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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행정 안의 수많은 건물들이 지어진 시기는 옆동네인 다이지가 지어지고선도 한참 후의 일이다. 물론 윔은 창립시기부터 집행정치체제를 이어왔지만, 옛날에는 국가의 업무를 보는 기관들이 여러 군데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집행정이라는 지정된 명칭이나 장소는 없었다. 집행자들은 항상 비밀스러운 곳에서 정치를 행하였고 특히 4명의 집행자가 모두 모여 정치와 외교의 중대한 토론을 하는 ‘집행의회’의 장소는 일곱 개 눈동자의 달의 신 루나인의 시야 밖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밀리에 선정된 장소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국가의 업무를 보는 기관들을 한 데 모아놓는 것이 매우 편리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곳에 모두 모아놓긴 했지만, 여전히 집행자들의 거처가 감춰져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조금 더 집행자에 대해 설명한다면 다른나라의 왕 의 역할을 하는 집행자들의 존재를 아는 것은 그 자신과 다른 집행자들, 자신이 맡은 집행 분야의 가장 높은 지도관, 그리고 윔 전체를 통틀어 뽑은 가장 뛰어난 호위무사 몇 십 명뿐이다. 물론 호위무사들은 자기 집행자 외의 다른 집행자는 알아보지 못하며 항상 몸을 숨긴 채로 집행자의 뒤를 조용히 따라다닌다. 신분이 드러난 자들 중에 유일하게 집행자와 연결되는 최고 수뇌부의 지도관들은 집행자들의 명을 받아 윔에서 실제적인 집행 역할을 하게 된다.
집행자의 권한은 무한하지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므로 평소에는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으며 신분이 세상에 밝혀지거나 심하게 그릇된 행위를 할 경우 다른 집행자들에 의해 제약을 받게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왕권도 아니며 의회정도 아니다. 4개의 왕과 비슷한 숨은 권력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협력정치인 셈이다.

집행정 건물들을 지나가는 동안 주변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학생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잇었다. 저마다 똑같은 팔찌를 찬 학생들이 곡괭이랑 짐보따리등을 매고 그요네 산 쪽으로 향하는 풍경은 낯선 것이 당연했다.
메지는 전체적으로 어려보이는 얼굴인데다가 첫인상이 선해서 처음 만난 사람들도 접근하는 데에 부담이 없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줄을 지어서 이동하고 있던 메지에게 여행자 차림을 한 20대 중반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옆으로 다가와 발걸음을 맞추고는 툭 말을 던졌다.

“ 여자들은 왜 데리고 가는 거요? ”

남자는 몸놀림이 매우 민첩해 보였고 나이에 비해 퍽 드레가 있어 보이는 말투였다. 메지가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짓자 그는 턱으로 여자들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 전쟁 때문에 모인게 아닌거요? 정부가 여자용병들을 쓴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소만. 나로선 찬성이지”

메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 아 우리는 약초... 음. 우린 그요네 산에 일을 하러 가는 겁니다. ”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메지에게 말했다.

“ 이상한 일이로군. 산에 뭘 얻을게 있어서 가는진 모르겠지만 내가보기엔 여기 있는 사내들은 지금세상에 곡괭이보다는 성에서 칼을 들고 있는 편이 더 어울리지 않겠소. ”

남자는 말을 하다가 말고 자연스레 메지에게서 멀어졌다. 메지는 남자에게 무언가 물어보려고 했지만 그는 금방 대로변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메지는 집행정을 빠져나와 위머의 동쪽 시가지를 지나면서 남자가 한 말을 대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맙소사 이게 다 뭐야? ”
커다랗게 솟아있는 위머의 동쪽 성문 앞에는 사람들이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동문의 경라대가 머물고 있는 초소에는 구실만 할 수 있을 정도로 빨리 지은 꽤 큰 목제간이건물이 - 윔에서는 이것을 가개 라고 부른다. - 있었고 길바닥에는 똑같은 내용을 활자로 인쇄한 격문들이 휘날리고 있었다. 성문 옆 초소의 위에는 단상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 위에는 경라대원이 아닌 군인복장을 한 세 사람이 단상밑의 수백명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이 선창을 하자 아래에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똑같이 반복해서 따라하고 있었다. 다이지의 학생들은 난생 처음 보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동요되어 서로 수군거리면서 저마다 발밑에 격문을 집어 들어 읽어보았다. 휘미도 예외는 아니었다.

「 전쟁발발! 스니게치 공방. 나라를 지키자. 건장하고 용맹한 윔과 동맹국의 남성들을 모집합니다. 1년 선불 500릉, 사망시 유가족(없을시 수령인의 주소를 정확히 기입) 에게 3년간 각각의 생활품과 밀을 지급. 각 시와 마을의 모병소로 오십시오!, 모병소가 아직 설치되지 않은…」

휘미는 격문을 접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성문 앞에 다다르자 곳곳에서 격문을 읽으며 모여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보였고 군인들은 돌아다니면서 그런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아내고 있었다. 멀리 모병소로 추정되는 가개 밖으로는 가도를 가로지르고도 남을 정도로 모병자들의 줄이 길게 나 있었다.

“ 대오를 지키세요! 대오가 잘 맞춰져야 제시간 안에 도착할겁니다. ”

앞쪽에서 교수들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어수선해졌던 학생들은 그제야 눈앞에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은 듯 했다. 다시 걸음이 빨라진 이들은 성문을 빠져나와 그요네 산의 그림자 아래로 향했다. 날은 이제 어둑어둑해져 햇빛은 석양을 빨아드리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동쪽성문의 소란이 사라질 정도로 도시에서 멀어지자 길은 더욱 좁아졌고 다듬어지지 않은 바위언덕길이 나타났다. 그요네산은 날라산맥의 서쪽 끄트머리에 해당하는 산맥으로 그요네산을 기점으로 북동쪽으로 대륙에서 가장 높고 크게 뻗어있다. 멀리 날라 산맥의 북쪽 앗사나 고원에서는 앗사나 인들이 외부와 단절 된 채 그들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날라 산맥 동남쪽의 가녘들에는 미지에 싸인 산간마을들이 산맥을 따라 곳곳에 퍼져있다. 동부 윔은 서부처럼 도시화를 전혀 받지 못했으며 사람들은 산맥을 비롯한 거대하고 웅장한 자연 속에 묻혀 살아가고 있다.
메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먼 동쪽을 바라보았다. 메지도 그런 산간마을 출신이다. 물론 그가 살았던 알비키는 도시화가 된 꽤 규모가 큰 산간마을이며 ‘동쪽의 수도’ 라고 불리는 알림 과 거리가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알비키는 난티나무가 풍성했기 때문에 그의 집안도 대대로 건축업을 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가 설계하는 건축물들을 접한 그는 저절로 나무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조금 더 자라고부터는 그가 만들어낸 발명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많은 것들이 마을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수 있었다. 다소 엉뚱하긴 했지만 생활에 유용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적용을 잘 해 내었던 것 같다. 그의 재능은 금방 유명해졌고 알림의 지방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그가 다이지에 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산을 오르자 멀리 석양 너머로 그요네 산맥의 정상이 보였고 능선으로부터 뻗어나온 언덕이 가풀막을 이루면서 학생들 앞에 뻗어있었다.

“ 다들 조심해서 이동해요! 이쪽 언덕만 넘으면 인원을 다시 점검하고 계곡으로 곧장 이동할 겁니다. ”

교수의 목소리는 산에 흡수된 듯 무겁게 들렸다. 반장들은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오르면서 앞열에서 뒷열로 목이 쉬도록 같은 말을 반복해서 전달하느라 얼굴이 벌게져 있었다. 해는 이미 자취를 감췄고 후광만이 남아 마지막 빛을 남겨놓고 있었다. 주변이 이즈막 해지자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어느새 밤의 기운이 그 안으로 파고들었고 온 세상이 어두컴컴해졌다. 메지는 기다렸다는듯 버튼을 경쾌하게 눌러 시가등을 밝혔다. 등피에서 번져 나온 빛으로 인해 주변이 눈부시게 밝아졌다.
힘들게 언덕을 오르자 넓은 부분이 완만하게 굽어 높게 된 모양의 터가 나왔고 터의 동쪽으로는 나무가 띄엄띄엄 엉켜 내려진, 계곡으로 향하는 비탈길이 어둠속으로 뻗어있었다. 교수들은 조를 묶어 인원을 세어본 뒤 모두 등불을 키도록 지시했다. 교수들도 시가등을 가지고 있었는지 팔을 높이 들어 밝은 등을 흔들면서 계곡을 향해 앞장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제부터는 대오를 이탈하면 그 즉시 감점을 주겠습니다! ”

교수의 말이 반장들의 전달에 의해 여러번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교수들의 불빛을 중심으로 학생들의 불빛도 일렬로 쭉 늘어서자 비탈길에 긴 빛의 줄무늬가 만들어졌다. 뒤에 있던 학생들은 밑으로 길게 이어진 뜻밖의 빛의 장관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간혹 풀에 미끄러져 넘어진 사람이 몇몇 있는것 빼고는 워낙에 빛이 밝고 이동속도가 느린 탓에 매우 안전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안전한 대신 행진은 금세 매우 지루해졌고 누군가 천연덕스럽게 갱가(賡歌)를 시작했다. 돌연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산속에 울렸다.
갱가는 선소리(선소리는 둘러서서 부르는 갱가라고 보면 된다)와 더불어 윔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 일을 할 때나 지루한 여행을 할 때 심심함을 덜기 위해 부르는 전통적인 풍습으로 적절한 상황에서 누군가 한명이 시작하면 그 주변 사람들도 다 같이 동참하게 된다. 한사람이 노래를 자유자재로 부르면 처음 노래의 곡조와 주제에 맞춰서 다른 누군가가 이어서 가사만 바꾸어 노래를 만들어 가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곡조는 전문적인 시인들을 제외하고는 윔인들이 다 아는 매우 쉬운 곡조로 하는것이 대부분이어서 누구나가 쉽게 부를 수 있다.

「 산바람은 산뜻하고
   풀냄새도 향기롭네
   오늘같은 완벽한밤
   실습하기 그만이지」

한 남학생이 목청것 첫소절을 때자 다른 남학생이 곧바로 이어서 다음 소절을 불렀다.
  
「 진귀한풀 신비한풀
   청단월의 축복속에
   어서모두 피어나서
   우리앞에 나타나리! 」

다음 소절은 아주 당찬 목소리의 여학생이 이어갔다.

「 해1부터 해1000까지
   모두모두 피어나고
   처녀이끼 캐는사람
   사람한텐 쓰지말자! 」

여학생이 당당하게 처녀이끼를 들먹이며 갱가를 부르자 폭소를 터뜨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들고있던 등불들이 흔들리면서 줄이 마구 흐뜨러졌다. 내용이 우스워 잇는 타이밍을 놓치게되자 갱가는 끊겨버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반장들이 줄을 다시 잡느라 애를 먹었으나 갱가덕분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시간은 별로 지루하지 않았다.
잠시 뒤 정신없이 대열의 줄을 맞추던 아나들이 조로 돌아와 말했다.

“ 자 자! 이제 다 내려왔어! 다들 잘 해보자고. 우리가 유리해! 시가등만 있으면 개미 집 벌레집이 어디있는지 까지 구별 할 정도니까. ”

학생들이 모두 내려온 것을 확인하자 교수들은 준비를 하라고 지시한 뒤 손을 뒤로 뻗어 골짜기 위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자 여기부터 시작해서 골짜기를 따라 끝까지 쭉 올라갈 겁니다. 반드시 조별로 이동하면서 올라가고 특이한 풀이 보이면 이 형광깃발을 꼽아두세요! 채집은 우리 교수들이 뒤따라가면서 할 겁니다. ”

조마다 깃발을 몇 개씩 나눠주는 것을 끝으로 준비를 모두 마친 교수들은 하늘을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직 하늘에는 달이 나타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도 저마다 소곤대면서 덩달아 하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휘미는 시가등을 왼손에 꼭 쥔 채 같은 조의 학생들과 빙 둘러 서 있었다. 아나들은 흥분된 표정으로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다.
달이 뜬것은 한순간이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나타난 터라 놀랄 시간도 주지 않았다. 학생들 뒤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둥근 달이 솟아올랐다.
“ 우와 - ”
달은 푸른빛을 뿜으며 일행의 뒤쪽에 정면으로 나타났다. 크기가 너무 큰 탓에 마치 이들이 있는 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달하고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청단월의 푸른빛이 계곡의 어둠과 합쳐지자 마치 다른 세상이 된 것 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달이 뜬 직후 사람들이 첫 번째로 숨을 쉬자 몸의 근육과 뼈에 알 수 없는 힘이 붙는 느낌이 들었고 두 번째로 숨을 쉬자 정신이 마치 얼음폭포 아래에서 서 있는듯 차고 깨끗해져 기억나지 않는 것이 없고 괴로운 것이 사라졌으며 마음은 매우 평온해졌다. 세 번째 숨을 쉬자 몸과 정신속으로 무언가 알 수 없는 상쾌하고 강력한 기운이 파고들어 아프던 곳에 머물러 상처를 치유해 마치 새사람으로 탄생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학생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솜털 같은 동작으로 바위 틈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전혀 다치거나 숨차 하지 않았다. 산의 짐승들과 새들, 나무들, 꽃, 풀들이 약속이나 한 듯 제각기 어둠속에서 요동치며 소리를 내었고 바람은 춤을 추듯 쉼없이 산 곳곳을 맴돌았다.
휘미와 메지는 아나들의 뒤를 따라 계곡을 재빠르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 용염풀이다! 최분풀이다! ”

여기저기서 외침이 들리기 시작하자 아나들은 이를 갈며 더 빨리 조를 몰기 시작했다.

“ 걱정마! 우리한텐 시가등이 있어. ”

휘미와 메지는 조의 맨 뒤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여기저기서 비교적 흔한 실험용 풀을 발견했지만 그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청단월의 풀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계곡의 최상단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나들은 청단월 풀을 발견하지 못한것에 조바심이 날대로 난 모양이었다. 그가 소리쳤다.

“ 젠장! 뭐가문제지? 얼마 안남았어. 얼마 안남았다고! ”

정상에 도착한 아나들은 다시 앞장서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계곡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내려가면서 반복적으로 화를 내며 뭐라고 소리쳤다. 조원들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휘미와 메지도 실망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들의 눈에도 청단월의 풀들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몇몇 개의 흔한 실험용 풀들을 건진 뒤 아나들의 조는 제일 먼저 시작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나들은 씩씩거리며 발로 바위를 걷어찼다. 청단월의 기운마저 없었으면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는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 야! 다시 흩어져서 찾아보자! ”

그의 말에 조원들 중 하나가 말했다.

“ 조별로 뭉쳐다니지 않으면 실격이야. ”

그러자 아나들은 몸을 부르르 떨고는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달이 떠있는 계곡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 저쪽으로 가면 되지 저쪽엔 지금 아무도 없어. 가! 빨리 흩어져! 달이 사라지면 시작점으로 다시 모이면 돼! ”

휘미와 메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아래쪽으로 달려갔다.

“ 이거 완전 제멋대론데? ”

메지가 기가 막히다는 듯 말했다. 휘미가 대답했다.

“ 차라리 잘됐어. 우리끼리라도 빨리 움직이자. 나중은 저녀석이 책임질테니 우린 풀을 찾기만 하면 돼. ”

휘미와 메지는 시가등을 눈앞에 세우고 계곡의 아래쪽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풀들이 무성한 아래쪽에서도 청단월의 풀은 발견되지 않았다.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며 내려가던 순간, 휘미는 무언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분명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빛을 향해 뛰어갔고 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면서 몸이 공중에 뜨는것이 느꼈다.

“ 휘미 안돼! ”　

남쪽으로 너무 간 나머지 휘미는 계곡의 끝인 낭떠러지 까지 온 것이었다. 어떻게 해서 자신이 낭떠러지 절벽에 매달린지 휘미는 몰랐다. 휘미는 한손에 시가등의 둥근 철사손잡이를 잡고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청단월의 가호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시가등의 고리가 절벽의 돌부리에 걸려있던 것이다. 메지는 부리나케 달려가 휘미의 시가등을 움켜쥐었다.

“ 살려줘! ”

“ 꽉잡아! ”

메지는 양손으로 있는힘껏 시가등을 위로 잡아당겼다. 휘미는 나머지 한쪽손도 등을 잡으려고 했다. 하지만 휘미가 양쪽 손으로 손잡이를 잡자 고리는 지탱하지 못하고 늘어나 돌부리 끝으로 드르르 소리를 내며 끌려 내려갔다.

“ 젠장! ”

메지는 바닥에 완전히 엎드린 상태로 절벽 밑으로 손을 뻗어 휘미의 팔목을 잡았다. 메지의 몸의 3분의 1정도가 절벽너머로 나온 상태였다. 청단월이 뜬 상태이기에 망정이지 평소였으면 근력이 없는 두 학생은 이미 절벽 밑으로 떨어져버렸을 것이다. 휘미는 이를 악물고 고리를 잡고 있던 손 하나를 메지의 팔에 감았다. 그러자 휘미의 시가등이 돌부리에서 세차게 요동쳤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휘미는 갑자기 절벽 한 귀퉁이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그가 움직이지 않자 메지가 소리쳤다.

“ 휘미 뭐해! 얼른 올라와! ”

휘미의 얼굴이 점점 묘하게 변했다. 메지는 안간힘을 쓰며 휘미를 붙잡고 있었지만 휘미는 한쪽 팔을 다시 뻗어 돌부리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시가등을 후려쳤다. 시가등은 다시한번 요란하게 흔들렸다.
휘미는 자신이 보고 있는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가등이 비친 상태에서는 분명 아무것도 없던 곳에 등불의 빛이 사라지자 잔잎이 수없이 많이 매달린 풀포기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50센티 정도 크기의 풀이었다. 꽃은 없었으며 큰 줄기와 여러 작은 줄기에는 타원형 모양의 잎이 다양한 크기로 무수하게 많이 매달려 있었다. 풀의 길이에 비해 잎들이 지나치게 무성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 외에는 크게 개성이 없엇다. 다만 시가등의 불을 받을때는 마치 투명물체처럼 사라졌다가 불빛이 지나고 그 자리를 청단월의 달빛이 채우자 빛을 발광하며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이상한 형태를 띄고 있었다.

“ 휘미 뭐하냐니깐! ”

메지가 한번더 소리치자 휘미는 그제서야 그에게 외쳤다.

“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

휘미는 메지의 손에 매달려 몸을 왼쪽으로 튼 다음 한쪽 손으로 풀뿌리를 쥐었다. 식물도감에서도 확인하지 못한 풀이었다.
휘미는 풀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놓고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피부에 해를 입히는 풀은 아니었다.
그는 손을 다시 뻗어 풀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어떤 쓰임이 있는지 어느 부분이 중요한 건지 모르므로 부드럽게 뿌리를 잡아 흔들었다.

“ 휘미! 힘빠지겠어! ”

메지는 이를 악물고 휘미의 한쪽 팔을 붙잡고는 말했다. 휘미는 아무 대답 없이 풀을 안전하게 빼내는데 온힘을 기울였다.

“ 됐다!! ”

그는 풀을 뽑는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새하얀 빛이 그의 눈안으로 솟구쳐 들어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휘미는 풀을 주머니 깊숙한 곳에 쑤셔넣고 풀을 잡았던 손으로 머리위의 바위모서리를 붙잡았다. 평소라면 거의 불가능한 동작이지만 휘미는 그 뒤로는 메지의 도움 없이 팔을 굽혀서 몸을 끌어올려 다리를 절벽위로 걸쳐 올라왔다.
휘미는 올라오자마자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주위를 휙 둘러보더니 주머니에서 풀을 꺼내 메지의 눈앞에 뻗었다.

“ 이 풀 이름 알아? ”

풀은 마치 안개속의 그림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꿈속에나 있는 모습이었다. 휘미는 달빛을 등지고 있었는데 풀을 잡은 손을 높이 들어올리자 달빛이 풀의 잎 표면과 만난 부분에 은색 휘광이 번져났다.

“맙소사... ”

메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풀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고 휘미는 도로 풀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 뭐해! ”

메지는 휘미가 풀을 감추자 소리쳤다. 휘미는 주변을 둘러보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그는 메지에게 나직하게 얘기했다.

‘ 아무도 본 사람이 없잖아. ’

‘ 그래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

‘ 걸리긴 왜 걸려. ’

그때 누군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나들과 그의 일행들이었다. 아나들은 미친듯한 속도로 계곡을 달려오면서 두 학생에게 외쳤다.
“ 뭐 발견한거 있어? ”

아나들이 가까이 다가갔으나 두학생은 멍하니 서 있었다. 아나들은 그런 그들을 보며 외쳤다.

“ 제길 너희도 없어? 시간이 얼마 안남았다고 젠장! 빌어먹을! 달이 곧 사라질 거야. 어랏? ”

아나들과 그의 일행은 두 학생에게 다가오다가 자신의 발치아래에 풀이 나있는 것을 발견했다. 휘미와 메지는 아나들을 바라보다가 그의 시선이 바닥을 향하자 자연히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 미...미치광이 풀이다!!! ”

아나들이 소리치자 다른 학생들도 다가와 풀 주변을 둘러싸고 탄성을 자아냈다. 풀을 코앞에까지 들이대고 바라보던 아나들은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더니 휘미와 메지를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두팔을 벌렸다.

“ 드디어 해냈구나! ”

아나들은 환호 비슷한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형광깃발을 꼽고 계곡 위쪽으로 달려갔다.

“ 교수님! 교수님! 여기 풀이 있습니다. ”

아나들이 달려가자 그의 일행도 등을 돌리고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엉뚱한 방향에서 나왔다.

“ 어디보자... 축하하네. 미치광이 풀이 확실히 맞구만. 줄기는 갈색, 뿌리는 연회색, 희미한 꽃의 진동, 약간 매운 냄새, 잎에 손을 대면 살갗이 벌겋게 부풀어 오르지. ”

“ 교수님? ”

난논교수였다. 그는 계곡 남쪽에서 천천히 걸어와 풀 앞에 멈춰 쭈그려 앉더니 삽을 꺼내어 주변의 흙을 도려내었다.
‘ 난논교수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
메지의 귓속말에 휘미는 어깨만 들썩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들 조의 학생들은 그 주위에 둘러서서 그가 풀을 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난논은 서둘러 흙을 캐다가 갑자기 번쩍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 그런데 내가 보기엔 여긴 계곡의 남쪽으로 보이는데? ”

학생들은 전부 계곡 기준선 위쪽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었고 그 뒤를 교수들이 따라가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학생이나 교수나 엉뚱한 곳에서 서로 마주친 것이다. 뒤에서 발돋움으로 지켜보고 있던 아나들이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말했다.

“ 저흰 북쪽을 다 탐색하고 시간이 남아서 남쪽으로 온 것입니다. 달빛을 낭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난논은 일부러 아나들의 시선은 피한 채 하늘을 쳐다보면서 삽만 열심히 움직였다. 학생들은 모두 그의 반응을 살폈고 교수는 잠시 뒤 피식 웃으며 말했다.

“ 좋아. 위치를 이탈했지만 귀중한 것을 발견했으니 내가 데리고 내려온 걸로 해주마. ”

아나들의 얼굴이 급속도로 밝아졌다.
학생들중 절반이상이 계곡 위쪽의 탐색을 마치고 기준점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나들은 당당하게 난논의 옆에 서서 걷고 있었고 난논은 왼손에만 장갑을 낀 채로 미치광이 풀의 뿌리를 잡고 덜렁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 저것봐! 달이 사라진다! ”

청단월은 이제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커다랗던 달이 서서히 물속으로 잠기듯 먼 지평선 너머로 지워져갈수록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달은 몇 초 되지도 않아 완전히 사라졌고 청단월이 사라진 주변은 예전보다 몇 배나 더 캄캄해졌다. 메지는 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힘의 차이를 방금 전과 비교해 보았다. 그런 그의 어깨 뒤로 휘미가 다가와 귓속말을 흘려 넣었다.

“ 오늘 아무일도 없던 거야. ”

학생들은 오늘 채집된 총 6개의 귀중한 청단월의 풀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기가마인 교수는 생각보다 많은 풀을 채집한 것에 만족한다면서 짧게 연설을 했고 다이지의 2학년 행렬은 계곡의 반대편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아나들은 풀을 마치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자랑하고 다녔지만 휘미와 메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두 학생은 오로지 휘미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미지의 풀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을 뿐이었다.
수업이 해산 한 뒤, 아나들은 자신이 크게 한 턱 낸다며 조원들을 모았지만 휘미와 메지는 이미 그들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지자마자 두 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