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에세이 중간에 있는 녀석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고 제 기억속에 남아있는 하나의 사건을 구체적 이미지화시켜본 녀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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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날이었다.

 햇살에는 아직 들떠있는 여름의 공기와 이제는 아래로 가라앉는 초가을의 기분이 묘하게 섞여서 나지막하게 숨 쉬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내가 가려는 미술실은 학교의 가장 위층에 있었고 길지 않은 복도에는 내 발걸음만이 탁탁, 울릴 뿐이었다.

 쿵쾅거리는 아이들이 사라져 버린 복도는 마치 밤의 학교를 보는 것처럼 같은 장소인데도 이질적인 분위기로 감싸여 있었다. 나는 빈 교실들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먼지와 몇몇 손자국이 나있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교실은 한없는 정적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깊은 해구 속으로 끝없이 침몰하는 잠수함의 알 수 없는 것들로 차있는 듯이 빈 교실은 적막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교실 안에 있는 무거운 심해류들이 창문을 깨고 나올 것 같아서 나는 묘한 긴장감을 세우면서 복도의 정중앙을 따라 걸었다.

 반 아이들의 나머지 그림을 걷어오라는 미술선생님의 말을 듣고 미술실로 가는 나의 손에는 말린다고 햇볕에 널어놓았던 그림들이 아직 꺼슬한 따뜻함을 품은 채 들려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왼쪽 손에 말아 쥔 채 한가로워 보이는 이른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복도 쪽 창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현실이란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서 중립을 잘 지켜가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왼쪽에서는 차가운 교실의 냉기가 흘러나오고 실러캔스의 꼬리에서 튕겨져 나오는 물방울이 뺨에 닿았지만 넓은 복도 창문에서는 아직까지 열기를 간직하고 있는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아롱아롱 들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때부터였나. 내 몸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쥬라기 공원이라는 영화에서 본 장면처럼. 공룡이 움직일 때 흔들리던 컵 속의 물같이 미세하게 달라진 균열의 틈을 찾고 있었다.

 이게 뭐지, 라고 자문하는 순간에 찰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조용하게 들렸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그곳에는 그 아이가 서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끝이 날카로워 보였던 하얀 하복의 와이셔츠와 왠지 또렷하게 보였던 그 얼굴을. 그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넓은 복도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고흐의 황금색으로 어지럽게 뒹굴면서 나를 보이지 않는 손으로 휘감았고 내 귀와 입을 막아버렸다.

 펑 하고 교실의 유리창이 깨져서 간신히 막아놓았던 무거운 물들이 해류가 되어서 달려들었다. 밀려드는 차가운 바닷물과 불타오르는 햇살의 손에 나는 사방에서 휘말렸다.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엷은 하늘색을 띄던 하늘은 타오르는 코발트빛으로 뒤덮여서 파도가 춤추듯 휘몰아쳤고 나는 그 광풍 속에서 내 모든 것을 내 앞에 서 있는 그 아이에게만 집중하도록 노력하며 애를 썼다.

 그저 명암 밖에 없던 세상에 물감이 든 물 풍선이 터진 듯 모든 것은 극적인 원색으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졌고 그 중 어느 곳은 휘어지고 어느 곳은 구멍이 나버렸다. 내가 가지고 있던 세계는 모조리 와해되어서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내 발 밑에는 부서진 세계의 파편이 반짝이며 뒹굴었다. 그 하나하나의 파편에는 알을 깨고 나오려는 아브락사스의 날갯짓이 보일 것 같았다. 일그러지고 재구축된다. 모든 것들이 다시 하나의 세포로 뭉쳐지고 수없는 분열을 다시 시작한다.

 그 엉망진창 틈새로 장막을 비집고 나오듯 그 아이가 걸어 나왔다. 부서져 내리는 세상의 끝에서 그는 보이지 않는 절대의 지휘봉을 들고 하모니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딩.

 어디선가 피아노의 음이 종소리처럼 들렸다. 저 멀리, 어느 무지개를 넘어서인 듯, 혹은 내 귓바퀴 위에서 치는 것처럼 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이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불가사의한 기분은 하나의 점으로 단단하게 응축되어서 그 아이의 눈동자에 훅, 빨려들어 갔다.

 서 있는 내 곁을 그 아이가 천천히 지나갔다. 마치 흐르는 강물 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 깊음을 지나고 유유히 흐르는 것처럼.

 얼마나 더 그곳에 서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시 거짓말처럼 원래대로 되돌아와서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을 때야 비로소 나는 복도에 꽃잎처럼 떨어진 그림을 주워들고 미술실의 문을 열었다. 더 이상 이 문은 내게 아까의 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