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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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우린 만나서, 술을 마셨다. 그냥 흔한 동네 소줏집이었다. 수다스런 그녀를 앞에 두고 나는 적당히 반응을 하며 적당히 내 의견도 피력하며 조금씩 취해갔다.

“난 뭐라고 저장되어있어?”
“뭐가?”
“내 번호 뭐로 저장되어있냐고. 내 이름?”
“장필순”
“응?”
“장필순, 그 때 내가 불러줬던 노래 가수야.”
“왜 내가 장필순이야?”
“그냥 저장할 때 네 이름을 몰랐으니까.”
“지금은 알잖아.”
“그렇지.”
“근데 왜 안바꿨어?”
“지금은 아니까.”

마지막 말이 그녀를 조금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매우 이치에 맞는 답변이고 연락처에 저장된 명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화난 그녀를 설득시킬 수는 없었다. 나는 미안하다 거듭 말하며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그럼 어떻게 저장해줬으면 좋겠어?”
“뭐라고?”
“그럼 어떤 이름으로 저장했으면 좋겠냐고.”
“지금 장난쳐?”

내 손을 뿌리치고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해 나에게서 멀어졌고 난 벙쪄있으며 서있었다. 물론 나도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다. 하지만 가슴으로는 나의 대화가 전혀 악의가 없는데 억울하다 느꼈다. 내가 오랫동안 여자들이랑 단기적으로 끝났다 해서 여자들이 흔히 남자에게 바라는 면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여자들에게 내 아까운 신경을 써가며 하나하나 맞춰준지가 오래고 더 이상 하기 싫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관계는 내가 과거의 가졌던 관계가 아니라고, 점점 연애감정이 커지는 와중에 괜히 알면서 모르는 척 상대방의 기분을 굳이 상하게 만들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밤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잘못했다. 용서해달라. 내가 서툴러서 그렇다. 이런 식으로 용서를 구했다. 그녀는 조금 마음을 열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빠는 너무 무심한 것 같아.”
“미안해, 서툴러서 그래.”
“여자 많이 사귀어봤을 것 아냐.”
“많이 사귀지 않았어, 그리고 매우 오랜만에 사귄 것이라 사실 내 감정의 변동을 지켜보는 것으로도 힘들어.”
“나 만나는게 힘들어?”
“그런 말은 아냐. 힘들면 내가 왜 만나겠어.”
“그래, 어쨌든 이제 잘게 나는. 잘자.”
“잘자.”

그 후 한 계절 정도가 지났다. 그녀와 나는 아직도 연인 관계였다. 나는 한층 마음의 안정도 찾았고 중독된 방탕의 시기가 지나간 것으로 보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지만, 한 세 네 달 쯤 되는 시기에. 여자친구가 내일이 우리가 만난지가 100일이라고 유언의 압박을 시작했다. 그냥 팬시한 파인다이닝을 하나 예약했다. 식전주로 까바가 나왔고 그것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내가 과거의 여자들과 사귈 때에도 100일, 1년, 크리스마스, 이런 저런 기념일을 챙겼지만 이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뭐 놀아야 할 구실을 주는데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삼청동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 이었는데. 음식은 조금 실망했다.

사건은 그 날 일어났다. 와인 페어링을 하다보니 그녀가 조금 취한게 화근이었다. 삼청동 언덕을 내려오며 그녀는 나에게

“사랑해.”

라고 어찌보면 연인들끼리의 뻔한 말을 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술이 깰 정도로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제정신인 나도 알 수가 있었지만 굳이 그 쪽으로 생각을 번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고.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100일이 될 때까지 사랑해라는 말을 나에게 안한 게 신기했을 정도이다. 어쨌든 놀란 나는 어버버 거리기만 했다. 여자친구는 바로 눈치를 채고.

“오빠는 사랑해라는 말이 싫어? 아니면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 이래뵈도 이 말이 너무 어려웠어. 오빠가 먼저 해주길 바라기도 했었고 왠지 오빠한테는 이 말을 하기가 무서웠어. 오빠가 이럴까봐. 그런데 정말 그렇네. 오빠는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 같아. 나에게도 마찬가지야. 뭐가 그렇게 오빠를 움츠러들게 만든거야? 그렇게 뻔뻔하고 능숙한 사람이 왜 이러는지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지 나는 모르겠어. 오빠가 나 처음 나가자고 꼬실 때 말 기억나? ”밤이 아깝지 않냐“ 라고 했잖아. 확실히 오빠는 밤을 아끼는 것 같아. 그런데 오빠의 인생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

“...”

“내가 오빠의 인생에 있긴 한거야? 그냥 데이트메이트, 섹스파트너가가 필요한건 아니고? 아니면 오빠의 인생에 누가 있긴 했던거야? 아니면 아직도 그 누구가 오빠의 인생에 남아 있는거야?”

“그만 얘기하자.”

“그럼 오늘 밤이 나는 아깝지 않아. 난 집에 갈게. 사랑해. 나는 오빨 사랑해.”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라는 마지막으로 집에 갔다. 나는 집에 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왜 나는 그런 간단한 말도 못했는지, 만약 사랑하지 않는다면 왜 립서비스라도 안했을까 생각을 했다. 사실 답은 간단했다.

“돌이킬 수 없을까봐.”

첫사랑 누나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 나는 누나와의 관계가 저물어 갈 때 예언을 들은 적이 있다.

“너는 바람둥이가 될 거야.”

그 때만 해도 나는 그 말의 의미가 뭔지를 몰랐다. 하지만 누나와 헤어진 후 나는 그 예언이 나에게 내려진 예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 누나가 그 말을 해서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원망을 할 정도이다. 이제 나는 또 하나의 정언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을까봐.”

나는 핸드폰을 들고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잘자, 사랑해.”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9 11:4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