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어졌다가 옅어져갔다. 야간열차의 차창 밖으로 무겁게 깔린 고요와 어둠이 한 데 어우러져 있었다. 땅바닥에 눌러 붙은 행인들의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보다 더 단단히. 그는 어둠이 맘에 들었다. 어쩌면 이 어둠이 영원히 끝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4인실 쿠셋 칸에 있었고, 운 좋게도 승객은 그 자신과 네덜란드에서 온 중년의 남성 두 명 뿐이었다. 네덜란드 남자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는 놀랍도록 조용한 상태로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열차를 타기 전까지 피로감을 호소해대던 몸이 밤의 신비한 활력을 흡수한 건지도 몰랐다.
  그는 좋은 남자였다.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가끔씩 고개를 젓곤 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대한 자신만이 느끼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칭찬하는 남자만큼 겸연쩍은 대상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어둠을 주시하면서 괴물을 생각했다.
  괴물이 말했다. 난 네가 자랑스럽다. 넌 나의 자랑이야.
  그의 머릿속에 섬광이 일었다.
  넌 나의 자랑이야.
  괴물이 속삭였다.

  그 날은 차를 타고 시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할 줄 몰랐다. 자신의 또래가 운전대를 잡고 능숙하게 핸들을 꺾는 모습을 볼 때면 그는 항상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의 옆에는 괴물의 아들이 타고 있었다. 그 녀석은 심성이 착했다. 그는 도저히 적개심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선물 받은 펜을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뒷좌석에는 괴물이 타고 있었다. 괴물 옆에는 여자가 있었다. 돼지 같은 여자. 겨드랑이를 제모하지 않았을 테지. 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럴 것이다. 비오는 날 조금만 움직여도 땀냄새가 눅눅한 대기를 뚫고 코 안의 후각세포를 찌르겠지. 그런 형편없는 여자였다.
  무슨 얘기를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다. 사업 얘기. 그 나라의 정세 얘기. 모국에 대한 얘기. 미래에 대한 얘기. 미래? 사막의 신기루처럼 덧없는 단어다. 괴물이 미래라는 낱말의 뜻을 아는지 그는 가끔씩 궁금했다.
  괴물은 가끔씩 멋있게 얘기한다. 남자처럼. 남자답게. 무언가 항상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증이 괴물에겐 있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할 때 괴물은 의뭉스러웠다. 나는 미래를 보고 있어. 괴물이 말한다. 그 미래엔 너와 네 어머니가 있다. 그렇게 말할 때 가끔씩 괴물은 멋있다. 어쩌면 집에서 거울을 보고 연습했는지도 모르지. 몸에 익을 때까지. 오랜 경력의 연극배우가 자신의 배역을 혼자 연습할 때처럼 말이다. 이제 금방이다. 확장해나가고 사람들 수를 늘릴 거다. 미래. 정말 좋은 말이다.
  그렇지 않아. 넌 중얼거렸다.
  미래의 끝은 죽음이지.
  괴물이 돼지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탐스런 허벅지. 그 허벅지로 요리를 만들면 어떤 맛일까?
  펜을 꽉 쥔 그의 손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네덜란드 남자가 몸을 뒤척였다. 그는 눈길을 돌려 쿠셋 칸의 그림자에 잠긴 남자의 몸뚱이를 보았다. 몸뚱이는 컸다. 네덜란드 남자의 평균 신장이 185cm라는 인터넷 기사를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는 쿠셋의 작은 침대가 그 몸을 지탱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네덜란드 남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는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잘 알지 못했다. 히딩크의 나라. 이번 월드컵에서 3위를 차지한 나라. 튤립이 많은 나라. 매춘이 합법인 나라. 저 중년 남자도 분명 매춘부와 잠을 자 보았을 테지. 집에서는 좋은 아버지이자 남편인 것처럼 아내와 입을 맞추고 아들과 마당에서 놀아주다가, 밤이면 슬며시 차가운 공기를 타고 미끄러지듯 거리로 나가 매춘부의 혀를 핥기 위해 할딱대면서.
  그는 일어나서 출입문으로 다가가 잠금 장치를 점검했다. 도어락은 제대로 걸려 있었다. 누군가 들어오려고 시도하더라도 금방 그가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쿠셋 칸은 밤새 여러 열차들과 분리와 합체를 번갈아가기에 침입자가 들락거리기 힘든 구조였다. 그의 걱정은 노파심이었다. 그는 도둑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었다. 도둑. 도둑과 매춘부는 인류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들이었다.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것들은 언제나 그의 목숨을 앗아갈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도둑과 매춘부.
  그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괴물이 소리를 질렀다. 그와 옥신각신 다투었다. 괴물이 그에게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던진 듯했다. 별로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괴물이 막 떠들어대지만 정작 그는 그것들이 무슨 말인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러다 흘깃 괴물을 보았다. 정확히는 쩍 벌어진 괴물의 아가리를 보았다. 그 어둠 속에 어떤 위선과 잘 다듬어지다 만 거짓말들이 있는지를 보았다. 그는 무심히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의 짐을 싸기 시작했다.
  상관없었다. 그냥 이 지저분하고 추한 장소를 떠나면 그만이었다. 괴물이 없는 곳으로. 으레 그래왔지 않았나. 괴물이 없는 장소로. 평온한 곳으로.
  그녀가 갑자기 나타났다. 어떻게 그녀가 그 장소로 나타난 건지는 몰랐다. 그녀의 동공이 팽창했고 괴물이 그녀를 보았다. 괴물이 포효하고는 그녀의 머리를 쳤다.
  순간 뜨거운 분노가 그의 몸 안에서 솟구쳤다. 소리쳤다. 죽여 버리겠어! 괴물이 그를 보았다.
  널 죽여 버릴 거야. 널 죽여서 수백만 가지 조각조각으로 분해해서 비둘기들에게 던져 버릴 테다. 네가 비명을 지르고 내 앞에서 싹싹 비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어. 그리고 네 목을 잘라버릴 거야. 그 돼지 같은 년이 비명을 질러대겠지.

  그 순간, 열차가 덜커덕거렸다. 다른 열차의 쿠셋 칸과 붙은 것이다.
  그는 잠시 복도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열차가 굴속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안은 완전한 어둠이었다. 그가 네덜란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시체처럼 조용했다. 열차가 선로를 따라 움직이는 소음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 힘들었다. 도어락을 해제하고 문을 열어 비명을 질러대고 싶었다.
  넌 나의 자랑이야.
  이윽고 열차가 굴속으로 들어섰다.
  어둠이 객실 내에 짙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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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소설가를 꿈꾸고, 그러다 기자를 꿈꾸다가, 결국 대기업에 취업하고 이번에 졸업하는 사람입니다.

  설이라 고향에 내려와서 새벽에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글을 썼네요.

  익명이라 제 글에 대한 상황과 생각을 숨기지 않고 모두 얘기할 수 있는 점도 참 좋네요.

  사실 이 글은 제 이야기입니다. 괴물은 아버지고요(그렇게 부르기도 싫네요). 바람을 피웠고 집안을 풍비박산냈고 어머니에게 얼마 전에

폭력도 휘둘렀습니다. 그 때의 기억을 바탕으로, 제가 유럽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가다가 느낀 바를 엮어서 글로 만든 겁니다.

  결국 의절하고 이번에 어머니랑 드디어 이혼합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빨리 취업하게 되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글을 올리려고요 ㅎㅎ 틈틈이 써둔 단편이나 중편, 짤막한 글들 많이

보관하고 있어요. 뭔가 그러네요. 글이란 게 쓰고 나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소통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학우 분들께라도 보여드리고 싶네요.

  그냥 부담없이 읽어주세요. 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누군가에게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8:09: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