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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글 쓰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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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장님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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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증명사진 / 제4장 국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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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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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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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왼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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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젊은 문학도의 사회 & 제9장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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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우리들의 비겁한 영웅 & 제11장 크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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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 제13장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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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 제15장 금수 랩소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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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 문학청소년 - 제12장 칼을 찬 교사

제 12장

칼을 찬 교사


짧다면 짧은 정학기간이 끝나고, 태운은 벽산고에 등교했다. 이미 같이 정학을 당했던 동훈은 뒷자리에 앉아 제멋대로 떠들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태운이 준억에게 말했다.

“그래.” 준억의 대답에 옆에 있던 상수가 자리를 떴다.

“아직도 상수는 삐쳐있나 봐?” 태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준억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없었어?”

“별로…. 그래 너 없는 동안 문학회가 너무도 썰렁하더라.” 준억이 말했다. 문학회의 일원은 태운, 준억, 상수, 선엽 이렇게 네 명이었는데 선엽은 전학 가버리고 태운은 정학 당해서 단 둘이서만 문학회에 갔던 것이다.

“상수가 문학회를 떠나려는 걸 겨우 붙잡았어.” 준억이 무심하게 말을 툭 던졌다.

“아니, 왜?”

“너랑 같이 문학회를 하면 어색할까봐 그런 가봐. 내가 너도 선엽의 일에 대해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해도 믿지 않아.”

“믿기 싫으면 믿지 마라고해. 난 신경 쓰지 않으니까.” 태운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여전히 상수가 그를 불신하고 있다는 게 서운했다. 태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화장실에 좀 갔다 올게.” 태운이 교실 뒷문을 열자 물을 뜨고 있던 상수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주춤거리며 서로 물러섰고 태운이 먼저 그를 지나쳐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상수를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했어.’ 태운은 화장실의 칸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비로소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마주쳤던 상수를 비롯한 다른 이들의 눈빛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3일 동안 뭐했어?” 화장실 밖에서 묻는 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혹시 자신에게 하는 말인가 싶어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태운 대신 다른 어떤 이가 대답했다.

“재미난 걸 했지.” 동훈의 목소리였다. 태운은 특유의 으스대는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뭔데?”





“경주의 고등학교에 갔어. 내 오랜 옛 친구들을 볼 겸. 너도 알다시피 난 경주에서 왔잖아.”

“볼 겸?”

“선엽이 미친놈이라는 걸 알렸지. 임도 보고 뽕도 따고. 이제 그쪽 애들도 전부 선엽이 따돌리고 있을 거야.” 동훈이 웃자 주위에 있던 애들도 낄낄댔다.

“그거 참 속 시원한데.”

“오늘 친구가 문자 보냈는데 아무도 걔한테 접근하지 않아서 적응을 제대로 못하고 있대.”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샌다고, 딱 그 말이네.” 태운은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그는 화장실 문을 열었다.





“야, 뭐라고 했어?” 동훈은 뜬금없이 화장실 칸에서 나온 태운을 보고는 놀라는가싶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너한테는 말 안했는데? 들어가서 하던 일이나 마저 끝내시지.”

“넌 그렇게 선엽을 괴롭혀야겠어?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어?”

“미련이라니? 난 그 새끼에게 복수를 한 것일 뿐이야. 그 새끼가 이른 덕분에 나는 3일 동안이나 정학을 당했고 내 학생기록부에 오점도 남아서 대학 가는데 엄청난 불이익으로 작용하게 되었다고.”

“넌 정말 멍청하구나. 네가 선엽에게서 금품을 갈취하고 신체적, 언어적 폭행을 가했다고 이른 건 나와 준억이야.” 태운이 말했다. 실실 웃던 동훈의 표정이 싹 변했다.





“뭐, 뭐라고? 네들이 날 고자질한 거야? 네가 내 입시를 망친 거냐고!”

“그래.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네 입시를 망친 건 아니지. 법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거니까.”

“야 말 다했어?” 동훈이 씩씩거리며 태운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동훈의 큰 키는 한 층 더 커보였다. 그렇지만 태운은 기죽지 않았다. 동훈이 태운의 얼굴에다가 주먹을 날리려고 했지만 태운이 그의 복부를 먼저 가격했다. 둘은 곧 화장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치고 박고 싸웠고, 동훈의 무리와 다른 반 학생 애들이 그들 주위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한창 싸우고 있는데 다른 학생의 신고로 달려온 영호 선생님이 회초리를 휘두르며 그들을 말렸다.

“떨어지지 못해!” 영호 선생님은 강제로 그 둘을 떨어뜨렸고 곧장 교무실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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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2화]









태운과 동훈이 교무실에서 엎드려뻗치자 영호 선생님이 야단쳤다.

“너희들은 3일 동안 정학된 것으로 부족한 것 같구나. 어떻게 오자마자 문제를 일으킬 수가 있지? 3일 더 정학 줄까? 아니면 퇴학 어때?” 영호 선생님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다.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싸운 거지?” 영호 선생님이 말했다.

“그건….” 태운이 잠시 주춤했다. 동훈이 선엽을 또 괴롭혔다고 말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어쨌든 이미 선엽과 관련된 문제는 이 학교를 떠나버렸고 동훈이 선엽을 또 괴롭혔다고 한들 더 이상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태운이 불법적 교외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태운이 주춤한 사이 동훈이 엎드린 채 소리쳤다.





“무슨 소리지?”

“태운은 도문호 강사의 꾀에 넘어가 매 자습시간마다 지하 1층에 내려가서는 공부 대신 다른 활동을 합니다. 제가 그것을 말리려고 하자 태운이 저를 때렸습니다.” 동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또박또박 일러바쳤다.

“아니에요! 선생님, 동훈의 말은 거짓이에요.” 태운이 흥분해 소리쳤다.

“뭐가 사실이 아니라는 거지?” 선생님이 날카로운 눈초리로 물었다.

“우린 그 때문에 싸운 게 아니에요!”





“난 네들이 자습시간에 지하에서 나오는 모습을 봤어! 분명 논술수업은 음악실에서 한다고 들었는데 너희들은 지하에서 나왔다고.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거지?” 동훈이 말했다.

“이 말이 사실이니?” 영호 선생님이 태운에게 물었다.

“그건…. 음악실에는 논술공부를 할 만한 커다란 탁자가 없어서 자리를 옮긴 것일 뿐이에요!” 태운이 둘러댔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다만 이것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을 뿐이었다. 영호 선생님은 태운을 꿰뚫어보듯 쳐다보았다. 태운은 당당하게 최대한 눈빛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잠시 태운을 노려보던 선생님이 말했다.





“하동훈, 헛소리하지 말거라. 태운은 더 이상 학교에서 딴 짓을 하지 않기로 했었다. 네가 본 모습은 태운의 예전 모습이었겠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도문호 선생님을 매도하며 강사라고 네 멋대로 낮춰 부르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알겠어?” 하동훈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훈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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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3화]









저녁시간이 끝나고, 논술수업에 가는 3인은 각자 가져갈 물건을 챙겼다. 세 명은 계단을 함께 걸었지만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늘 아침에 동훈과 왜 싸웠어?” 준억이 태운에게 물었다. 태운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준억에겐 이미 다 말했기 때문이었다.

“동훈이 선엽을 여전히 괴롭히고 있어서 화가 났었어.” 상수는 태운의 말에도 움찔거리지 않았다. 그들은 곧 지하에 도착했고 준억은 열쇠로 문을 열었다.

“3일 만에 여기 온 소감이 어때?”

“그냥 그렇지 뭐. 학교생활 중 이게 제일 그리웠어.” 태운이 말했다.





“동훈이, 동훈이 어떻게 선엽을 괴롭힌 거야?” 상수가 뜬금없이 태운에게 물었다. 상수는 그동안 계속 어떻게 물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선엽이 다니는 학교에 선엽이 정신병자라서 전학 왔다고 말했어.” 태운이 대답했다.

“정말 악독한 놈이구나…. 나라도 그 말을 들으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야.” 상수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교실의 문을 열었다. 문호 선생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구나. 재회의 시간은 충분히 가졌니?” 선생님의 말에도 그들은 어색하게 있었다.

“3일 동안이었지만 돌아온 것을 축하한다. 우리 모두 널 기다리고 있었어.”





“감사합니다.”

“다 모였으니 수업을 시작할까?” 문호 선생님은 말하고는 칠판에다가 글씨를 썼다.

“이번에 우리가 해볼 것은 모닝 페이지라는 거다.”

“네? 그게 뭐죠?”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에 나온 방법이야. 쉽게 말해 아침에 쓰는 글이지. 꼭 소설을 쓰는 건 아니야. 아침에 일어났을 때 그냥 생각나는 것, 쓰고 싶은 것을 3페이지 정도 쓰는 거야. 일기든 소설이든 상관없어. 매일 아침 글을 쓰는 습관을 가져서 글 솜씨를 늘리는 게 목표이니까.” 문호 선생님이 설명했다.





“지금은 아침이 아닌데….” 상수가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함께 글을 써볼 거다. 처음에 혼자 시작하려면 괜히 두렵기도 하고 확신이 서지 않을 수도 있으니.” 문호 선생님은 그들에게 모닝 페이지라는 것의 취지와 쓰는 법을 간단히 설명했다. 그러곤 바로 모두 글쓰기에 돌입했다. 사실 모닝 페이지라는 것은 이론보다는 매일 글을 쓴다는 행위 자체에 의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십여 분이 지나 글을 다 쓰고, 그들은 쓴 글을 돌려보며 첨삭을 하였다. 태운은 어렸을 때의 경험에 대해 썼다. 부끄러운 기억이었지만 한 번은 그가 마주해야 할 기억이었고 그 기억을 같은 문학회 일원과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로 평가를 하며 글쓰기에 대해 말을 나누고 있는데, 뒤에서 섬뜩한,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리고…. 네 마리.”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태운은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담임선생님의 기쁨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 있었고 동훈의 통쾌함을 애써 감춘 표정이 있었다.





“도문호 선생, 뭐하고 있는 거죠?” 담임선생님은 쩌렁쩌렁 거리는 목소리로 기세등등하게 물었다. 문호 선생님은 아무렇지 않는 듯 대답했다.

“논술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선 어쩌신 일로?”

“한 학생의 제보가 있었죠.” 담임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교칙에 어긋나는 교육을 하는 자가 있다고요….” 그는 상수의 손에 쥐어진 글을 흘깃 보고는 내팽개쳤다. 상수는 덜덜 떨고 있었다.

“학교의 지하에서 열린다고요.” 동훈은 선생님의 꽁무니를 따라왔다.

“따르는 조무래기들과 함께요. 처음에는 이 말을 믿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겠군요.” 담임선생님은 어느새 문호 선생님 바로 앞에 서 있었었다.





“이것에 대해 하실 말씀 있습니까?” 문호 선생님은 변명거리를 찾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전병설 선생님을 응시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 사안은 학교 내 이사회로 넘겨야겠군요.” 그는 협박조로 말했다.

“이사회에서 이것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겁니다. 미리 변명거리를 찾아두시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묵비권은 당신에게 불리해요. 그리고 그때까지 이 녀석들을 데리고 노는 자질구레한 모임은 열지 마시길.”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3명의 학생을 쳐다보았다. 태운은 그의 눈빛에서 예전 전병설 선생님이 평반에서 수업을 할 때의 그 느낌을 고대로 받을 수 있었다.

경쟁에서 잠시 뒤쳐진 애들을 벌레 보듯 바라보았던 그 눈이었다. 태운이 특반에 들어왔을 때 잠시 변했었던 그의 태도는 다시 예전으로 되돌아가있었다. 선생님의 시선은 준억에게는 아쉬웠다가 상수에게는 한심함으로 바뀌었고 마지막으로 태운에게 머물렀을 때 괘씸함으로 변했다.

“넌 말이야, 인간이 되지 않았어. 다시 네 부모님이 오길 바라는 거냐?” 전병설 선생님은 멸시어린 시선으로 내려 보고는 태운 앞에 있던 글을 낚아챘다. 동훈은 그 뒤에서 보라는 듯 소리 없이 웃었다. 그의 함박웃음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기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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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4화]









문학회에서의 악몽은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담임선생님의 수업시간이 되자 선생님은 아니나 다를까 수업을 하다말고 문학회 일원들을 교묘히 괴롭히기 시작했다.

“자, 오늘 아침부터 수업이 많이 지루했지? 미안하다. 그래서 내가 준비해둔 게 있단다.” 반 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의 전병설 선생님의 수업방식에 비춰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기치 못한 환호성에 태운은 담임선생님이어서 알게 모르게 반 학생들도 잘 보여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어서 호들갑을 떤다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그리고 가끔은 이런 편협한 생각을 하는 편이 훨씬 편하다고 생각했다.





“문학작품 낭송이야.” 순식간에 감탄이 한탄으로 바뀌었다. 태운은 다들 앙탈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준억도 가만히 태운처럼 지켜만 볼 뿐이었다.

“에이 그게 뭐예요.”

“그러지들 말고, 이번 작품은 좀 특별한 거다. 놀랍게도 우리 학교에도 짙은 감수성을 지닌 작가가 있더구나. 그리고 그 작가 분은 현재 우리와 함께 자리를 하고 계시지.” 선생님은 싱글벙글 웃어댔다. 기분 나쁜 웃음이었다.

“김태운?” 갑자기 선생님이 교실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이태운.” 이번에는 짜증 섞인 말투로 소리쳤다.

“박태운!” 선생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예, 선생님.” 태운은 그때야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꾹꾹 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낭독하여라. 여기로 와서, 앞에 서서, 허리 펴고.” 태운은 선생님에게서 종이를 받았다. 며칠 전 태운이 문학회에서 모닝 페이지 격으로 썼던 사적인 글이었다. 태운은 순간 얼굴이 타올랐다. 당황한 나머지 눈 밑이 뜨거워졌다.

“안 읽고 뭐하는 거지?” 선생님이 핀잔을 줬다. 태운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집었다. 수전증이 있는 그의 손은 저 멀리서도 알아볼 만큼 진동했다. 준억이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손을 들고 선생님을 불렀지만 선생님은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얼른 해.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잖아.” 학생들 사이에서 동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에 다른 애들도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운은 마음을 가다듬고 또박또박 글씨를 읽어 내렸다. 이 글은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냥 글자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발음해내야 할, 한번 입 밖에서 나오면 공중 속으로 흩어져버리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태운은 무슨 뜻인지도 해석하지 않고 글자 하나하나가 지닌 괴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괴성에 다른 애들이 웃기 시작했다. 웃음을 터뜨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특히 동훈의 웃음소리는 태운을 거슬리게 했다. 태운은 그들이 자신이 쓴 글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떤 내용인지 몰랐다. 괜한 비웃음에 태운이 움츠러들자 동훈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놀려댔다.

“선생님 말씀대로 이 작가 분은 감수성이 너무 풍부하신 것 같아요. 자기가 잘못하고서 찔끔거리는 꼴이란.” 태운은 동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눈이 약간 피로해서 눈을 감기 힘들었을 뿐이었다.





“선생님!” 준억이 보다 못해 손을 들고 선생님을 향해 외쳤다. 태운의 구원자가 그를 위해 손을 들고 있었다. 시선이 순식간에 준억으로 쏠렸다.

“괜찮아.” 태운은 준억을 막았다. 언제까지 남의 도움을 받을 순 없었다. 이런 사소한 일만큼은 혼자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태운은 겨우 자신의 글을 읽었다. 다 읽고 교실을 쳐다보았을 때, 태운은 예전의 선엽처럼, 온 교실에 발가벗은 양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태운은 이곳에서 자신이 다음 ‘선엽’이 될 것임도 직감했다. 비웃음 속에서 태운이 자리에 앉고 나자, 선생님이 만족한 듯 엄포를 놓았다.

“학교에서 딴 짓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식으로 당할 거다. 좋은 말로 할 때 그만두어라.” 그렇게 수업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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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5화]









나는 어렸을 때부터 외로웠다. 섬에서 살다가 육지에 와서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말씨가 달랐고 놀이가 달랐고 옷차림이 달랐다. 우리 아파트에는 나와 꼭 같은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말씨가 달랐고 놀이가 달랐고 옷차림이 달랐다. 다른 아이들은 그 여자아이가 더럽다고 놀려댔다. 부모님이 없다는 둥, 행동거지가 여자답지 못하다는 둥 온갖 소문과 비난을 몰고 다니는 아이였다.

나는 그 여자아이와 내가 잘 맞는 구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코 먼저 다가서지 않았다. 같이 놀게 되면 나 또한 놀림을 받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난 그 아이 대신 평판을 택했고 다른 애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며 지냈다. 그렇지만 나와 아이들의 차이는 생각보다 컸었고 그로 인해 결코 무리의 핵심 구성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이 바로 옆의 형산강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내심 기뻤다. 수영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고 또한 자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함께 형산강으로 갔다. 형산강변에는 대여섯 명의 낚시꾼들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애들과 어울리지 않는 여자애가 그곳에서 홀로 수영을 하고 있었다.

“뭐야, 우리 딴 데 가자.”

“아니 왜?”

“저 애와 같은 물에 있고 싶지 않아. 때가 둥둥 뜰 것 같아.” 한 아이가 말했다. 그들이 킥킥 웃었다.

“하지만 이곳 말고는 수영할 만한 곳이 없는걸.”

“그럼 하지 말자. 사실 난 처음부터 물속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어.” 한 애가 말했다. 나는 순간 다급해졌다.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바로 앞에서 날릴 순 없었다.





“그럼 저 여자애를 쫓아내자.” 나는 그 여자아이에게 성큼 다가갔다.

“미안하지만 자리를 비켜줘야겠어.”

“왜?” 여자애가 물었다.

“왜냐하면 애들이 너 보고 더럽다고 같이 물속에 있고 싶지 않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저쪽에 아무 사람도 없는 곳에서 수영을 했으면 좋겠어.” 나는 저 멀리 깊은 수심을 가리켰다.

“하지만 저긴 너무 깊어. 강물도 거세단 말이야. 내가 빠져 죽으면 어쩌려고.”

“넌 수영을 잘하니까 괜찮을 거야. 아니면 아예 집으로 가던가.” 나는 무뚝뚝하게 말했고 그 여자애는 더 이상 말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저 쪽 아무도 없는 반대편 강변가로 사라졌다. 나는 친구들을 불렀고 물놀이를 하며 놀았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하게 되자 우쭐해졌다. 친구들 앞에서 온갖 기교를 부리기도 했다.





“우와, 멋진걸. 한번 돌아봐.” 나는 동물원의 돌고래처럼 온 몸을 빙 돌았다. 그때였다. 발을 헛디뎌버렸고 바로 옆의 수심이 깊은 곳으로 빠져버렸다. 순간 놀라버린 나는 허우적대기 시작했고, 그 몸짓은 오히려 나를 수심 속으로 데려가 버렸다.

“얘들아, 내 손 좀 잡아줘!” 내가 소리쳤다. 두 세 명의 친구가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해, 한 손만 잡아주면 돼!”

“엄마가 물에 빠진 사람이 있어도 못 구할 것 같으면 구하지 말래.”





“맞아, 나도 TV에서 구하려다가 같이 물에 빠져 죽은 사고를 봤어.”

“뭐? 그러지 말고 살려줘. 살려주세요!”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거나 잡으려고 하자 겁을 먹어버린 애들은 서로 물 밖으로 나가버렸고 나 홀로 물속에 남아 허우적대었다. 낚시꾼들은 그런 나를 구경하면서도 어느 누구 하나 낚싯대를 놔두고 나에게 오는 사람이 없었다. 내 의식은 갈수록 희미해져갔고 내 목소리는 물에 잠겨 더 이상 그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한낱 막무가내식의 몸부림만이 한 층 더 거센 물결을 일으켰다. 그때 내 손목을 잡는 손이 느껴졌다. 그 손은 내 큰 몸부림에도 흔들리지 않고 꼭 잡은 채 나를 육지로 데려가 주었다. 육지에서야 나는 그 손이 누구였는지를 깨달았다. 방금 전 쫓아냈었던 여자애였다. 그녀는 나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야 박태운, 저 여자애가 널 살려준 거야?”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보았다. 애들이 모여서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웃고 있었다. 순간 이 여자애가 나를 구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애가 뒤따라왔다.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야, 누가 너보고 구해달라고 했어? 다음부터는 내 옆에 오지도 마. 역겨우니까.” 나는 그녀에게 쏘아대고는 그 무리를 향해 뛰어갔다. 더러운 똥을 밟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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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6화]









발표가 끝나고, 동훈의 무리는 태운의 자리로 다짜고짜 다가왔다. 이번에는 준억이 옆에 있었음에도 크게 개의치 않은 듯 했다.

“너 정말 대단하다.” 동훈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에게는 그리도 정의를 강조하며 착한 척을 하더니 정작 네 행동은 비겁하게 짝이 없었구나?”

“그래 맞아, 뭐 이런 비겁한 녀석이 다 있어.” 동훈 옆에 있는 애가 태운의 글을 집었다. 그는 종이를 찢어버렸다.

“너 같은 놈 때문에 선엽이 더 이곳을 견디지 못한 거야.”





“네가 우리 반에 들어온 뒤로부터 우리 반 분위기는 엉망으로 변해버렸고 선엽이 괴롭힘을 받기 시작했어.”

“평반새끼, 원래 있던 곳으로 꺼져.”

“자기 윤리 성적 값을 톡톡히 하는구만….” 태운은 모욕에 가까운 말을 듣고 있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잘못한 것처럼 느껴졌다. 준억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가 당하고 있는 것은 예전 선엽이 당한 것과 같았다. 이제 태운이 선엽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것이다. 함께 선엽의 고통을 무시했던 학우들은 어느새 정의의 사도가 되어 태운을 비난하고 있었다. 그때 중찬이 다가왔다.





“너희들, 태운에게 왜 이리도 못살게 구는 거야.”

“태운에게 직접 물어보시지. 얘가 말했잖아? 벌은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동훈은 태운을 툭 쳤다.

“열등감 때문에 그래.”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준억이 중얼거렸다. 의기양양했던 동훈은 그의 혼잣말을 놓치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

“네가 우리에게 하는 모든 일, 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거라고. 선엽을 왕따 시킨 것, 문학회를 고자질한 것, 태운을 괴롭히는 것 전부.”





“내가 너희들한테서 열등감을 느낄 게 뭐가 있어?” 동훈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소리쳤다. 준억은 확실히 동훈의 성질을 뒤집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동훈이 쉽게 건들지 못하는 카리스마 또한 있었다. 동훈은 화가 나 펄펄 뛰었지만 준억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대지 못했다. 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태운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던 다른 아이들도 함께 자리를 떴다. 하지만 옆에 묵묵히 서 있던 중찬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너의 과거 행동,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너의 솔직함은 용기 있었다고 생각해.” 그가 태운에게 말했다. 예전 그와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건네는 제대로 된 첫 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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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7화]









금요일 저녁 자습시간은 늘 그렇듯 주말에 대한 기대감과 이번에도 어김없이 공부를 할 것이라는 차분함이 공존하고 있었다. 확실한 미래라는 것은 때론 안정감을 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답답함으로 느껴질 때가 많은 법이었다. 자습시간이 끝나고 선생님도 애들도 집으로 갈 채비를 할 때, 태운은 그날 당직이었던 정영호 선생님에게 갔다.

“선생님?” 그는 혼자 교무실에 남아있는 정영호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지만 선생님은 태운을 별로 반기지 않는 듯 했다.





“그래. 무슨 일이니.”

“그게….”

“논술 심화수업을 되살려달라는 말은 하지 말거라.” 영호 선생님이 침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운은 자신의 의도가 간파되었음에 순간적으로 불편함을 느꼈다.

“선생님이라면 이것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선생님은 바퀴의자를 돌려 태운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너무 슬퍼보였다. 예전 태운을 혼내던 열정도 태운을 기특하게 바라보던 흐뭇함도 그의 눈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것에 초월한 표정이었다.





“나는 너를 도와주지 못해. 내가 문학회를 없앤 장본인 중 하나이거든. 난 고3에 소설을 쓰는 놈들을 이해할 수 없어. 지금은 내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후에 날 이해하는 순간이 올 거야. 그때면 내가 너를 위해 네 인생의 악역을 맡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다.”

“그렇지만 전 공부만 하고 살 순 없어요. 공부는 제 인생의 전부가 아니에요.” 태운은 영호 선생님을 설득하려고 했다.





“분명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지. 고등학생 때 공부만 하다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리고 군제대하고 세상을 봤을 때 나는 세상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말대로 공부는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어. 그렇지만 그때 깨닫지 못한 게 있었지. 나는 속은 게 아니라 몰랐던 것이었어. 공부 말고 다른 길은 울퉁불퉁하여 매우 험난하다는 것을 말이야. 나도 공부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지만 이 말밖에는 해줄 말이 없구나.” 태운은 더 이상 영호 선생님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작별인사를 하고 교무실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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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12장 완결]









그 주 토요일 오후에는 문학회와 도문호 선생님에 대한 이사회가 열렸다. 공교롭게도 교장님이 매우 이 사안에 대해 관심이 많았기에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리자고 지시한 탓이었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 이사회의 결과가 소문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조례 때 담임선생님의 표정은 매우 밝아보였고 그랬기에 태운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었다.

“간밤에 잠은 잘 잤니? 여러분에게 새로운 소식이 있다.” 그는 뜸 잡으며 말을 시작했다.





“학교 몰래 열렸던 문학 심화수업 모임은 폐지되었다.” 학생들은 이리저리 수군거렸다. 대부분의 애들은 이런 모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훈과 그의 무리는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도문호 선생님이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태운은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뭐라고요? 며칠 동안 못 나오시는 거죠?”

“그건 잘 모르겠구나. 대신 내가 문학수업을 맡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대체 무슨 일로 그런 거죠?”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정 궁금하면 오늘 있을 마지막 수업시간에 물어보던지. 물론 대답해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담임선생님은 쌀쌀맞게 대답했다. 태운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도문호 선생님은 문학회 사건으로 정직을 당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립학교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도문호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은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그는 수업과 관련된 것 말고는 한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교실 뒤에서는 이제 그를 대신할 담임선생님이 수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반면 문호 선생님은 말 한마디 한마디를 죄를 짓는 사람처럼 버벅거리고 있었다. 태운은 이 상황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느꼈다. 문호 선생님은 문학 교과서를 읽다가 덮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공부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단다. 입시공부만이 다가 아니라는 말이야. 사실 세상 자체가 공부라고 할 수 있지. 걷는 것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까지 모든 것이 공부다. 그러니 입시공부를 안 하거나 못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그 와중에도 너희들은 뭔가를 공부하고 있을 테니까. 단지 배우겠다는 열정만 가지렴. 내가 없는 동안에도 너희들이 많은 공부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학교를 쉬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워 오마. 너희들을 다시 가르칠 때 부끄럽지 않은 선생이 되지 않도록 말이야.”

선생님은 좀 더 말을 하려다 말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럼…. 이걸로 수업을 끝내야겠구나. 다들 좀 더 발전한 모습으로 만나자. 그간 수업을 함께 해줘 고마웠다.” 애들은 숨죽인 채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교편을 담임선생님에게 넘기고 교실을 나갔다. 태운은 준억을 쳐다보았다. 준억은 그에게 가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태운은 그에 용기를 얻고 복도를 걷고 있는 도문호 선생님을 쫓아갔다.





“잠깐만요.” 도문호 선생님은 태운이 말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렸다. 안경을 꿰뚫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죠?”

“내 생일이니?” 그가 미소 지었다.

“아뇨…. 스승의 날이지만 못 볼 것 같아서 오늘 준비했어요.” 태운은 선생님에게 스승의 날 선물을 건네주었다.

“오늘 아침 저희가 쓴 모닝 페이지에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열정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썼어요. 선생님이 없더라도 저희는 어떻게든 문학하는 모임을 열고 말거예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선생님은 돌아오시기만 하면 돼요.” 태운의 말에 선생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나중엔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도문호 선생님은 한 토막의 작별인사를 남긴 채 학교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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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소설] 문학청소년 - 제13장 비밀결사

제 13장

비밀결사


아직 늦봄이 채 가시기도 전인 5월 중순이었지만 날씨는 이미 한여름처럼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뉴스에서는 연일 고유가 기록 행진으로 전기요금, 가스요금 등은 오를 대로 올라있었기에 학교에서는 에어컨도 제대로 틀지 못하고 부채와 선풍기로만 열을 식혀야 했다. 그럴수록 학교는 전기를 아낀다는 명목으로 교실을 어둡게 만들어갔다.

각 교실마다 최소한의 형광등만을 켜도록 지시했고 자습시간에는 두 반을 합쳐 한 곳에서 자습을 시켰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옛 문학회의 일원이었던 준억과 태운, 상수는 침침한 빛을 따라 자습감독 선생님의 눈을 피해 글을 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언제까지 국어 교과서에 있는 시와 소설을 필사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반장이 앞에 나와 인원 체크를 하며 칠판에 총인원, 현재인원, 사고를 쓰는 동안 상수가 뒤에서 투덜거리며 속삭였다.





“내 말은, 그만 눈치를 보고 글을 쓰고 싶단 소리야.”

“나도 동감하지만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데 어찌 글을 쓸 수 있겠어. 지금도 선생님들이 왜 비효율적으로 필사하며 언어 공부를 하냐며 핀잔을 주는 마당에 말이야. 문호 선생님이 복귀할 때까지만 참자.” 태운이 말했다.

“문호 선생님이 와도 상황은 변하지 않을 것 같은데.” 상수가 입을 삐쭉거렸다. 그들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준억이 제안했다.

“그렇게 불만이라면, 다른 곳에서 글을 쓰면 되지.”

“뭐? 자습시간에 우리는 교실을 떠날 수 없어. 화장실에 가는 것도 허락 맡는 마당에.”





“몰래 나가면 되잖아.”

“도대체 어떤 수로? 이제 못 나가는 거 알잖아. 학교 정문에는 경비원이 지키고 있단 말이야.” 태운의 말은 사실이었다. 몇 달 전 태운과 준억이 수업시간 도중 학교를 2번이나 몰래 나간 뒤부터 학교는 경비원을 고용해 정문을 지키도록 했다. 계속된 학생들의 탈선이 벽산고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는 명목이었다. 벽산고등학교는 산에 위치했기에 학교 바깥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정문뿐이었는데 그곳을 막아버린 것이었다.

“꼭 정문으로 나갈 필요는 없지. 희망봉을 통해서 가면 되잖아.”





“희망봉?” 희망봉은 벽산고 운동장 뒤에 있는 산봉우리였다. 벽산고 주위 산 중 가장 높은 곳이었다.

“산을 타고 바깥으로 넘어가자고?”

“어째 너희들이 내는 결론은 늘 도주로 귀착되는 것 같다?” 상수가 말했다.

“그럼 어쩔까? 태운의 반항도 나의 건의도 먹히질 않는데 말이야.”

“더 이상 무단도주는 불가능해. 거짓말을 해야만 한다고.”

“내게 생각이 하나 있어.” 준억이 말했다.

“우리가 썼었던 방법이.” 준억의 귀띔을 들은 태운과 상수는 흥분에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 바보의 말처럼 긴 하루 끝에 좋은 책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은 행복감에 젖어있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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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비밀결사 [2화]









금요일 저녁, 그들은 복도에서 윤두민 선생님 앞에 서 있었다.

“이 벌을 받는 건 또 너희들이야.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모르고 숙제를 안 가져왔었을 뿐이에요. 죄송해요.”

“이런 벌칙을 주는 내 입장이 얼마나 곤란한지 아니? 자습시간에 상위권 학생들에게 쓸데없는 일을 시킨다고 눈총을 주고 있어. 가뜩이나 최근 학교분위기를 잘 알잖니.” 윤두민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선생님,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잖아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준억이 반문했다.





“그렇지…. 자, 휴지통 받아라.” 윤두민 선생님은 파란 휴지통을 하나 건네주었다.

“알고 있지? 휴지통을 다 채우고 교무실에 와 검사 맡으면 된다.” 선생님은 그들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눈치를 살펴보던 태운과 준억은 선생님이 문을 닫자마자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3개 꺼내 쓰레기통 안에 집어넣었다. 상수도 필기구와 연습장들을 넣었다. 필요한 물품을 다 넣고 나서 그들은 검은 담요로 휴지통을 덮었다.

그날따라 선생님들의 감시를 피하는 것은 비교적 쉬웠다.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모아서 야간자습을 했기 때문에 그 교실 앞을 지나가지 않는 이상 선생님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쳐다보는 1반 학생들에게는 보란 듯이 파란 휴지통을 들어 올려보였다.

그럴 때면 애들은 비웃듯이 그들을 하찮게 생각하곤 경계를 늦추는 것이었다. 그들은 1층으로 내려갔고 샤워장과 음악실 등을 지나쳐갔다. 건물 밖에는 한 선생님이 통로를 지키고 있었지만 잠시 선생님이 화장실을 간 사이 운동장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한편 1반에서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야간자습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눈썰미가 좋은 동훈은 그 분주함 속에 준억과 태운, 그리고 상수가 교실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중찬, 태운과 준억은 어디에 간 거지?” 동훈이 중찬에게 따졌다. 칠판을 닦고 있었던 중찬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지?”

“넌 이번 주 주번이니까 애들 청소를 검사하잖아. 혹시 걔네들 청소 검사를 통과하지 못해서 지금 청소하는 중이야?”





“윤두민 선생님의 벌을 받고 있어. 종쳤으니까 너도 이만 자리에 앉아.” 그러나 동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는 복도의 창가 쪽으로 달려가고는 운동장 쪽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 3명의 형체가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벌인데?” 동훈은 고개를 돌리더니 그를 붙잡으러 온 중찬에게 물었다.

“휴지통 채우기.”

“운동장 뺑뺑이 돌리는 게 아니고?”

“뭔 소리야.” 중찬이 짜증을 냈다. 그의 짜증에 동훈은 운동장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정영호 선생님에게 말하러 가야겠다.” 동훈은 건수를 잡았다는 만족감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가지마.” 중찬이 동훈을 붙잡았다.

“뭔가 쟤네들의 사정이 있을 거야.”

“원리원칙을 그렇게 중시하는 네가 자습시간에 도망가는 걸 목격하고도 말하지 말라고? 의외인데?” 동훈이 빈정거렸다. 중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순 없어. 나라도 따라갈 거야. 나쁜 짓을 보면 즉시 저지해야지.” 동훈은 중찬을 가볍게 밀쳐내고는 계단 쪽으로 뛰어갔다. 중찬도 동훈을 따라잡기 위해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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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비밀결사 [3화]









태운과 준억, 상수는 운동장의 한가운데에 도착했다. 그들은 운동장 앞에 있는 연설대로 뛰어갔다. 연설대 바로 뒤에 희망봉으로 가는 산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은히 비치던 달빛도 산 속으로 들어가니 나무에 가리고 대신 그림자가 그들을 덮었다. 키 큰 나무들이 달빛을 가려 어두워지자 준억은 쓰레기통에서 손전등을 하나씩 꺼내 나눠주었다. 뛰어가던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희망봉에 올라섰다. 희망봉 주위는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어서 달빛이 정면으로 그들을 내리 쪼아댔다. 밤하늘이 그들의 머리 위로 펼쳐졌다. 태운은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는 두 팔을 벌리며 큰 숨을 내쉬었다. 준억은 묵묵히 주위의 풍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희망봉 바로 밑에는 모래로 된 넓은 평지가 있었고 평지의 까마득한 아래에는 학교 건물이 조그마하게 보였다.





“여기를 왜 희망봉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태운이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여기 오면 희망이 생기거든.”

“무슨 희망?” 태운의 물음에 준억은 반대편의 아래쪽을 가리켰다. 붉은 벽돌로 만든 여자고등학교 건물이 보였다. 태운이 웃었다.

“2학년 때 정영호 선생님이 말해준 이야기가 생각나. 원래 이곳은 나무로 우거진 곳이었대. 이곳뿐만 아니라 학교 전체가 숲으로 뒤덮여 하늘에서 우리 학교를 찾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해. 그런데 10년 전 원인 모를 화재로 주위 산이 다 타버린 거야. 다행히 학교는 불타지 않았지만 주변 나무들은 다 없어지고 말았지.

그때 학생들에게 묘목을 하나씩 가져오게 해서 주위의 산에 심어 겨우 복구할 수 있었지. 그럼에도 여기 넓은 모래밭까지 채우기에는 나무 수가 부족했나봐. 저기 딱 두 그루밖에 없잖아.” 준억은 저 멀리 붙어있는 나무 둘을 가리켰다. 한 나무는 사람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컸었고 바로 옆의 나무는 그 나무의 그늘에 가려 자랐는지 다소 작았다. 산 중턱쯤 올라갔을 때 상수가 입을 열었다.

“저기 태운아?”





“응?”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아.”

“나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어.” 태운이 거들었다. 그러나 준억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말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태운과 상수가 아름다운 별들을 감상하며 천천히 걷는 사이 준억은 희망봉 바로 밑 평지의 쓰지 않는 식수대에 가서는 수도꼭지를 다 틀었다. 콸콸거리는 소리가 메아리치듯 온 산에 울려 퍼졌다.

“야 뭐하는 거야.” 태운이 깜짝 놀라 말했다.

“혹시 이 수도꼭지들을 묶을 만한 끈이 없을까?”





“그건 왜.”

“일단 줘봐.” 태운은 의아했지만 허리에 찼던 벨트를 빼서 준억에게 건네주었다. 준억은 꼭지 두 개를 벨트로 꽁꽁 묶었다.

“이제 가자.”

“왜 그러는지 말을 해봐.”

“나도 들었어. 누군가 우리를 따라오고 있어.” 준억에게 이끌린 태운과 상수는 긴장감에 더 빨리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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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비밀결사 [4화]









3명의 탈주생들을 따라잡던 동훈과 중찬은 폭포와 같은 거대한 물소리에 놀랐다. 큰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뛰어가자 저 밑의 식수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중찬은 잽싸게 그쪽으로 뛰어가더니 수도꼭지를 뒤틀었다. 동훈은 그들이 어느 쪽으로 도망을 갔는지 두리번거렸다. 그는 두 길 사이에서 고민하더니 오른쪽 길로 들어섰다.

“기다려! 수도꼭지 안 잠그고 갈 거야?” 중찬이 뒤에서 소리쳤지만 동훈은 가볍게 무시하고는 저 멀리 산 중턱으로 사라졌다. 중찬은 혼자서 끙끙거리며 가죽벨트를 당겼지만 좀처럼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궁여지책으로 매듭을 이로 끊어버렸다.





수도꼭지를 잠그고 주위를 돌아봤을 때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훈은 이미 저 멀리 산 속으로 사라진 오래였다. 중찬은 으스스한 여름밤의 기운을 느끼며 내려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그에게 친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중찬은 고개를 돌렸다. 태운이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곧 중찬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왜 자습시간에 사라진 거야?” 중찬이 물었다.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었어.” 태운은 말을 이었다.





“준억이 이곳에서 기다리면 너와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했어. 그간 멋대로 굴었던 것 사과할게. 도문호 선생님에게 대들었을 때는 내가 철이 없었어. 그랬던 내가 너에게 염치없는 부탁을 하나 하려고 해. 도문호 선생님이 정직당한 것 알고 있지?”

“그건 왜 묻니?”

“우리는 그것에 대해 언론에 신고할 계획이야. 선생님을 복직시키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 먼저 모여서 그 고발문을 함께 쓸 거야.”

“뭐라고?” 중찬은 놀라서 되물었다.

“너도 알잖아. 우리 학교는 폐쇄적이야. 선엽이 전학 갔을 때 느낀 점 없었어? 학교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전혀 없어. 오직 문제를 은폐하고 회피하려고만 하지. 문학 활동을 금지시키고 도문호 선생님을 정직한 것도 그래. 이것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어. 너도 같이 가자.”





“너희들 제정신이야? 그러면 안 돼.”

“왜 안 되지? 너는 이것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학생에겐 학생이 지켜야 할 규범이 있어. 그리고 이건 분명 그 선을 뛰어넘는 짓이야.”

“도문호 선생님을 이해했던 건 너였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동의하지 않는 거야?”





“그야, 이건 규칙이니까.” 중찬은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학생이었다. 그는 다른 10대와는 달랐다. 방황, 가출과 같은 고민거리는 그와 거리가 멀었다. 어려서부터 그에겐 빈 공간이 없었다. 오직 주어진 길만을 걸으면 되었기에 간단했다. 대한민국 10대이기에 겪어야 하는 성적과 입시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민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주어진 길을 가지 못할 수도 있기에 겪는 불안과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참 잘 듣는 아이였다. 국사라는 협소한 열정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정해진 정답에 맞추었고 그러지 못할까봐 고민하는 아이가 그였다. 그런 중찬에게 태운의 말은 손톱도 먹히지 않는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너와 나는 다를 뿐이야.” 중찬이 말했다.

“그렇지 않아. 넌 나보다도 훨씬 분노할 줄 알고 자기 소신이 뚜렷하며 자신의 정의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야. 예전에 내가 국사를 포기하려고 했을 때 네가 말한 것 기억나니? 국사는 대학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고 말했지. 그래놓고 넌 왜 너 자신을 대학가기 위한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거니? 사회가 원하는 모범적 모습의 그늘에서 벗어나.

규칙이 항상 옳진 않다는 것을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번에는 학교가 잘못된 선택을 했어.” 태운의 말에 중찬은 잠시 고민했다. 그는 태운의 말대로 이번엔 학교에도 잘못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잘못은 이런 사소한 규칙을 깨는 것보다도 훨씬 큰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찬은 마침내 태운의 생각에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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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비밀결사 [5화]









다행히 준억과 상수는 멀리 가지 않았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태운과 중찬이 따라잡을 수 있었다. 4명의 학생은 곧 버려진 절에 도착했고 불을 키고 앉았다. 나방을 비롯한 벌레들이 이를 노리고 불빛 주위로 모여들어 한산한 절이 분잡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들은 준비해왔던 연습장과 볼펜을 꺼내서 함께 투고문을 작성해나갔다. 글을 쓰는 것은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다만 과장한 내용은 없는지, 빠뜨린 내용은 없는지 확인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을 뿐이었다. 서로 돌아가며 글을 점검한 뒤, 밑 부분에 각자의 이름을 썼다.

“이걸 쓰는 게 잘못된 일인 건 아니겠지?”





“아니야. 우린 더 일찍 썼어야 했어. 오히려 늦었던 거야.” 투고문을 다 쓴 뒤에는 서로 그동안 썼던 문학작품들을 꺼내 덜 쓴 부분을 쓰거나 함께 읽으며 합평을 했다. 중찬은 준비해둔 작품이 없었던 관계로 다른 애들이 쓴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감상을 말해주었다. 태운은 준억에게 자신이 소설을 쓰면서 막혔던 전개부분이나 쓰기 힘들었던 비유에 대해 물었고, 상수는 자신의 시에서 좀 더 나은 어휘로 바꿀 부분은 없는지 조언을 구했으며, 준억은 자신이 쓴 글을 다듬고 태운의 소설을 평가했다.

“이 부분에 갈등이 명확하게 뭔지 드러나지가 않아서 혼란스러워.” 준억이 태운의 소설을 읽다가 말했다.

“개인과 개인의 갈등인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인지 헷갈린다는 말이야.”





“국어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어.” 중찬이 반갑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는데….” 태운이 말끝을 흐렸다.

“이 부분에 두 가지 갈등이 들어 있잖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야?” 중찬이 물었다. 태운은 중찬의 물음에 아직까지 법칙에 충실하려는 그의 본능이 느껴졌다.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적은 부분에 여러 갈등을 집어넣으면 어지럽기만 할 뿐이야. 통일성이 뭔지 알지? 통일성은 간단히 말해 하나에 집중을 하는 거야. 한 문장이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선 문장마다 한 가지의 생각을 담아야 하고 하나의 통일성 있는 문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문단에 하나의 사건과 갈등을 담아야 하지. 네 글에는 지금 한 문단에 두 가지 갈등이 섞여 있잖아.

이것을 차라리 두 문단으로 나누고 각각의 갈등을 설명하는 살을 덧붙이는 건 어떨까?” 준억은 연필로 태운의 글을 나누더니 몇몇 문장을 추가시켜주었다. 이렇게 간단한 글의 표현 방법에서 시작된 그들의 담론은 점차 심화되어 어떤 이는 글쓴이의 사유의 흐름을 쫓으며 글을 평가하였으며, 다른 이는 사유 자체에 대해 말하였다.

특히 준억과 태운의 경우에는 이전에도 몇 번 같이 합평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작품들을 비춰 서로가 즐겨 쓰는 주제나 관심사, 그리고 고질적인 증상을 짚어내 갔다. 이런 식의 토론은 그들에게 작가와 독자의 경계를 무너뜨렸고 넷이서 작품의 발전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공동체가 된 것 같은 이상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종종 잠깐씩 침묵으로 대화를 대신했는데, 한 바보의 말처럼 그 때문인지 함께 하는 대화가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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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비밀결사 [13장 완결]









합평이 잠깐 멈추었을 때는 어느새 새벽별이 달을 몰아내고 산 너머에서 한 마디 한 마디씩 올라오고 있었다. 준억과 상수는 물을 뜨러 페트병을 들고 주변의 시냇물에 갔었고 태운의 옆에는 중찬만이 자리를 지켰다. 중찬이 머뭇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운아, 사실 아까 전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던 건데 난 동훈을 찾으러 가볼게. 혹시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말이야.” 태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찬은 손전등을 키더니 자신의 바지를 털고는 빠른 발걸음으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태운은 절의 마루에 누워 별하늘을 올려다봤다. 절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 희망봉에는 나무가 없었다. 그래서 별빛이 나무에 흡수되지 못하고 모래에 반사되어서 약하게나마 빛이 났다. 그랬기에 태운은 누워서도 희망봉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며칠 후에는, 아니 1년, 10년 뒤에도 아무 걱정 없이 누울 수 있을까?’ 태운은 10년 뒤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상상했다. 원래 생각이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꺼번에 찾아오는 법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태운의 눈꺼풀이 서서히 내려앉으려고 할 때쯤 저 옆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중찬이었다. 홀로 온 것으로 보아 동훈은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중찬은 태운의 옆에 앉았다.

“음, 중찬아.” 태운은 잠결에 혼잣말하듯 말했다.

“너는 10년 후 뭘 하고 있을 것 같니?” 중찬은 답이 없었다.

“응? 말해봐.” 태운은 웅얼거리며 재촉했다. 마침내 중찬이 입을 뗐다.

“내 생각에는….” 중찬의 목소리는 이상했다. 마치 성대모사를 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 있지 않을 걸.” 태운은 놀라 손전등으로 자신의 어깨에 손을 얹은 중찬의 얼굴을 비추었다. 선엽이었다. 그는 피가 묻은 칼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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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

제14장 혀에는 목 & 제15장 금수 랩소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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