을 꺼냈다. 아니 꺼냈다고 생각했다. 휘미는 풀을 보는 순간 이미 놀래 있었고 메지는 휘미의 표정을 보고 그의 손을 본 뒤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 투명해? ”

휘미는 허탈한 웃음을 한번, 탄성을 한번 번갈아 지으면서 풀을 메지의 눈앞에다가 흔들었다. 그러나 메지는 휘미의 손과 그의 얼굴만이 앞에 보일 뿐이었다. 휘미는 풀을 메지의 앞에 바짝 가져가 흔들었다. 잎사귀가 너무 풍성해서인지 풀은 마치 작은 숲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메지는 보이지도 않는 풀이 얼굴을 간지르자 반사적으로 얼굴을 뒤로 빼었다.
누가 본다면 매우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풀은 아무리 가까이 들여다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휘미는 풀을 얼굴에 대고 숨을 크게 들이셔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다시 내쉬었다.

“ 아무 냄새도 안나. ”

메지도 휘미와 똑같이 냄새를 들이마셔 보고는 말했다.

“ 무슨 음식 냄새 나지 않아? ”

그러자 휘미가 말했다.

“ 그건 네가 점심때에 흘린 소스 냄새잖아. 메지 아까 이 식물 모양 기억해? ”

메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 응. 세밀하게는 힘들겠지만 그림으로 그릴 수 있을 거야.”

“ 다행이네. 난 너무 흥분한 터라 기억이 안나. ”

휘미는 풀을 주머니에 집어넣었고 두 학생은 다이지의 언덕 공터에 있는 어두운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 좋아. 이 풀은 확실히 처음보는거다. 정말 최고야. 어디다가 쓰일지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귀중한 풀 일거야. 그다음 두 번째로, 도대체 난논은 왜 남쪽에 있던 거지? ”

“ 우릴 보고 따라 왔겠지. ”

메지는 별거 없다는 듯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휘미는 고개를 저었다.

“ 아냐. 우리보다 더 남쪽에 있었어. 우릴 쫒아왔으면 우리보단 위에 있었어야지. ”

메지가 휘미에 이어 말했다.

“ 좋아. 아무튼 그리고 셋째, 나스치가 안왔어. 그리고 그 사실을 어빕이 전달했지... 그걸 ”

“ 잠깐, 휘미. 난논이 남쪽에 있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아. ”

휘미는 머리를 감싸 쥐더니 벤치에 주저앉았다. 메지는 그 후로 한숨을 몇 번 더 쉬더니 팔짱을 끼고 하늘을 보았다. 청단월이 지나간 하늘엔 별 한점 보이지 않았다. 다만 흐려진 하늘위로 밤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탓에 어둡고 밝은부분 어떤게 구름이고 하늘인지 분간하기 힘들었다. 메지가 벤치에서 고개를 숙인채로 조용히 말했다.

“ 난논이 때마침 뽑으려 한 풀을 우리가 뽑은거라면 심각한데. 그런 곳에 있던 풀을 우리가 미리 알고 뽑은다음 이제와서 준다는건 뭔가 더 수상하잖아. 나스치가 우리에 대해 어떻게 얘기했는지도 모르고. 에이 복잡하군. 근데 어떻게 발견한거야 도대체 그 풀은? “

그러자 휘미가 대답했다.

“ 글쌔. 우연같은 필연이었지. 거기에 꼭 있어야 하는 풀이었고 난 그것을 우연으로 발견해야만 하는 상황인것 같았어. 그건 그렇고 난 이 풀을 누구한테 주고싶지도 않아. ”

메지가 대답했다.

“ 그럼 할 수 있는건 정해졌네. 도서관에서 풀에 대해 찾아보고 지금은 나스치를 만나러 가는거지. ”

“ 그리고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 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이 풀에 대해서 언급하면 안돼. 체루디나 나스치 에게도. ”

“ 아나들이 5만릉에 이 풀을 구한다고 해도? ”

“ 안돼.”

“ 쥬디하가 이 풀을 주면 결혼해준다고 해도? ”

“ …안돼! ”

휘미는 매우 단호하게 이야기 했고 메지는 그제서야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휘미는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는 기숙사로 가는 계단으로 먼저 등을 돌렸다.

“ 뭐? ”

휘미는 인상을 구긴채 어빕을 바라보다가 다시 메지를 바라보았다. 메지도 지친 표정이었다.

“ 그러니까, 3시간 전에 너보고 나가달라고 하더니, 네가 잠시 옆방에 있다가 온 사이에 또 사라졌다고?

“ 그렇다니깐요. ”

“ 잠깐, 나스치가 없어진게 3일 전인데 그럼 그사이에 한번도 잠자러 안들어왔어? ”

“ 아까 감기 걸렸다고 하면서 나타난게 처음본거에요. 원래 잘 안들어오잖아요. 그런데 없어지다니요? ”

어빕은 황당해 하는 두 학생들 사이에서 다리를 흔들며 태연하게 말했다. 휘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으며 나스치의 침대에 드러누웠다. 메지는 팔짱을 끼고 어빕에게 말했다.

“ 좋아. 묵월기었으니 3일정도 밤을 새는건 크게 문제가 안돼. 그럼 생긴건 멀쩡해? ”

어빕은 지친다는 듯 고개를 여러번 끄덕이다가 무언가 생각난듯 말했다.

“ 아. 더 멍청해진것 같았어요. 멀쩡하다라... 항상 어딘가 아파보이긴 하죠. 정신적으로든, 뭐든. ”

어빕이 말을 마치자 메지는 휘미와 똑같은 자세로 나스치의 침대에 드러누워 그의 이불을 배게 삼아 머리에 배었다. 휘미는 이를 갈며 말했다.

“ 이제 더 이상은 못참아. 나스치놈이 올 때까지 무조건 여기 있어야겠어. ”

어빕은 무슨 일이 생긴건지 궁금했지만 상황을 물어봐봤자 그들이 대답을 할 만한 기분이 아닌 것 같아 그냥 관두기로 했다. 휘미는 못마땅한 얼굴로 침대 위의 나무판자를 마구 쥐어뜯기 시작했다.
메지는 그 옆에서 엎드린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무언가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휘미도 마찬가지겠지만 메지에게도 오늘은 다이지에 입학해서 가장 많은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푹신한 침대에 눕자 그는 온몸에 몰려오는 피로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나스치를 만나면 일단 머리통을 박살낸 다음에 궁금한걸 물어보자. ”

메지는 휘미가 실제로 그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미월

『눈썹모양의 그믐달, 혹은 초승달의 형태. 1～5일. 순수함과 여성을 상징. 여성의 힘이나 능력이 놀라울 정도로 좋아진다. 아이를 갖거나 출산하지 못한다. 출항이나 사업 등 큰일의 시작을 미월에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여긴다. 미월에 결혼을 한다거나 술을 먹어도 좋지 못하다. 매우 경건한 기간이기 때문에 각종 제사나 의식은 모두 미월에 벌어진다.』

나스치는 거칠게 철제 문고리를 끼운 뒤 문을 닫았다. 조용히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발걸음 소리는 예상대로 연구실 문 앞에서 멈췄다. 그는 허겁지겁 회의실의 책장 사이로 몸을 숨겼다가 다시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연구실 여닫이문의 안쪽 구석으로 가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전신이 지진이 난듯 떨렸다. 그는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않기위해 이를 꽉 깨물어야만 했다. 연구실문의 경첩은 미세한 소리를 내며 열렸고 이윽고 커다란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져 나간 열쇠걸이는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고 발걸음은 그 소리와 동시에 잠시 멈칫 했으나 이윽고 다시 아까와 같은 템포로 움직였다. 나스치는 미친듯이 떨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고 욕지거리를 뱉었다. 발소리는 곧장 연구실 쪽으로 향했고 소리가 가까워지자 나스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발걸음은 연구실 문앞에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고 나스치는 숨소리도 쪼개어 쉴 정도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연구실의 문이 닫히면서 뒤에 있던 그에게 연구실 등불의 밝은 빛이 쏟아졌다. 결국 나스치는 신음소리를 내며 천천히 웅크린 몸을 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예상대로 난논교수가 웃는 얼굴로 서있었다. 그가 교수와 시선을 마주치자 교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들려있던 검고 날카로운 물체를 그의 목 위로 떨어뜨렸다.

“ 아! ”

휘미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끔찍한 꿈이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아직까지 촉촉함을 유지하고 있는 풀의 생기가 느껴졌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소리쳤다.

“ 빌어먹을! ”

휘미의 목소리에 같이 옆에서 엉켜져 자던 메지도 깜짝 놀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그는 눈을 비비며 손목시계를 쳐다보고는 태엽을 감고 다시 시간을 맞췄다.

“ 우리, 여기서 잤나? ”

휘미는 사방을 둘러보고는 손바닥을 얼굴에 문질렀다. 그는 한기에 몸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스치의 방을 살펴보았다. 얼룩진 창문에는 김이 잔뜩 서려 있었고 방공기는 매우 차가웠다. 2층에는 어빕이 죽은 듯이 자고 있었으나 나스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 학생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휘미는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을 때도 나스치에 대한 고민을 안할 수가 없었다.

‘아무 이상 없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도대체 왜 우리 앞에는 안 나타나려는 거지? ’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난논은 두 학생이 연구실에 갔었던 사실을 모르는 듯 하고, 나스치는 듣기로는 건강하며, 처음 보는 풀은 아직 아무도 모르게 가지고 있다. 언젠가 나스치는 나타날 것이고 만약 그러지 않더라도 피해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좋게 생각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오는 합리화의 과정이었지만 휘미는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버릇이 된 듯 자신의 주머니속에 있는 풀을 또다시 어루만져보았다.

“ 아시다시피 우리 윔은 독자적인 정치 체제인 집행체제 덕분에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올 수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반인이 직접적으로 정치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실제 생활에서의 풍족함이 전부죠. 그래서 대부분의 윔인들은 큰 불만이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정치적인 내면을 들여다보면 집행체제 또한 매우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이 완벽하지 않은데 완벽한 무언가를 탄생시킨다는 것은 역설적인 얘기죠. 집행체제가 지금까지 잘 이어져 온 것은 그것을 슬기롭게 발전시켜나가기 위해 행한 끝없는 노력과 우리 윔인들의 우수함 덕분입니다. 집행체제는 가장 수뇌부의 활동을 비밀에 부치고 공개하지 않는 대신 실무에 해당하는 기관들의 업무는 모두 공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집행자, 즉 최고 수뇌부 모두가 훌륭하고 깨끗한 인물일 경우 더없이 훌륭한 체제입니다. 하지만 만약 최고 수뇌부들이 아무도 모르게 타락하거나 다른 나라의 꼭두각시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다행이 아직도 그런 집행자가 나오지 않은 이유는 권력을 서로 중재할 수 있게끔 4명의 집행자가 함께 체제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여기에도 위험은 따릅니다. 만약 타락한 집행자들이 생겨나 훌륭한 다른 집행자를 해하고 그들의 심복을 새로운 집행자로 삼아 집행자 전체를 타락시키게 되면 어떨까요.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지금까지 그랬듯 아무도 모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세상이 올 것입니다. ”

휘미는 자기 옆자리에 아나들과 옴와든이 앉아있다는 사실 만으로 오늘 정치학 시간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다. 정치학은 다른 학파인 체루디나 메지는 듣지 못하고 나스치는 흥미가 없다며 듣지 않아서 휘미 혼자 듣던 수업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서로 피하느라 바빴던 아나들이 오늘은 휘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틈이 날 때마다 말을 시켰다.

“ 휘미 솔직히 말하면, 난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다. 네가 연금술에 조예가 나만큼 깊은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튼 미치광이 풀은 정말로 훌륭한 발견이야. ”

“ 그렇군. ”

휘미는 아나들에게 반쯤 등을 돌린 채 책에 낙서를 하며 툭툭 던지듯 대답했다.

“ 하지만 따지고 보면 역시 내 계획, 아니 내가 사람을 잘 보는 점도 있고 시가등이 발견에 크게 도움이 된 점도 있지. ”

휘미는 작게 응 이라고 말했고 아나들이 못들은 것 같자 그에게 얼굴을 돌려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등을 돌렸다. 아나들은 다시 무언가 말하려고 했으나 휘미가 갑자기 고개를 휙 돌려 아나들의 얼굴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자 그는 화들짝 놀라 뒤로 얼굴을 빼었다. 휘미는 아나들에게 물었다.

“ 난논 교수가 어딨지? ”

아나들은 다시 몸을 추스르며 말했다.

“ 후 놀래라. 연구실에 있겠지. ”

그러자 휘미는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 아니! 청단월날! 분명 계곡 남쪽에 있었잖아. 응? ”

“ 처음부터 남쪽에 계셨지. 조사해볼게 있다고 하셨었어. 그래서 다른 교수들만 따라 올라갔었는데. ”

휘미는 이상하다는듯이 아나들에게 물었다.

“ 뭘 조사해? 남쪽에 뭐 볼거라도 있었나? ”

대답은 이상한 곳에서 왔다.

“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

휘미는 온 몸에 전기가 오르는것을 느꼈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옴와든이었다. 옴와든은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그의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아나들의 옆에서 휘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긍정적이고 위기에 번개처럼 대응하는 휘미도 지금은 표정관리를 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아나들은 별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옴와든을 나무라듯 말했다.

“ 멍청한 녀석아. 청단월이 떴는데 풀을 찾으러 안가면 뭘 하러 갔겠어 응? 애인이랑 달구경이라도 하러 갔을까봐? ”

아나들이 나무라자 옴와든은 그에게만 들리게끔 ‘아니’ 라고 속삭 인 뒤 휘미에게서 시선을 때었다. 하지만 휘미는 계속해서 옴와든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나들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이것저것 떠들어대었지만 휘미는 간신히 추슬렀던 마음이 또다시 불안해져 견딜 수 없었다.

연금술 수업이 없는 날임에도 오늘은 특별히 어제의 실험결과를 정리하기 위해 특별 수업이 있었다. 교수들은 어제 캔 풀을 정리해서 보관함에 넣어 강당으로 가져왔다. 풀을 발견한 조의 조장들은 포상을 받고 박수를 받았다.

“ 나스치는? ”

교수들이 빠져나가고 난 뒤 소란스러워진 강당에서 휘미가 말했다.

“ 왔을 리가 없지. ”

메지는 둘러보지도 않고 씁쓸하게 말하더니 먼저 강당을 빠져나갔다.
오후 3시를 달려가는 중임에도 날은 아직 밝았고 공기는 서늘했다. 햇빛은 다이지의 곳곳에 내려앉아 건물들을 빛나게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체루디는 약속보다 먼저 와서 두 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양갈래로 묶었던 머리를 풀어 놓고는 벤치에서 다리를 흔들며 본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체루디? ”

“ 어? 오빠들 안녕. 나스치오빠 만났지? ”

시무룩하게 걷고 있던 두 학생은 동시에 발걸음을 멈추고는 고개를 저었다. 체루디는 벤치에서 폴짝 뛰어 일어나더니 본관 쪽을 가리켰다.

“ 방금 전에 나한테 이 쪽지하나 주더니 일 있어서 가본다고 하던데. 한 1분 지났나... ”

두 학생은 체루디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서둘러 보았다. 메지가 외쳤다.

“ 저거 아니야? ”

메지가 가리킨 대상은 멀리 본관의 계단앞에서 양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정면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갈색 머리. 큰 키. 분명 나스치였다. 그는 일행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바닥에 떨구고는 빠른 걸음으로 본관안으로 들어갔다.

“ 잡아! ”

메지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휘미는 이미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물밀듯 본관을 빠져나오던 학생들 때문에 이리저리 피하고 부딪히면서도 끝까지 달려갔다.

“ 나스치!! ”

어느정도 거리가 좁혀지자 휘미가 있는힘껏 그를 불렀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빨라진 걸음으로 본관의 낭하안으로 들어갔다. 휘미는 낭하안으로 들어가면 그를 놓친다는 생각에 다시한번 소리쳤다.

“ 멈춰봐! 나스치 ”

휘미가 계단에 발이 걸려 주춤한 동안 나스치는 낭하로 이어지는 복잡한 갈림길에 접어들었다 휘미도 그의 발걸음소리를 따라 닥치는 대로 낭하 안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낭하 안를 거침없이 이동하는 자를 쫒아가는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머지않아 휘미는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휘미가 기진맥진한 채로 본관의 로비로 빠져나왔을 때는 체루디와 메지가 심각한 얼굴로 벤치에 앉아있었다.
메지는 휘미가 나온것을 보자 종이조각 하나를 내밀었다. 휘미는 숨을 헐떡이며 발을 벤치에 올리고 메지의 옆에 드러누워 쪽지를 들여다보았다.

“ 나스치가 아까 체루디한테 준거래. ”

메지의 말에 휘미는 숨을 참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쪽지에는 수많은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 3.14..2.1..8.16..25.3.22.7.3.49.39.3.7.11.3.22. … 』

휘미는 종이쪽지를 얼굴위에 덮고는 중얼거렸다.

“ 정말 여러 가지 하는군. ”

그러자 체루디가 말했다.

“ 기운이 하나도 없는 얼굴로 내 옆에 다가오더니 이쪽지만 슬쩍 내 손에 쥐어주고는 가버렸어. 내 말에는 대답도 제대로 안하고. ”

휘미가 누운채로 고개만 뒤로 젖혀 체루디를 보며 말했다.

“ 뭐라고 물어봤어? ”

“ 뭐하고 다니느라 안보였냐고 하니까 바쁘데. 계속 바쁘다고만 몇 번 말하더니 가버리더라고. ”

“ 생긴 거는 뭐 달라진 점 없었어? ”

체루디는 고민하듯 손톱을 깨물다가 말했다.

“ 더 멍청해 진 것 같았어. ”

“ 어빕말이 맞군. ”

휘미는 의심스러운 듯 메지를 쳐다보았고 메지는 휘미의 손에서 쪽지를 빼들고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 나스치가 이런 짓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는데. ”

“ 그렇지. 이건 아무래도 메지 네 취향이잖아. ”

휘미가 대답했다.

“ 음. 내가 보기엔 계산은 아니야. 암호인데. ”

메지의 어깨위로 쪽지를 바라보던 체루디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메지의 표정이 점점 이상하게 변했다.

“ 아냐 아냐. 정말 말도 안돼. 나스치는 세 번 이상 묶인 매듭은 화내면서 이로 물어뜯거나 칼로 잘라버리는 스타일인데, 그런 사람이 내가 1분안에 못 푸는 암호를 만들었다고? ”

그러자 휘미는 박수를 한번 치더니 말했다.

“ 좋아. 조용히 해봐. 내가 정리를 하지. 나스치는 연구실에 혼자 남은 뒤로 난논 교수한테 걸렸고 난논교수한테 머리를 몇 대 얻어맞은 뒤에 정신이 이상하게 돼서 이런 암호나 만들면서 숨바꼭질을 하는 거야. 너무 완벽하게 짚었나? ”

체루디와 메지는 입을 쫙 벌리고 휘미를 바라보았다. 메지가 덧붙였다.

“ 아니면 우릴 제대로 엿 먹이려고 이러고 있거나. ”

“ 엿 뿌리까지 먹어 줄 테니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

휘미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이제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단월에도 그는 나오지 않았고 벌써 며칠째 수업에 빠졌다. 메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 나스치가 우리랑 왜 친해졌었지? 언제 처음 만났더라 ”

“ 첫 기평회 저녁 회식때. ”

메지는 자기가 물어놓고는 휘미와 입을 맞춰 대답했다. 휘미는 마치 어제일을 이야기하듯 자연스럽게 기억을 떠올렸다.

“ 그날 토론때 상대진영하고 미친듯이 싸웠었잖아. 그리고는 술집에서 나스치가 다가오더니 우리의 방식이 바로 자기가 좋아하는 방식이라고 했지. 그 뒤로는 다른 놈들은 재미가 없다고 하면서 우리 옆에 앉아 술을 엄청나게 퍼마셨잖아. ”

메지는 기억난다는듯 웃었다. 그리고는 두 학생 모두 체루디에게 고개를 돌려 같은 질문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재빨리 먼저 말을 꺼냈다.

“ 설마 진짜 나스치 오빠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

메지가 잠시 머뭇거리자 휘미가 대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불안한 건 마찬가지였다.

두 학생은 나스치가 없자 시무룩해진 체루디를 위로해서 보낸 뒤 신도서관으로 향했다. 지금만큼은 나스치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휘미의 주머니 속 풀에 대해 알아볼 생각으로 이미 극도로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 대체 정체가 뭘까? ”

“ 의외로 별거 아닐수도 있으니 너무 기대하지 말자니까. ”

휘미는 주머니속의 풀을 한번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하루가 꼬박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풀은 방금 채집한 것처럼 감촉이 싱싱했다. 두 학생은 식물도감들과 식물 백과, 연금술 재료학 등 각종 책들을 꺼낸 뒤 읽어보기 시작했다.

“ 청단월에 나는 풀은 과 ․ 목의 특징도 없고 제멋대로라서 색인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니까. ”

“ 교수들은 금방 알텐데... 젠장 물어보지도 못하고. 골치 아프네. ”

메지는 신나게 소리를 내며 책장을 넘겼다.

“ 해 1327, 해 1328, 해 1329, … 망할 식물도감에 안 나온 풀이면 어쩌지? ”

“ 더좋지. 그럼 진짜로 귀한 풀이니까. ”

메지는 펜을 들어 흰 종이에다가 대고 스케치하듯 그림을 그려나갔다. 중간중간 코를 찡긋거리며 생각을 하고는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던 끝에 펜을 놓았다.

“ 이렇게 생겼었어. ”

메지는 종이를 휘미에게 건냈다. 꽤 두껍고 단단한 중앙 줄기, 그리고 그 줄기에 매달려 있는 작은 줄기, 또 그 작은 줄기에 매달려 있는 더 작은 줄기들… 그리고 그 줄기들 마다 약속이라도 한 듯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는 닮음꼴의 잎사귀들… 청단월날 이 풀을 만났어도 투명한 모습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 분명했다.

두 학생은 몇 시간째 책을 찾아보았지만 투명한 풀에 대한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휘미는 지쳤는지 의자에 기대어 나스치의 쪽지를 뚫어지듯 바라보고 있었고 메지는 식물도감의 끝장을 덮은 뒤 다시 책을 앞으로 돌려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 해1 태양풀 아니고 해2 바람눈꽃 아니고 해3 노란망울풀 아니고 해4 잔무늬부채잎풀 … ”

“ 잠깐만! ”

휘미가 소리치는 바람에 메지는 물론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메지는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대었다.

“ 무슨일이야. ”

휘미는 나스치의 쪽지를 꺼내어 숫자 밑에다가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 3.14.2.1.8.16.25.3.22.7.3.49.39.3.7.11.3.22. … 』

“ 3.14.2 이건 전부 해3 해14 해2 를 뜻하는 거지. 해3번은 노란망울풀, 14번은 새둥지풀 2번은 바람눈꽃이고 … ”

휘미는 나스치가 쓴 숫자에 해당하는 번호의 음어로된 풀들을 쭉 나열했다. 모두가 2학년 학생이라면 외울수 밖에 없는 해100 밑의 낯익은 풀들이었다.
휘미는 나스치의 번호대로 풀을 나열했으나 아무런 규칙이 없자 머리를 긁적였다.

“ 아닌가. ”

메지는 무표정하게 휘미가 쓴 풀들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 잠깐 이건 아주 쉬운거야! ”

메지는 각 풀들의 첫 음절을 동그라미 쳤다. 그리고는 그 동그라미를 다시 따로 모아 밑에다가 풀어서 썼다. 놀랍게도 각 풀들의 음절들을 따서 나열하자 하나의 문장을 이루었다. 휘미는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평범한 윔의 언어임에도 휘미는 그것을 읽는데 이질감이 들었다.

『 내방 오른쪽 창문 』
메지는 멀뚱히 눈을 깜빡이다가 휘미한테 물었다.

“ 방 오른쪽 창문 을 어쩌라고? ”

휘미는 메지를 보며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 추우니까 좀 닫아달라는 건가? ”

메지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하튼 책 찾기에 지친 이들은 나스치의 기괴한 암호를 푼 이상 더 이상 도서관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다. 나스치가 자신들에게 남긴 메시지를 푼 지금 이제 숨바꼭질이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바깥은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으며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물통 안에 풀은 물감처럼 잔뜩 엉켜 있었다. 그리고 그 혼돈의 가운데 홀연히 미월이 떠있었다.

“ 멋지네. ”

휘미와 메지는 거의 동시에 외쳤다. 달은 마치 눈썹처럼 가느다랗게 말려 있었다. 하루사이에 그 크던 달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데도 달은 끊길 듯 말듯 가늘게 이어지면서 색깔은 매우 선명해서 마치 먼지가 쌓인 종이에다가 얇은 금박지를 박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두학생은 달밑을 거닐고 있는 여학생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월은 여성의 달이다. 미월 아래서 여성들은 자신의 숨은 매력을 모두 발산하고 있었다. 미월의 빛을 받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은 전부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몸에서는 은은한 빛과 함께 향기가 퍼져 나오고 있었으며 피부는 맑고 깨끗하고, 머리카락의 윤기는 더욱 짙어졌다. 휘미와 메지는 눈이 여기저기 돌아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나스치의 방에 들이닥친 두 학생은 문이 의자를 박살내는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창문으로 향했다. 미월기 천공활자를 얼굴에 덮고 자고 있던 어빕이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아 무슨 일이에요? ”

그러자 휘미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 오늘 나스치 안왔지? ”

“ 아... 네. ”

어빕이 말을 하기도 전에 휘미는 메지를 도와 오른쪽 창문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창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 난 무슨 보물이라도 나올줄 알았는데? ”

메지는 아예 오른쪽 창문을 창틀에서 때내기 위해 흔들었고 휘미는 창 밑에 새긴 글자가 있는지 얼굴을 창틀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메지는 놀라고 말았다. 휘미가 숨을 헐떡일 때마다 창문에 입김이 생기면서 어떤 글자가 또렷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 휘미 계속해봐. ”

“ 뭐를? 어라?... ”

휘미도 그제야 창문에 희미하게 나타나는 글자를 보았다. 그는 입김을 더 불어넣었다. 이윽고 완벽한 문장의 글자가 나타났다.

“ 청색 꽃그늘 아래, 너희는 청색 하늘. ”

휘미와 메지는 멍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글자를 바라보더니 점점 표정이 일그러지다가 갑자기 급속하게 굳었다. 메지는 현기증이 도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고 휘미를 바라보았다. 휘미는 떨고 있었다. 난논의 연구실에서 도망칠 때도, 투명풀을 처음 발견했을때도 떨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떨고 있었다.

“ 이거 설마 내가 제대로 읽은 건가요? ”

뒤에서 목을 빼내어 문장을 보던 어빕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스치가 남긴 문장은 음어와 평어가 결합된 말이었다. 음어를 자주 접하는 다이지의 학생들에게는 그다지 해석하기 어려운 문장이 아니었다.
‘청색 꽃그늘’에서의 ‘청색’은 말 그대로 푸른색을 의미했으며 ‘꽃 그늘’은 달그림자. 즉 합치면 ‘청색의 달그림자’가 되며 이는 달빛을 받으면 항상 청색으로 빛나는 다이지를 뜻한다.
그리고 뒤의 ‘너희는 청색하늘’ 에서의 청색이란 음어로 ‘오늘’을 말하는 것이고, 마지막의 하늘은 음어로 ‘죽음’ 을 뜻한다.
한꺼번에 해석할 경우 “ 다이지에 있는다면 너희는 오늘 죽는다. ” 가 되는 것이었다.

어빕은 몸을 부르르 떨며 신문지를 들어 창문에 써있는 글을 마구 지웠다. 두 학생은 어쩔줄 몰라 어정쩡한 자세로 방안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기숙사 복도로 나와 뛰지도 않고 걷지도 않는 이상한 폼으로 불안하게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