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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글 쓰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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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장님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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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증명사진 / 제4장 국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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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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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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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왼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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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젊은 문학도의 사회 & 제9장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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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우리들의 비겁한 영웅 & 제11장 크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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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 제13장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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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 제15장 금수 랩소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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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 문학청소년 - 제14장 혀에는 목


제 14장

혀에는 목



태운은 몸이 굳어버렸다. 선엽은 말을 계속했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너와 나는 무슨 갈등관계일까. 개인과 개인? 사회와 개인? 아니면, 개인과 벌레?”

“중찬은 어디에 있지?”

“중…. 중찬? 같은 반인 주제에, 2년 동, 동안 괴롭힘을 받은 학우의 존재를 깡그리 몰랐던 애? 도움을 요청해도 원, 원론적인 말만 반복했던 아이? 아까 말했지 않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아마 지금쯤 동훈을 만났겠군.” 선엽은 추위 때문인지 장난인지 말을 더듬었다.





“무섭게 하지 말고, 어디 있는지 알려줘. 동훈은 또 뭐야?”

“조용히 해! 너도 말 한마디 꺼낼 자격이 없어. 난 널 믿었다고!” 그는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싸늘히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선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식칼을 태운의 목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난 두렵지 않아. 내가 너에게도 도와달라고 말한 것을 알고 있었니? 하지만 넌 그 대신에 날 오히려 궁지로 몰아넣었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누명을 씌우고 의도적으로 날 고립시켰어. 그 덕분에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할 고통 속에서 지냈었다고!” 선엽이 토로했다.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어쩔 수가 없었다고? 넌 관심이 없었어. 넌 너만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바빴던 거야. 피터 팬만 쫓다가 현실은 외면해버린 거지. 네 인생의 책은 덮어버리고 다른 책을 썼던 거야.”

“그건 네가….”

“너는 병신만 왕따가 된다고 생각하니? 내가 병신이라고 생각하지?”

“그렇게 보지 않았어.” 태운은 식은땀을 흘리며 선엽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선엽은 태운의 말을 무시했다.





“너희들이 날 병신으로 본 덕택에 나도 나 자신을 병신으로 보기 시작했어. 몇몇 거울에서 자신이 뚱뚱하게 비춰지면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것처럼, 난 너희들이 나에게 대하는 행동들을 보며 ‘내가 못나서 그렇구나. 내가 소극적인데다 사교적이지 못해서 애들이 날 무시하구나.’라고 생각했었어.
그래서 억지로 사람들과 어울리는 연습을 했고 내 성격을 바꾸려고 노력했어. 자책도 많이 했었고.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퇴학과 다름없는 전학을 가게 되었어.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새 학교에서 또 왕따가 되어버렸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때 난 깨달았어. 나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니었어. 너희들, 거울이 잘못된 거였어. 비열한 것들이 내가 마치 정말로 죄를 저지른 못난 녀석처럼 보이게 했어. 죄책감과 자기혐오에 빠져들게 했고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하도록 막았어. 이젠 더 이상 왜곡된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 삐뚤어진 거울은 없어져야만 마땅해!” 선엽은 당장이라도 태운을 죽일 듯이 소리쳤다.

“누구 있어?” 그때 인기척과 함께 상수의 목소리가 저 뒤에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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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2화]









상수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상수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외침소리가 들렸던 곳을 찾았다. 순간 상수의 손전등이 태운과 선엽을 환하게 비추었다. 선엽이 눈이 부셔 잠시 주춤하는 사이 태운이 외쳤다.

“경찰에 신고해!”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차가운 쇠끝이 다시금 태운의 목에 닿았다. 칼이었다. 상수는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신고하러 가면 태운을 죽여 버리겠어. 못할 것 같아?” 다급해진 선엽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두 손을 들고 나에게 가까이로 와.” 상수는 순순히 선엽 앞에 섰다.

“선엽아….”

“이걸로 태운의 입을 막고 손을 묶어.” 선엽은 주머니에 있던 가죽끈을 상수에게 던졌다. 태운의 눈에는 긴장으로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만해 선엽아…. 이 정도면 됐어.” 상수가 울먹였다.

“당장 해라고!” 선엽이 몰아붙였다. 상수는 마지못해 재갈을 물리듯 태운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입 안에 가죽을 넣고 동여맸다. 그리고 남은 것으로는 태운의 손목을 묶었다. 선엽은 단단하게 묶었는지 재차 확인했다.

“넌 이런 아이가 아니잖아. 내가 알던 너의 모습은 어디 갔니? 대관절 이러는 이유가 뭐야?”

“몰라서 물어? 너희들은 나를 따돌리고 괴롭혔어.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날 전학시켜버리고 이 때문에 나를 걱정한 우리 엄마는 몸 저 누워버렸어!”





“하지만 태운은 널 괴롭히지 않았어. 나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우린 널 도와주려고 했어. 그런데 지금 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셈이니?”

“태운이 날 도와주려고 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얘는 나에게 누명을 씌우곤 자기 평판만 챙기려고 아무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어. 그게 네 눈에는 도와주려고 한 것으로 보이니? 그렇게 보여?”

“그럼 나는?” 상수의 반문에 선엽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 했다. 상수는 선엽이 괴롭힘을 받고 있을 때 나서서 말리곤 했었다. 선엽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그때가 생각났는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감정은 한층 더 고양되었고 태운은 이것이 좋지 않은 징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건…. 닥쳐!” 선엽은 혼란스러워졌는지 소리쳤다. 그의 손아귀에는 그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고 날카로운 식칼이 태운의 연약한 살을 갈랐다. 피가 흘러내렸다. 이를 본 상수는 겁을 먹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쪽지를 받아.” 선엽은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상수에게 던졌다.

“펼쳐서 읽어.” 상수는 꾸깃꾸깃 구겨진 쪽지를 펼쳐 손전등으로 빠르게 훑어봤다. 그러곤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선엽을 쳐다봤다.

“선엽아….”





“귀먹었어? 읽으라고!” 상수는 더 이상의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듯 했다. 그는 먹먹해진 목으로 쪽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심훈의 ‘그 날이 오면’이라는 시였다.

상수가 훌쩍거리며 시를 다 읽기가 무섭게 선엽은 상수의 등에 칼을 꽂았다. 상수는 제대로 된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쓰러져버렸다. 태운은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는 충격으로 온갖 목청을 다해 소리쳤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대신 두려움과 슬픔에서 비롯된 눈물만이 재갈을 흥건히 적셨다.








그날이 오면
-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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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3화]





충격을 받은 사람은 태운뿐만이 아니었다. 태운이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치는 동안 선엽은 얼이 빠져 있었다.

“내가 상수를, 죽였어. 절대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죽였어.” 쓰러진 상수의 복부 주위에는 붉은 피가 퍼져나갔다. 그것을 본 선엽은 악마에게 쫓기는 것처럼 태운을 수풀에 던져두고 쓰러진 상수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흐르는 피를 손바닥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죽여야만 했기에 죽인 거야.” 선엽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정의를 실현하려고 한 나를 막으려 했기에 죽인 거야. 그것은 운명이었어. 그건 대의를 위한 거였어. 가까이에서 본 정의와 멀리서 본 정의는 달라. 멀리서 볼 때, 내가 한 일은 옳은 것이었어.” 그는 자신이 상수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는지 계속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태운은 그의 되도 않는 합리화에 기가 찼다. 멀리서 온갖 욕설을 웅얼거리며 악쓰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태운의 입을 막았다. 태운은 겁에 질려 몸부림을 해댔지만 소용이 없었다. 태운의 입을 막은 자가 그에게 속삭였다.





“괜찮아.” 태운은 뒤를 돌아봤다. 준억이었다. 순간 안도감과 편안함으로 눈물이 차올랐다. 그것은 준억의 검지 위까지 적셨다. 준억은 태운의 손목에 묶인 가죽과 재갈을 풀어주었다.

“선엽이 애들을….”

“알아.” 준억은 태운에게 조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운은 딸꾹질을 끝낸 아이처럼 조용해졌다. 준억은 태운의 손을 이끌고 산기슭 밑으로 달려갔다. 태운은 계속 방금 전 있었던 일이 생각나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먼저 공중전화를 찾자.” 준억이 말했다. 산속에서 공중전화를 찾는 건 바늘 찾기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학교나 외부의 장소로 도망가기엔 거리가 멀어 불가능했다. 그들은 몇 분간을 나무를 헤집고 뛰어가다가 마침내 파란 공중전화부스 하나를 발견했다. 준억은 태운에게 안에 들어가 전화를 걸으라며 자기는 바깥에서 지키겠다고 말했다. 태운은 긴급전화 버튼을 누르고 112를 눌렀다.

“받아…. 받아라….” 몇 초 안 되는 그 시간조차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전화가 걸렸고 태운은 울먹거리며 상황과 주소를 알려주었다. 지금 당장 출동하겠다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다했어?” 준억이 나직이 말했다.

“응, 빨리 나가자.” 태운은 고개를 돌렸다. 선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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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14장 완결]





바닥엔 준억이 목 졸린 채로 기절한지 오래였다. 쓰러진 그는 평소와 달리 아주 왜소해보였다. 선엽은 태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희미하게 웃는 얼굴이 더욱 그를 두렵게 만들었다.

“제, 제발….”

“이게 네 구원자의 모습이야.” 선엽이 쓰러진 준억을 가리켰다.





“너와 나의 다른 점이 뭔지 알아? 넌 분명 거창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별거 아니야. 너에겐 준억과 같은 보호자가 있었다면, 나는 없었어. 그게 이 모든 것의 차이점이었지. 너는 힘든 일이 있으면 준억에게 기대면 끝났어. 그렇지만 나는 누구에게 기대야 하지? 넌 나의 구원자가 될 수 있었어. 나에게 다가와 약해빠진 나를 구해줄 수 있었어!

네가 그토록 찬양한 데미안의 싱클레어처럼, 데미안에게 받은 보호를 다른 이에게 베풀 수 있었어! 하지만 넌 대신 데미안의 품속에 더 들어갔어. 넌 더 이상 보호를 필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나약함을 핑계로 나를 내버렸어! 이게 너와 나의 차이점이야. 나에게도 구원자가 있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그렇지만 이제 너와 나는 같은 처지에 처해졌군.

더 이상 세상에는 너의 구원자가 존재하지 않아! 준억은 힘없이 쓰러졌으니까! 너는 나와 같은 전철을 밟게 될 거야. 나약한 채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거야!”



“난 너의 구원자가 아니야!” 태운이 울부짖듯 소리쳤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해? 구원자는 거창한 게 아니야. 여기 쓰러져 죽은 준억을 봐. 그는 힘없이 쓰러졌어. 나에게 제대로 된 반항도 한 번 하지 못했지. 얼마나 약한 존재니? 얘는 데미안처럼 강하지 않아. 그런데도 구원자가 되었지. 너도 충분히 가능했었다고! 네가 죄책감을 마주하기 싫다는 핑계로 나를 피하지 않고 반대로 다가왔더라면 넌 나의 구원자가 쉽게 될 수 있었어!”

“몰랐어…. 미안해…. 하지만 우리를 죽일 필요는 없잖아. 도대체 왜….”





“왜 그러냐고? 동훈과 너희들을 심판하기 위해서지. 넌 소설을 좋아하니까 이해할 거야.” 선엽은 준억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태운에게 말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를 내내 괴롭히던 질문이 있었지. 같은 살인을 저질러도 누군가는 초인이 되어 영웅이라 칭송받는 한편, 누군가는 세상의 지탄을 받으며 범죄자로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마침내 그는 정의 앞에서는 살인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보통사람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대의를 가진 비범한 이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을 알게 된 거야. 시대적 상황이 독립투사를 영웅으로 만든 것처럼 나도 후세에는 영웅으로 기록될 거야.”





“넌 절대 아니야!” 태운은 문화적 망상에 빠져 자신을 영웅처럼 생각하는 선엽에게 역겨움을 느꼈다.

“이거나 읽어.” 선엽은 태운에게 작은 종이를 던졌다. 그 종이에는 이육사의 ‘광야’가 적혀 있었다. 태운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만….”





“읽어!” 태운은 울먹이며 시를 읽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겁에 지른 태운의 목소리 뒤로 구급차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하지만 태운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이윽고 마지막 문장만이 남겨졌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태운은 낭송을 끝내고 눈을 질근 감았다. 그의 예상대로 날카로운 쇠가 목 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든 신경이 차가운 쇠를 감싸는 것과 동시에 터져버렸다.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새벽이 다가와서 그런 것인지 죽음에 가까워져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태운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을 확인한 선엽은 칼을 다시 뽑아냈다. 그 뒤로 사이렌 소리가 귀청이 터지도록 울려댔다. 그러나 선엽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원수의 피가 묻은 칼로 자신의 심장을 조준하곤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선엽이 자살하기 전의 마지막 숨이었다.



광야(廣野)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 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서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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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 문학청소년 - 제15장 금수 랩소디 (완결)


제 15장

금수 랩소디



태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주위에 있던 애들이 그 옆으로 모여들었다.

“괜찮은 걸까?” 상수가 물었다.

“괜찮을 거야.” 준억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운이 반사적으로 눈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너희들…. 아니 동훈아?” 태운이 준억, 상수 뒤에 있는 동훈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그는 멀쩡히 방의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누더기 옷을 입고 있었다.





“꿈을 꿨던 거야?” 태운은 안도한 목소리로 물었다. 산 속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위를 봐.” 준억이 씁쓸하게 말했다. 하늘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핏덩어리 천장이 보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들을 에워싼 벽에는 검은 피딱지들이 여기저기 붙여져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내 추측엔 저승 따위의 공간 같아.” 준억이 무기력하게 말했다. 태운은 비로소 방을 둘러보았다. 쇠창살이 있었고 바닥은 끈적끈적한 가래와 피 같은 것들로 여기저기 덮어져 있었다.

“이곳이 저승이라고?” 태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저승은 이보단 스케일이 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뭐, 이게 전부는 아니고 단지 저승의 수많은 감옥 중 하나인 것 같아.” 상수가 말했다.





“자꾸 저승, 저승 그럴래? 헛소리 좀 그만 하라고!” 또 다른 구석에 박혀있던 중찬이 소리쳤다.

“이건 꿈이고 환상일 뿐이라고. 적어도 난 그렇게 믿고 싶어.” 중찬이 말했다.

“잠깐, 잠깐만, 우리가 감옥에 있다고? 도대체 왜? 우리가 뭘 잘못했기에 갇혀있어? 이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꿈이라고!” 중찬이 소리쳤다. 옆에서 상수가 그를 달래려 했지만 중찬은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세게 팔을 휘두른 탓에 중찬이 입고 있던 누더기 옷의 겨드랑이 부분이 약간 찢어졌다. 준억이 중찬을 걱정스레 보다가 태운에게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우린 죽었고, 강을 건너서 이곳에 감금되었어. 죽음의 문턱을 넘겼지. 어쩔 수 없는 순리를 따른….”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중찬이 부정했다.

“이곳에 도착하자 키가 2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악마들이 흉기를 들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그들은 우리의 발에 쇠사슬을 묶었고 여기로 다짜고짜 집어넣었어.” 준억이 자신의 발에 묶여져 있는 쇠사슬을 보여주었다. 그의 말대로 태운의 발에도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포로, 증인들이라고 불렀어.” 준억이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조금 있으면 우리가 겪었던 사건에 대한 재판이 있을 거라는 거지.” 가만히 듣고 있던 동훈이 끼어들었다.





“그 새끼가…. 우릴 죽인 것에 대한 심판을 받을 거라고. 두고 봐. 꼭 지옥에 보내고 말테야.” 동훈이 이를 갈았다.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날카로운 소리가 감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게 정말 꿈일 수도 있어.” 준억의 담담한 말에 중찬이 소리쳤다.

“맞아. 이건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그렇지만 꿈과 현실은 떼려야 뗄 수 없지. 아무리 비현실적이라도, 의미가 없다는 소리는 아니야.” 태운은 예전에 준억이 말한 것을 떠올리고 중얼거렸다.

“그래 맞아. 이게 설사 꿈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느끼는 너의 감정은 진실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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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2화]









“쉿.” 동훈이 그들에게 조용해라는 신호를 보냈다. 또각또각 말굽 소리가 복도에 울렸고 그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커다란 몸집의 악마가 쇠창살 뒤에 서 있었다. 머리 위의 큰 뿔과 온 살가죽이 벗겨져 피가 뚝뚝 떨어지는 모습은 혐오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악마는 종이 쪼가리들을 그들에게 집어던졌다.

“여기에 각자 자신의 죄, 삶을 평가해서 적어라. 이것이 너희들의 진술서가 될 것이다.” 악마의 목소리는 크고 묵직했으며 단 번에 듣는 이를 사로잡는 위엄이 있었다.

“언제 나갈 수 있는 거죠?” 동훈이 겁을 먹은 채 물었다.





“때가 되면 부를 거다. 그때까지 기다려라.” 악마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게…. 저게 악마란 말이야?” 태운이 물었다.

“정말 우린 죽은 게 맞나봐.” 중찬이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수는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다른 애들이 악마에 대해 한마디씩 하며 웅성댔지만 상수만은 우울한 표정으로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이승에서 안 해본 게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일찍 죽다니…. 정말 세상은 불공평한 것 같군.” 동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다 너 때문이잖아!” 상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동훈에게 소리쳤다.

“네가 없었더라면 선엽은 따돌림을 당하지 않았을 거고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그래? 이게 나 때문이라고?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너희들은 그런 나를 말렸니? 오히려 즐겼던 건 바로 너희들이야.”

“뭐?”

“그래. 며칠 전 난 선생님이 빼앗았던 태운의 연습장을 몰래 봤어. 정말 가관이더군. 태운은 선엽이 따돌림을 당하는 것을 자신의 이야기 소재로 사용하고 있었어. 안타깝니 어쩌니 하면서도 선엽을 이야깃거리 그 이상으로 보지 않더군!”

“그건 내가 죄책감 때문에 적었던 거야!”





“그래, 네가 예전에 우리들 앞에서 발표했던 생명의 은인을 매몰차게 버린 이야기처럼 말이야. 모르겠어? 넌 시체를 맴도는 독수리처럼 이용할 스토리만을 찾아다니는 거야. 네 하찮은 글 솜씨로는 이야기를 완전히 만들 능력이 되지 않으니 주위에 사건이 터지길 바라며 그걸 바로잡으려는 노력 대신 지켜보고만 있는 거야. 어쭙잖은 트루먼 카포티 흉내를 내는 거지.”

동훈은 태운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의 충격에 순간 선엽에게 찔렸던 성대 쪽이 다시 찌릿찌릿 아파왔다. 동훈이 진실을 말해서 그런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써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모든 이들이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만 같았고 필시 그들의 눈에는 자신이 또 다른 악마로 보일 거라는 망상이 그를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넌 잘못 생각하고 있어.”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준억이 말했다.

“태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네 괴롭힘을 합리화하려 하기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우선 태운은 네가 아니라도 다른 이야기를 썼을 거야. 왜냐하면 태운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고민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는 섬세한 아이거든. 네가 태운에게 이야깃거리를, 그것도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제공해주었다고 우쭐해할 필요가 없어.

두 번째로 태운은 독수리처럼 야수가 먹잇감을 사냥하는 걸 지켜보기만 하지 않았어. 태운은 정말로 괴로워했었고 그것을 막으려고 노력했어. 네 협박에도 불구하고 선엽의 누명을 벗겨준 사람이 태운이었고, 선생님에게 말한 사람도 태운이었어. 마지막으로 넌 태운이 글을 쓰는 걸 도와주기는커녕 방해하기만 했었잖아. 넌 태운에게 방해해놓고 오히려 동기를 부여해줬다고 생색낼 참이야?”

준억의 말에 동훈은 우물쭈물하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또 다시 정적이 흘렀고 그들은 각자 자신의 진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태운은 진술서를 쓰는 것이 마치 투고문을 쓰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는 착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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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3화]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와.” 진술서를 다 작성하기가 무섭게 철컥하며 쇠창살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붉은 창을 든 악마 두 마리가 감옥의 입구를 지키며 험상궂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악마들은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하나씩 들고 죄수들을 하나 둘 끌고 갔다.

그들은 어둡고 긴 복도를 지나 핏덩이로 가득한 커다란 방에 도착했다. 그 방의 입구에는 ‘지옥은 느끼는 자에겐 비극이지만, 생각하는 자에겐 희극이다.’라고 적혀져 있었다.





“연옥 법정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를 데리고 온 악마가 말했다. 그들은 악마의 지시에 따라 재판 뒷좌석에 위치한 증인석으로 갔다. 그러곤 각자의 이름이 써진 철 가시 의자에 앉았다. 가시도 아팠지만 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악마들이 하나 둘씩 법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왼쪽 계단 위에는 합창단 옷을 입고 오는 악마들이 올라갔고, 오른쪽 계단 위에는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를 들고 오는 악마들, 그리고 채찍으로 된 지휘봉을 들고 오는 악마들이 순서대로 올라갔다.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법정은 어느새 북새통을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하얀 장갑을 낀 악마가 피아노 앞에 앉자, 비로소 법정의 시작을 알리는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전율이 흐르는 그로테스크한 음악 속에서 먼저 서기 악마가 입장하였고 그 뒤로 불길한 까마귀의 얼굴을 한 검사 악마, 커다란 후드를 쓴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여변호사 악마, 마지막으로 역시나 얼굴을 볼 수 없는 법관이 차례로 입장하였다. 법관이 재판관의 자리에 앉는 동안 까마귀 검사 악마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살피며 기소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관 옆에 선 수행원이 법원을 향해 소리쳤다. 뒤에서 철커덕하고 감옥이 열렸다. 법원 안에 있던 모든 이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선엽이 만신창이가 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변호사 악마가 두 마리의 악마에 에워싸인 범인을 끌고 재판에 오자 순간 구경하던 방청객, 배심원 악마들이 일제히 일어나 그에게 돌과 핏덩어리를 던지며 야유를 하기 시작했다. 동훈도 그의 모습을 보고 참을 수 없었는지 가시 의자에서 일어나 선엽을 향해 침과 가래를 뱉으며 바닥에 떨어진 핏덩어리를 주워 던졌다. 상수가 동훈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용해라!” 재판관이 아수라장이 된 법정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천둥과 같은 목소리에 법정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지휘자는 악마들을 향해 지휘채찍을 휘둘렀고 그에 맞추어 다시 음악이 재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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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4화]









“먼저 이번 재판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까마귀 검사는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는 대신에 까악까악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피고는 5명의 무고한 인간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재판관님, 저는 이 피고에게 최고형벌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검사의 말에 방청객석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그리고 그 증인으로 5명의 피해자를 증언대에 올릴 것을 요구합니다.” 재판관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검사는 태운을 비롯한 학생들을 끌어내어 증언대에 올렸다.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악?” 검사는 참을 수 없었다는 듯이 한 번 더 까악까악거렸다. 태운은 그의 목소리가 거슬렸지만 말을 꺼냈다.

“그날 밤, 우린 학교에서 나와 산 속에 있는 빈 사찰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악?”

“준억과 상수는 물을 뜨러 잠시 자리를 떴었고 중찬은 따라온 동훈을 찾으러 산 속으로 들어가고 저 혼자 절에서 누워있었습니다. 그때, 선엽이 저에게 왔습니다.” 태운의 증언에 연주자들이 날카로운 바이올린을 키기 시작했다.

“그가 당신에게 뭐라고 했죠?”

“중찬이 죽었다고 말했어요.” 태운은 고개를 돌려 중찬의 얼굴을 바라봤다. 중찬은 그 순간이 떠올랐는지 몸서리치며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그리고…. 제가 보는 앞에서….” 태운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상수를 무참하게 죽였어요!” 동훈이 법정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악마들을 향해 대신 소리쳤다.

“선엽은 저와 중찬을 칼로 찔러 죽였고 그걸로 분이 다 차지 않았는지 마찬가지의 수법으로 상수를 죽였어요. 그 다음엔 준억과 태운을 차례로 죽였고요. 칼을 든 선엽 앞에서는 우리 모두 피해자였을 뿐이었어요.” 동훈의 말에 객석이 다시 한 번 웅성거렸다.

“이상입니다.” 검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말하곤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번에는 변호사가 일어나 그들 앞에 섰다.

“피고가 그렇게 행동한 데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들 대답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았다. 동훈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대표로 나서서 말했다.





“없어요. 선엽에게 장난을 치고 약간 괴롭히긴 했지만…. 사람을 죽일 만큼 괴롭히진 않았어요! 우리는 순전히 피해자일 뿐입니다.” 동훈이 대답했다. 여변호사는 그들을 잠시 쳐다보더니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상수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입니까?” 변호사의 물음에 상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충격과 슬픔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순간 다그치면서도 걱정스러운 빛이 그녀의 눈초리에서 느껴졌다.

“어쩔 수 없군요. 재판관님, 피고 측의 증인으로 피고 자신을 증언대에 올릴 것을 요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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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5화]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에 무섭게 우리는 증언대에서 내려 다시 철 가시 의자에 앉았고 이번에는 선엽이 증언대 위로 올라갔다. 선엽은 온갖 야유를 받으며 뚜벅뚜벅 증언대에 섰다.

“당신이 살인을 저지른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변호사가 심문했다.

“전 불쌍한 아이일 뿐이에요.”

“네?”

“동정은 필요 없어요. 제가 쟤네들을 죽인 게 맞으니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요.”

선엽은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태운은 그런 그가 안타까웠지만 동시에 왠지 모를 안도감도 느껴졌다. 변호사는 돌발적인 증언에 당황하여 중간에 말을 잘라버렸다. 그녀가 선엽의 말에 끼어들자 객석에서 야유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저들은 당신을 괴롭혔어요. 그래서 당신은 견딜 수가 없었던 거죠. 비극으로 몰고 간 것에는 저들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선엽은 대답하지 않았고 보다 못한 재판관이 한마디 했다.

“세상은 적자생존이다. 괴롭힘을 견디지 못한 피고 측에 잘못이 더 크다.” 재판관이 선엽을 꾸짖었다. 누가 봐도 변호측이 밀리는 상황이었다.

“재판관님, 피고도 벌 받기를 원하는데 왜 우리가 그를 살려주어야 합니까-악?” 검사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재판관에게 호소했다. 재판관은 검사의 말에 마음이 흔들린 듯 했다. 그때 변호사 쪽으로 다른 악마가 오더니 변호사에게 귀띔을 했다. 변호사의 표정은 순식간에 어두워졌지만 다시 표정을 감추고 말했다.





“재판관님, 새로운 증인을 법정에 세우고 싶습니다.”

“변호인은 왜 예정에 없던 증인을 느닷없이 세우는 건가?” 재판관이 물었다.

“방금 배를 타고 온 증인입니다. 이 사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증인이오니 한 번만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변호사의 말에 재판관은 검사를 쳐다봤다. 검사는 기세등등하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좋다. 5분간의 휴식을 갖고 새로운 증인을 받겠다. 휴정.” 나무망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재판관이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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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6화]









“태운아, 살려준다는 말이 뭘 의미하는 거야? 우린 이미 죽었잖아.” 상수가 물었다.

“이 재판으로 판단컨대, 우린 아직 완전히 죽은 게 아니야.” 준억이 속삭였다.

“이 재판의 결과로 우리가 죽거나 사는 것이 진짜로 결정될 거야.” 15분의 휴식이 끝나고, 재판관이 속개를 알리는 의미로 망치를 두드렸다. 그 망치 소리와 함께 변호사가 법정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 뒤로 법정 문을 여는 여자가 있었다. 선엽의 어머니였다. 선엽은 그 모습을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선엽의 어머니는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선엽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비쩍 마른 여인은 선엽을 보며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변호사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재판관에게 말했다.

“재판관님, 이 여성을 증인으로 요청하겠습니다. 선엽이 따돌림 당했다는 것을 증언할 겁니다.”

“엄마, 여긴 왜 왔어?” 선엽은 말하다 말고 증인석에 앉은 동훈을 보고 소리쳤다.

“네가 우리 엄마를 죽였지? 왜 우리 엄마가 여기에 있는 거야!”

“아니야, 선엽아. 엄만 우리 아들 따라왔어.” 여인은 증언대에 서 있는 선엽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응?”

“네가 사람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어. 그 소식을 듣고 어떻게 살겠니. 피해자들의 가족 분들에게도 면목이 없고 무엇보다 너에게 죄책감이 들었어. 많이 신경 못 써줘서 미안하다.”

“하지만…. 어차피 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엄마가 와도 어찌할 방안이 없어. 도대체 왜 왔어. 돌아가!” 선엽은 감정이 북받쳐 소리쳤다. 하지만 선엽의 어머니는 그의 뿌리치는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그래도 함께 있잖아.” 그녀가 선엽을 위로했다. 변호사는 선엽의 어머니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선엽은 변호사 옆에서 겨우 부축한 채 걸어가고 있는 그녀에게 호소했다.





“엄마, 내 인생은 방금 시작했을 뿐인데, 난 그걸 버렸어. 내가 이 재판에서 져서 지옥 불에 수천만 년 불태워지더라도, 엄마만큼은 현실세계로 돌아가야 해. 그렇게 내가 만들 거야. 엄만 되돌아가서 어떤 일도 없었던 듯이 살아가야 해. 엄마는 아무 잘못 없잖아?” 선엽의 외침에 그의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죄인이란다.”

“아니 왜?” 선엽이 울부짖은 채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선엽의 말을 애써 무시하고는 몸을 돌려 이 재판을 지켜보는 배심원들과 관중들에게 호소했다.

“여러분, 저 또한 생명을 죽였습니다. 제 자신의 생명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니 돌아가!”

“그녀의 말이 맞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까마귀 검사가 말했다. 그는 선엽의 앞으로 다가갔다.

“자살도 살인이야. 이곳 악마들은 인간의 아들이 될, 손자가 될 생명들로 다시 환생하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은 이들이 아예 나가지 못하게 한 거야.” 검사는 선엽에게 성난 관중들을 가리켰다. 태운은 그제야 왜 이 재판이 악마들의 관심을 끄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생명이 이 기나긴 기다림 끝에 나온 것임을 망각한 채 버린 것에 대한 생명모독죄도 자살 죄에 포함되지. 그것이 당신의 어머니가 유죄인 까닭이다-악. 그리고 네 같은 경우엔 부모를 버리고….” 검사는 신나서 이리저리 막 떠들어댔다. 아무도 그의 말에 반박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변호사조차도 안타깝게 죄를 저지른 모자를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그만하면 됐다!” 이 드라마를 보다 못한 재판관 악마는 천둥과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유 따윈 상관없다. 죽어 마땅하나 살아있는 자 많고 살아 마땅하나 죽음을 맞는 자 많다. 이번 재판의 심판을 내리겠다. 박선엽과 그의 어머니는 유죄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이들의 손가락, 발가락부터 시작하여 팔, 다리, 끝에는 목을 쳐내라. 의식이 끝나면 영혼을 지옥에 보낸다.” 재판관은 망치를 세 번 거세게 두드렸다. 여기저기서 기뻐하는 악마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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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7화]









선엽이 괴로움에 사로잡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소름이 그의 등줄기를 따라 올라왔다. 그물에 갇힌 야수처럼 이리저리 반항해보았지만 악마들의 괴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곧 포박을 당했다.

“엄마….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아. 차라리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선엽의 말에 그의 어머니는 눈물만 부질없이 흘렀다. 법정의 문이 열리고 칼을 차고 온 광대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광대는 웃고 있는 가면을 쓴 채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스카라무쉬, 스카라무쉬!” 주위에서 그 광대를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카라무쉬는 모자 주위를 돌면서 위협을 가했다. 모자는 잔뜩 움츠러들어서는 눈을 질끈 감고 있을 뿐이었다. 스카라무쉬가 추는 판당고 춤은 아주 우스꽝스러웠지만 동시에 섬뜩했다. 그는 예전에 선엽이 나무에 흠집을 냈을 때처럼 주변의 기둥에 흠집을 냈다. 스카라무쉬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래가 끝날 때쯤 스카라무쉬는 씨익 웃더니 순간 힘껏 선엽의 목을 향해 내쳤다.





“안 돼!” 태운이 소리쳤다. 태운의 외침에 선엽은 깜짝 놀라서 목에 힘이 들어갔다. 칼은 선엽의 목을 베지 못하고 중간에 박혀버렸다. 살점만 조금 떨어졌을 뿐 선엽은 살아있었다. 당황한 스카라무쉬는 칼을 빼고 다시 휘두르려 했지만 그 짧은 찰나를 틈타 천둥이 치고 번개가 떨어졌다. 날카로운 번개는 온 법정을 번쩍하고 비추었고 어둠 속에서만 지켜보던 재판관 악마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는 계속하여 번개를 선엽 주변으로 떨어뜨렸다. 스카라무쉬의 춤 대신 번개춤이 모자를 맴돌기 시작했다.





“나, 바알세불의 심판을 방해한 놈은 누구지?” 재판관 악마는 후드를 벗고는 우레 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법원을 울렸다. 악마들은 저마다 귀를 막고 무릎을 꿇었다. 태운은 자신을 바알세불이라고 부르는 재판관의 얼굴을 똑똑히 쳐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선을 심판하는 악으로 선악이 섞여 있는 아브라삭스임을 선험적으로 깨달았다. 책으로만 보았던 그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자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태운은 무엇에 홀린 듯 일어나 재판관 앞에 섰다. 바알세불은 그를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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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8화]









“네가 방해했는가.”

“선처를 베풀어주세요.”

“뭐라?” 그가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최소한 그의 어머니는 벌하지 말아주세요.” 바알세불은 태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태운은 학기 초 준억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자신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본 것을 기억해냈다. 간파당하는 느낌과 함께 특별한 자신의 존재를 다른 이에게 알리는 그 특유의 느낌은 준억과 눈을 마주쳤을 때와 꼭 같았다. 바알세불은 태운에게서 선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엽 또한 자기와 자신의 어머니에게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달라며 울고 있었다.





“그래?” 바알세불이 눈알을 돌리더니 저 뒤에 있던 증인석으로 시선을 꽂아 내렸다. 그곳에는 준억과 상수, 중찬, 그리고 동훈이 있었다.

“이거 정말 흥미롭군. 선엽은 네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어볼까?” 바알세불은 호탕하게 웃고는 정신적인 충격을 먹은 채 울고 있는 선엽의 얼굴을 강제로 들게 했다.

“태운의 말이 맞아요.” 그가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 목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저는 억울합니다. 저 혼자 벌을 받기에는 너무 억울하단 말이에요!”

“어째서지?” 재판관이 즐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저들에게도 잘못이 있습니다. 저들도 나와 같은 살인자에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재판관은 마치 선엽이 말할 모든 대답을 다 꿰뚫고 있는 듯 했다. 태운 또한 선엽의 대답을 예측할 수 있었다. 선엽의 모든 말은 하나의 요구로 모여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에게 공평한 지옥을 주시옵소서.”

선엽의 말 한마디에 쥐 죽듯 조용했던 법원이 다시 떠나가듯 시끄러워졌다. 이를 들은 악마들은 환영하며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변호사 악마가 뒤에서 그래선 안 된다고 소리쳤지만 역부족이었다. 관중들은 그들을 보낼 수 없다고 소리치며 변호사 악마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저들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맞아, 꼭 칼로만 죽인 것이 살인이 아니야!” 변호사는 계속해서 항변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재판의 열기에 묻혀버렸다.

“어때 선엽의 대답을 들은 기분이? 너희들은 그럼에도 선엽의 선처를 주장할건가?” 바알세불은 만족스럽게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태운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실제로 그들은 선엽의 말대로 순수한 피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양면의 동전처럼 피해자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으며 가해자로서의 모습도 지니고 있었다. 이 재판 속에서, 선엽을 비롯한 그들 모두는 가해자이며 피해자였다. 태운은 답을 찾기 위해 준억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우리가 선엽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선엽이 우리를 죽일 권리는 없었습니다.” 준억이 말했다.





“뭐? 우린 선엽을 죽이지 않았어!” 동훈이 준억의 말을 듣고는 화가 나 소리쳤다.

“그건 쓸데없는 죄책감일 뿐이야. 왜 우리도 같이 벌을 받아야 하지? 그냥 선엽 혼자 불지옥에서 썩어 문드러져라 말이야!” 동훈의 말에 온갖 곳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악마들은 이번엔 동훈에게 핏덩어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악마들의 감정표현은 거칠어졌다.

“조용!” 바알세불이 다시 한 번 고함을 질렀다. 그는 5명의 증인에게 찬찬히 다가와 얼굴을 뜯어 살펴보기 시작했다. 바알세불은 그들의 코앞에 있었다. 옆의 졸개악마들이 창을 든 채 고기를 쳐다보듯 침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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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9화]









“….” 바알세불이 그들의 이마를 하나씩 살폈다.

“너희들은 유예다.”

“아니 왜죠?” 선엽이 뒤에서 소리쳤다.

“명이 되지 않았어. 아직은….” 바알세불은 준억의 이마를 응시하며 말을 마쳤다. 준억은 바알세불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는지 이마를 문질렀다. 바알세불의 말에 악마들은 찍소리하지 못하고 그들을 노려봤다. 죽이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나중에 다시 보자는 벼름이 반반쯤 섞인 눈동자들이었다.





바알세불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부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바로 위에서 매달린 채 곤히 자고 있었던 날개달린 악마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선엽과 그의 어머니 주위로 몰려들었다. 날개달린 악마들은 발톱으로 그들을 들어 올렸고 천장에 달려있는 새장에 던져 넣었다.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새장이 잠겼다.

날개달린 악마들이 휘파람을 부르면서 새장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였다. 휘파람의 소리를 듣고 거꾸로 매달린 채 천장을 걷는 커다란 괴물이 모습을 점차 드러냈다. 그것은 아주 큰 거미였다. 거미는 괴성을 한 번 지르더니 새장을 향해 다가갔다. 그제야 태운은 천장이 무엇으로 이루어져있는지 알 수 있었다. 천장은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새장은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먹잇감처럼 보였다. 거미는 실을 뿜으며 새장을 감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엽은 지지 않고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네들은 왜 풀려나는 거야. 너희들 때문에 내가 여기에 갇힌 거라고! 내 인생 돌려내. 이 새끼들아.” 그는 온갖 발악을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너희들을 죽인 또 다른 이유를 가르쳐 줄까? 관심 받기 위해서였어. 널 죽이게 된다면, 나는 네 인생을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겠지! 생각해봐. 너의 인생에 있어 먼지보다 못했던 나의 존재가 이 행동 하나만으로 네 부모와 동등하게 중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 네 이름을 말할 때면 생명을 불어넣은 부모의 이름과 함께 생명을 빼앗아간 내 이름도 빠지지 않겠지.”

“헛소리하지 마!” 동훈이 선엽을 향해 외쳤다.





“선엽의 말은 뒤로 하고 너희들은 현세로 돌아가.” 변호사 악마가 씩씩거리는 동훈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그들은 선엽의 신음소리와 욕설을 애써 무시한 채 변호사를 따라 법정 바로 앞에 있는 죽음의 강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선엽은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오히려 어느새 앙상해져버린 오른손으로 준억을 가리키고 외쳤다.

“너는 이 모든 것을 막을 능력이 있었어. 하지만 왜 막지 않았지?” 선엽이 저주하며 반드시 환생해서 복수하겠다고 소리쳤다. 태운은 거미줄에 감겨가는 선엽을 바라보며 마음이 아팠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동훈아, 빨리 타.” 중찬은 더 이상 괴로워하는 선엽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는지 동훈에게 재촉했다. 동훈만이 육지에 남아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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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10화]









“뭐하는 거죠? 재판관님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가세요. 당신을 놔두고 배가 먼저 출발할지도 몰라요. 이 배에는 한 번 노를 저으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마법이 걸려있어요.” 배 앞으로 그들을 안내해준 변호사 악마가 말했다. 그녀의 뒤에는 여전히 수많은 악마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너 자신을 합리화하지 말란 말이야!” 동훈이 울먹인 채 이제는 조용해진 선엽을 향해 소리쳤다.

“관심을 받으려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살인했다는 건 정말 헛소리라고!” 동훈은 허공에 다시 한 번 소리쳤다.

동훈은 배를 타지 않고 선엽이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중찬이 그를 막기 위해 붙잡았지만 동훈은 필사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이거 놔! 해야 할 것이 있어.” 동훈은 바알세불에게 다가갔다.





“동훈아!” 태운이 동훈을 크게 불렀다. 준억도 배에서 내려 그를 쫓아갔다.

“재판관님, 제 생명을 선엽 어머니의 생명과 맞바꾸고 싶습니다.” 동훈은 가쁜 숨소리를 거칠게 뱉어내며 말했다. 준억이 동훈을 뒤따라 잡았을 때는 이미 동훈이 말을 꺼낸 뒤였다. 준억은 동훈의 갑작스런 행동에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네가 원하는 게 이거야?”

“응. 나도 누군가의 인생을 설명하는데 있어 빼먹을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군가의 생명을 구해준, 그런 의미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나는…. 사람을 죽인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 준억은 더 이상 동훈을 붙잡지 못했다. 그는 한 발치 물러나 바알세불의 대답을 기다렸다. 바알세불이 동훈에게 다가가 이마를 유심히 살펴봤다. 바알세불은 무덤덤하게 동훈에게 남은 생애의 날짜를 계산하더니 말했다.





“좋다. 그녀를 풀어주어라.” 바알세불의 승낙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날개달린 악마들이 선엽의 어머니를 떨어뜨리고 대신 동훈에게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본 태운이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동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준억은 만신창이가 된 선엽의 어머니를 끌고 배에 태웠다. 변호사 악마가 그녀를 옮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준억! 넌 왜 동훈을 말리지 않은 거야. 응? 도대체 왜!” 태운이 준억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더 이상 울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었어.” 준억이 말했다.





“문맹이었던 동훈은 글을 깨우치고 나서야 자기가 한 짓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것을 안 거야. 그런 그에게 마지막 속죄할 기회까지 빼앗을 순 없었어. 나는…. 그럴 힘이 없었어.”
준억은 태운에게 이 말을 남기고는 배의 노를 잡았다. 중찬과 상수도 준억을 따라 각자 노를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아주 천천히, 하지만 거센 물살을 헤치며 현세를 향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변호사 악마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상수는 그녀의 작별인사에 회답을 해주었다. 그러자 변호사 악마가 후드를 벗었다. 한 여성이 상수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상수야, 잘 지내. 네가 준 증명사진, 언제나 가지고 있을게.” 상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누군지 깨달았다.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던 변호사는 바로 상수의 어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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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 금수 랩소디 [최종회]









“어…? 엄마!” 상수는 배에서 내리려고 노를 놓았다. 하지만 배는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 상수는 강으로 뛰어내려고 했지만 태운이 그를 붙잡았다.

“이거 놔! 난 엄마랑 같이 있을 거야. 함께…. 있을 거라고!” 오열하던 상수는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태운은 그의 몸을 놓지 않았다. 건너편 육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져갔다.

“네 어머니는 네가 살아남길 바라셨어. 그래서 네가 배를 타기 직전까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던 거야.” 중찬이 상수를 위로해주었다. 상수는 더 이상 몸부림을 치지 않았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때야.” 준억이 말했다. 죽음의 강을 지나면서 계속 선엽의 구슬픈 노랫가락이 들렸다. 그리고 그 노랫가락은 희미한 안개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네 명의 아이들 얼굴에는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죽음의 강 너머로 시원한 생기의 자연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안개를 조금씩 걷으며 동시에 아이들을 한 명씩 데려갔다. 모두 다 사라지고 태운 혼자 남았을 때, 그는 계속해서 젓고 있었던 노를 잠시 놓았다. 그의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얼굴을 타 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갔다. 그렇게 태운도 사라졌다. 강물에는 오직 빈 배만이 남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태운은 눈이 부셔오는 것을 느꼈다.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훑어갔다. 눈을 조금씩 펼칠 때마다 강한 빛 사이로 색깔이 하나씩 늘어났다.

“태운아, 괜찮니?” 태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머리맡에는 선풍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있었다. 그토록 기다렸던 남자애가 환한 햇빛을 뒤로한 채 창가에 서 있었다.

“식은 땀 좀 봐. 내가 누군지 알겠니?” 그는 태운의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 그는 병실에 누워있었다. 커다란 창문이 침대 옆에 달려있는 방이었다.

“오늘도 널 기다리고 있었어.”





“‘오늘도’라니?”

“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동안, 너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어.” 그제야 태운은 방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곳을 기억해냈다. 죽음의 강을 너머선 곳에서 있었던 일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산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도….

“무서운 꿈을 꿨어. 다른 애들은 괜찮아?” 태운의 말에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동훈은 견디지 못했지?” 그가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태운은 몸을 그에게서 돌렸다.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피터 팬이 데려간 거야.” 태운이 목을 꾹꾹 누르며 중얼거렸다.

“뭐라고?”

“내가 봤어. 동훈은 네버랜드로 떠나갔어.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책임지지 않는 그곳으로.”

“그리고 나쁜 소식이 하나 더 있어.”

“뭔데?”





“이번 일로 담임선생님이 잘리고 문호 선생님이 복귀했어. 문학회도 물론 되돌아왔고.”

“그게 왜 나쁜 일이야?”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 부모님을 데려올까? 대기실에서 잠시 주무시고 계셔.” 그가 태운에게 말했다.

“조금 있다가. 괜찮다면 잠깐 글을 쓸 수 있을까?”





“물론이지.” 그는 태운에게 연습장을 건네주었다. 모닝 페이지를 쓰던 연습장이었다. 절에서 쓴 것 뒤부턴 아무 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태운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며 꿈과 산 속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히 적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태운은 이것이 동훈과 선엽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더 이상 나약한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는 것도 예감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 아직 봄이었다.







* ‘문학 청소년 - 혼란스러운 여름’에서 계속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