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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글 쓰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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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장님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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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증명사진 / 제4장 국사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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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문학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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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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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왼손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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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젊은 문학도의 사회 & 제9장 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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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우리들의 비겁한 영웅 & 제11장 크로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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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칼을 찬 교사 & 제13장 비밀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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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혀에는 목 & 제15장 금수 랩소디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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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짓궂은 장난

7시 45분, 태운이 허겁지겁 책가방을 멘 채 교실로 들어왔다. 이미 영어듣기 방송은 시작된 뒤였기에 태운은 사물함에서 바로 영어듣기 책을 꺼내 자리로 갔다. 준억이 태운을 빤히 쳐다봤지만 태운은 가볍게 그의 시선을 무시해버렸다.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끝에서 동훈이 태운을 보고 엄지를 올렸다. 태운은 그의 신호에 미소로 답했다. 그때 바로 옆에서 딸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중찬이 동전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지각했으니까 1000원이야.” 그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1분밖에 안 늦었잖아.”





“1분 늦어도 지각은 지각이지. 그리고 너는 5분 늦었어.” 중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태운은 그와 입씨름하는 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 500원 동전 두 개를 꺼내 상자에 넣었다. 중찬은 태운을 노려보더니 자기 자리로 갔다. 태운은 무의식적으로 준억에게 하소연하려고 입을 뗐다. 하지만 준억의 차가운 얼굴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도문호 선생님 사건 이후로 태운과 준억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태운은 준억이 너무 옳은 말만 골라서 한다고 생각했다. 친구라면 무슨 일이든 지지해줘야 하는데 준억은 툭하면 태운에게 도문호 선생님에게 사과해라는 말만 반복했다. 태운은 준억 옆에 있고 싶지 않았고 그건 준억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상수가 그들의 사이에서 중재하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태운은 담임선생님의 수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수업시간에는 동훈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서 수업을 들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고 태운은 1교시가 시작되기 몇 분 전 동훈 옆으로 자리를 바꿨다.





토요일 1교시는 문학수업으로 사건 이후 처음으로 도문호 선생님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사실 그 전에도 두 번의 수업시간이 있었지만 도문호 선생님이 이틀 연가를 쓰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오늘은 그가 연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러나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선생님은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15분이 지나고 반장인 최영준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교무실로 갔다. 다른 애들은 수업 대신 자습을 하게 되었는데 왜 굳이 선생님을 부르러 가냐고 반장을 말렸지만 영준은 막무가내였다.

“가지마. 그 선생은 안 들어오는 게 우리를 가르치는 거야.” 동훈이 반장의 뒤통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말에 태운과 주위의 애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운은 준억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몇 분 후 영준은 홀로 다시 교실로 왔다. 도문호 선생님은 집안에 큰 일이 생겨 오늘도 연가를 갔다고 했다. 선생님이 없는 관계로 반장 주도 하의 자습이 시작되었고 태운은 예전 자리에 가서 자습할 거리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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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2화]









“야, 저것 좀 봐.” 태운이 정석책의 문제를 풀고 있는데 동훈이 그를 툭툭 쳤다. 태운은 동훈이 가리키는 쪽을 봤다. 한 아이가 공부 대신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박선엽으로 이름보다는 그의 이니셜로 불리곤 했다. 선엽은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동훈이 그 점을 이용해 선엽을 괴롭히곤 했다.

“싸이코 새끼, 자습시간엔 자습을 해야지.” 동훈은 혼잣말을 하며 일어나 선엽의 자리로 갔다. 태운도 그를 따라갔다.

“수업시간에 뭐하냐.” 선엽은 동훈의 말에 깜짝 놀라 연습장을 숨기려 했다.

“….”





“수업시간에 왜 딴 짓하냐고.” 동훈은 성내더니 연습장을 펼쳤다.

“태운아, 이 녀석이 그린 낙서 좀 봐.” 동훈이 대놓고 비웃었다. 태운은 그림을 힐끗 봤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내 연습장…. 내놔.” 선엽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동훈이 귀에 손을 대고 물었다.

“연습장, 돌려줘.”

“아, 돌려달라고?” 동훈은 선엽이 보는 앞에서 연습장을 찢어버렸다. 그리고 태운과 함께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너무 심했잖아.” 태운이 선엽을 보며 말했다.

“뭐 방금 한 일? 다 장난이야. 선엽도 내심 좋아할 거야. 나 말고는 걔한테 말거는 사람이 없거든. 선엽은 은따니까.”

“그래?”





“그럼. 나는 걔의 유일한 친구라고.” 동훈은 특유의 넉살맞은 미소를 지었다.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었다. 2, 3교시는 주간체육시간이었기에 태운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 체육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바로 옆에서 바지를 갈아입던 준억이 태운에게 느닷없이 물었다.

“오늘 선생님이 오시지 않은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못 온다고 했잖아. 잠깐, 그게 내 잘못이라는 거니?” 태운이 준억의 의중을 알아채고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선생님에게 사과해. 너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잖아.”

“좀 그만해. 난 내가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그 선생님은 자기가 걸어 다니는 좀비처럼 행동해왔다는 것을 알아야 해. 난 그 선생님을 위해 말을 한 거야. 동훈이 그렇게 말했어.”





“하동훈?”

“그래, 하동훈. 걔는 너처럼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 일일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아. 그저 나를 지지하지. 그게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해.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함께 하는 친구.” 준억은 태운의 말에 잠시 그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하동훈은 너와 함께 하는 게 아니라 네가 나쁜 짓을 하도록 부추기는 녀석일 뿐이야. 그 녀석은 흥미를 잃는 순간 너를 버릴걸. 동훈은 질이 나쁜 아이야. 진정한 친구는 고민을 털어놓거나 약점을 드러내면 그것을 감싸지. 하지만 나쁜 친구는 약점을 드러내면 오히려 그걸 이용한다고. 조심해, 그에게 너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도록.”

“넌 그냥 내가 걔와 노는 게 싫은 거야.” 태운은 준억의 충고에 으스대며 말했다. 준억은 더 이상 태운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고 그들은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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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3화]









주간체육시간은 벽산고등학교에서 마련한 것으로 토요일 2, 3교시 동안 한 학년 전체가 나와서 선생님과 학생이 어울려 체육을 하는 시간이었다. 체육활동의 꽃은 뭐니 해도 축구였는데 여덟 반 중 가위 바위 보로 한 반을 뽑아 선생님들과 승부를 겨루곤 했다. 오늘은 8반 반장이 이겼기에 어쩔 수 없이 1반 학생들은 다음을 기약하고 운동장 구석에 모여 족구공을 가지고 놀았다.

족구팀 구성은 게임이 끝날 때마다 바뀌었는데 처음에는 5 대 5으로 인원이 구성되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인원이 빠져 나중에는 3 대 3로 줄어들었다. 태운과 동훈은 한 팀이 되어 끝까지 남아서 족구를 했고 반대편에서는 준억이 상빈 등과 함께 공을 찼다. 그들의 실력은 엇비슷해서 게임마다 1점이나 2점의 극소한 차이로 끝이 났다. 오랜만에 하는 운동이라 그들은 시간가는 줄 몰랐고 2교시 종이 울리고도 시간이 훨씬 지나서야 족구를 그만두었다.





“덥다, 더워.” 태운이 크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땀은 겨드랑이를 흠뻑 적셨고 등 전체도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샤워장에 가서 씻고 오자.” 동훈이 애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 학교에 샤워장이 어디 있니? 기껏해야 화장실이 전부지.” 중찬이 동훈에게 핀잔을 줬다.

“음악실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봤어.”

“거긴 선생님들만 사용하는 샤워장이잖아. 걸리면 어쩌려고?” 중찬이 말렸다. 그의 말에서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뭐 어때서?” 중찬이 동훈을 끔찍하다는 듯 쳐다봤다. 동훈은 다른 애들을 둘러보았지만 다들 고개만 가로 지을 뿐이었다. 그중에는 준억도 있었다.

“태운아, 어때?” 태운은 동훈의 말에 망설였다. 사실 문제아로 찍힌 지금 경력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훈의 말 한마디가 그를 샤워장으로 데려가게 만들었다.

“쟤네들은 다 겁쟁이 계집들이라 안 간단다. 넌 아니지?”





준억과 중찬, 그리고 다른 애들이 그늘에서 땀을 식히는 동안, 태운과 동훈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햇빛이 천장에 가려지고 대신 형광등이 그들을 비추자 태운이 말했다.

“우리가 샤워장에 간 걸 들키는 순간 죽은 목숨이야.”

“걱정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동훈은 태운을 안심시키며 2층으로 올라갔다. 태운은 지하에 있는 샤워장에 왜 바로 가지 않는지 의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미술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술실 안은 여러 종류의 미술용품들로 가득 차있었다. 하지만 예전에 태운이 부수었던 흉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동훈의 뒤를 따라 미술실 문을 닫은 태운은 놀랐다. 평소 학생들이 쓰는 창가 옆 책상에 선엽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불도 키지 않은 채 오직 창에서 나오는 햇빛만을 받아들이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태운이 문을 닫자 선엽이 그제야 인기척을 느끼고 그들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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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4화]









“미…. 미안해!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려서!” 선엽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동훈을 올려다봤다. 그의 두 손은 연습장을 꼭 쥐고 있었다. 태운은 가엾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이번에는 네 그림 찢지 않아.” 동훈이 온화하게 웃었다. 선엽은 여전히 불안감에 떨고 있었지만 꽉 쥐었던 두 손은 느슨해졌다.

“왜 체육시간에 그림을 그리는 거지?” 선엽은 대답하지 못했고 동훈이 말을 이어나갔다.

“이해해, 나는. 너에겐 체육시간이 고역인 거 다 알고 있어. 너는 같이 놀 친구가 없잖아. 그래서 혼자 미술실에 와서 그림을 그리는 거지. 그렇지?” 동훈의 직설적인 말에 선엽은 수치심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우리가 너랑 놀아줄게.”

“정말?” 선엽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응, 사실 우리는 샤워장에 가고 있었거든. 같이 가자.”

“안 돼. 샤워장은! 거긴 선생님들만 들어가. 거기 가면 혼나!” 선엽은 단칼에 거절했다. 태운은 동훈의 표정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진 것을 보았다. 동훈은 곧 따뜻한 미소를 회복했다.

“하지만 넌 친구와 함께 어떤 일을 해본 적이 없잖아. 우리 셋이 더 친밀해질 수 있는 기회라구.” 선엽은 친구라는 말에 흔들리는 듯 했다.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고 동훈은 매우 기뻐했다.





“나를 따라와.” 그들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단 끝에 도착하자 음악실이 보였고 그 옆에 작은 샤워장 문이 있었다.

“세 명이서 함께 들어가면 선생님들이 언제 샤워장으로 들어올지 모르니 2명 먼저 씻고 1명은 보초를 서기로 하자. 샤워가 끝나면 교대하고.” 동훈이 제안했다. 선엽은 이마를 찌푸렸다.

“너희들, 나를 보초로 세우고 내가 샤워장에 들어가면 도망칠 속셈이지? 동훈 널 못 믿겠어. 넌 내 그림을 찢었잖아.” 선엽이 말했다.

“그건 오해야! 난 네가 싫어서 괴롭힌 게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었다는 관심의 표현일 뿐이었다구. 점순이 몰라? 네가 내 마음을 몰라주다니 실망이다.” 동훈이 극도로 부인했다. 그러나 선엽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동훈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그만둬. 나의 착각이었나 봐. 태운아 샤워는 다음으로 미루자.” 동훈은 태운을 끌고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다.

“알았어. 믿을게. 미안해.” 동훈의 가장된 협박에 선엽은 항복하고 말았다. 태운은 쉽게 무너지는 선엽을 보면서 그동안 그가 우정에 얼마나 굶주려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미 늦었어. 나는 네가 나를 믿는다는 걸 못 믿겠어. 다만….” 동훈이 말끝을 흐렸다.

“다만?”

“다만 네가 먼저 보초를 선다면 네 진심을 믿을지도.”





“응응, 알았어. 내가 설게.” 선엽이 동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결국 선엽은 샤워장 문 앞에 섰고 태운과 동훈은 옷을 벗고 샤워장 안으로 들어갔다. 온수가 그들의 몸과 부딪치며 콸콸 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샤워장은 곧 뜨거운 물안개로 가득 찼다.

“봐. 내가 걸리지 않고 씻을 수 있다고 했지?” 동훈이 온몸에 비누칠을 하며 씩 웃었다.

“잡담 나누지 말고 빨리 해. 선엽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잖아.” 태운이 재촉했지만 동훈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 느긋하게 씻었다. 결국 샤워는 15분가량이 지나서야 끝이 났고 그들은 몸을 말리고 옷을 걸쳐 입었다.

“선엽아, 우리 다 끝났으니까 들어가서 샤워해.” 동훈이 말했다.





“벌써 쉬는 시간이 되기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는데 괜찮을까? 조금 있으면 선생님들이 축구를 끝내고 샤워하러 올 텐데.” 태운이 걱정하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냥 가기엔 선엽이 기다린 시간이 아깝잖아. 걱정 붙들어 매고 선생님 오면 말해줄 테니까 빨리 들어가.”

“꼭 말해주기다.” 선엽은 수차례 당부를 하고서야 샤워장 안으로 들어갔다. 태운이 지하에 누가 오는 건 아닌지 살펴보고 있는데 동훈이 그를 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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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5화]









“가자.” 동훈이 속삭였다.

“어딜?”

“내버려두고 가자고.” 동훈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샤워장 안에서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난 기다릴래.” 태운이 말했다.

“재밌잖아. 답답하게 왜 그래. 이건 그냥 장난일 뿐이야.” 태운은 동훈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장난기 가득한 눈을 보니 마음이 흔들렸다. 순간 같이 가지 않는다면 남자답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태운은 그가 장난도 제대로 못 치는 계집애처럼 보일까봐 두려웠다. 준억처럼 지루한 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설마 선생님들이 샤워장에 올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 다음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10분밖에 안 남았는데 선생님들이 샤워장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았다.

갈등 끝에 결국 태운은 동훈을 따라 함께 선엽을 내버려두고 교실 쪽으로 올라갔다. 죄책감도 잠시, 뛰어가는 도중 태운은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동훈과 태운은 나쁜 짓을 함께 하고 있었다! 준억은 동훈이 함께 행동하지 않고 부추기기만 한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준억도 틀릴 때가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준억이 그에게 말한 ‘자기혐오’에 대해서도 틀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운은 기분이 무척 상쾌해졌다. 그들은 곧 1반 교실에 도착했고 딱 맞게 4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태운은 사물함에서 윤리 교과서를 꺼내 동훈의 옆자리에 앉았다.



“선엽은 괜찮겠지?” 태운이 물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걱정해서 묻는 것이 아닌, 태운 그만의 ‘우리 나쁜 짓을 저질렀어!’라고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당연하지 별 일 있겠어? 걸렸더라도 꾸중 몇 마디 듣고 치웠겠지 뭐. 지금쯤이면 옷을 입고 있올 거야.” 윤리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수업종이 친지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선엽은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오지 않는 거지.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너무 심한 장난을 쳤나봐.” 윤리 선생님의 이목을 피해 태운이 걱정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태운에겐 준억이 틀렸다는 해방감도 잠시, 선엽을 향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반면 동훈은 별로 걱정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태운에게 왜 잘 자고 있었는데 깨웠냐고 핀잔을 줬다. 이런 동훈을 보자 태운은 괜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준억은 태운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태운은 준억이 말한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걱정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펜을 잡고 필기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탁학섭 선생님이 들어왔다. 탁학섭은 8반 자연계 특반의 담임으로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다.

탁학섭 선생님의 화난 표정 뒤로 한 나체의 남학생이 중요부위만 두 손으로 가린 채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박선엽이었다. 1반 학생들은 벌거벗은 선엽을 보고 저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박수를 치면서 비웃는 학생도 있었다. 탁학섭 선생님은 황규일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말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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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6화]









“조용, 조용!” 순식간에 왁자지껄했던 교실이 조용해졌다.

“방금 이 녀석을 샤워장에서 발견했다. 선생님들만 쓰는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있었다.”

“정말이야? 싸이코가 드디어 미쳤나봐.” 태운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동훈은 그저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처럼 크게 웃어댔다.





“선생님만 이용할 수 있는 샤워장을 쓴 건 교권에 대항하겠다는 의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탁학섭 선생님은 말을 끝내며 태운을 쳐다봤다. 태운은 시선을 피하는 대신 그를 노려봤다.

“그에 대한 벌로 1시간 내내 알몸으로 수업을 듣는다. 이 벌을 받고 나면 어디서는 옷을 입고 어디서는 옷을 벗어야 할지 잘 알겠지?” 선엽은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수치심에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선엽이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고, 황규일 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했다. 선엽이 애써 가리면서 책을 꺼내는 모습은 너무도 딱해보였다. 반 학생들은 그런 모습에 비웃기 바빴다.





“자, 다시 누드 교과서 56페이지를 편다.” 황규일 선생님의 말에 교실의 전 학생들이 크게 웃어댔다. 동훈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아마 황규일 선생님이 교직 생활을 한 이래 가장 재미있는 말일 거야. 비록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태운은 동훈의 말을 들으며 선엽을 주시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울 것 같았다. 안쓰러웠다. 다행히 태운 혼자만 안타깝게 생각한 건 아닌 듯 했다. 황규일 선생님이 사물함에서 아무 수건이나 꺼내서는 선엽에게 건네주었다.

“감, 감사합….”

“그런데 샤워장에는 왜 갔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넌 그럴 애가 아닌 걸 알고 있어. 누구와 함께 간 거니?” 선생님은 궁금하다는 듯 선엽을 쳐다봤다. 선엽은 입을 떼고 태운과 동훈을 바라봤다. 동훈은 선엽을 노려보고 있었다. 선엽은 그의 눈빛을 읽고서는 힘없게 대답했다.

“어제 샤워를 안 하고 잤더니 찝찝해서….”

“더러운 자식.” 여기저기서 선엽을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동훈아, 사실을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도 친구잖아.” 태운이 동훈에게 속삭였다.

“선엽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자고? 됐다. 그게 내 평판에 얼마나 금이 갈지 알고 있니? 설마 순진하게 내가 선엽에게 한 말을 믿진 않았겠지?” 동훈이 벌컥 성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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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짓궂은 장난 [6장 완결]









수치심과 비웃음으로 가득했던 윤리시간도 끝이 나고,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선엽은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누구도 선엽에게 다가와 괜찮은지 물어보는 사람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선엽은 1반의 투명인간이었다. 태운도 애써 그를 모른 척 했다. 그에게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것이 병 주고 약 주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차라리 그를 무시하는 편이 쉬웠다. 하지만 선엽은 그런 태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훈과 태운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리고는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얘들아, 정말 재미있었어. 다음번에도 가자.” 태운은 선엽의 뜻밖의 말에 놀랐다. 윤리시간에 분명 그는 괴로워했었다. 부끄러워했고 그의 눈에는 억울함이 스며들어있었다. 간간히 분노도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든 자존심을 버린 채 동훈과 태운의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친구가 되어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는 진정으로 친구를 원했던 것이었다.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내가 너랑 왜 놀아? 왕따 새끼가.” 동훈은 불쾌한 표정으로 그를 크게 비웃었다. 잇따른 동훈의 말은 선엽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그리고 아까 전에 너, 말하려고 했지? 우리를 선생님한테 찌르는 순간 네 인생은 끝장나는 줄 알아. 입단속 철저히 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선엽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모자를 쓰고 책상에 엎드려 자는 시늉을 했다. 선엽의 행동을 보면서 태운은 그동안 선엽이 쉬는 시간마다 웅크렸던 이유를 깨달았다. 선엽은 그간 잠을 자지 않았다. 친구가 없었기에 쉬는 시간이면 자는 시늉을 했던 것이었다.

태운은 짝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표정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선엽의 괴로움에 행복해하고 있었다. 그제야 태운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동훈의 실체를 알아차렸다. 그는 태운의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크로머’였다. 다른 애들을 괴롭히고 나쁜 짓을 일삼았던 크로머, 싱클레어를 협박하여 잘못된 길로 꾀었던 크로머! 악의 세계를 대표하는 프란츠 크로머였다!

태운은 동훈의 악행에 동참한 자신을 책망했다. 그는 크로머에게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을 한 싱클레어와도 같았다. 아니 더 나빴다. 태운은 자신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태운은 본능적으로 동훈에게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검은 태양과 같은 존재였고 태운은 더 이상 새까맣게 그을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밝은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음 수업시간에는 같이 오목이나 두자.” 동훈이 그에게 제안했다. 태운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어디선가 데미안 같은 존재가 나타나 동훈을 그에게서 떨어뜨려버리기를 빌었다. 하지만 태운은 현실세계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피터 팬이 필요 없는 소년의 자립성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립성을 열 수 있는 열쇠는 그 자신 안에 들어 있었다.

“아니. 원래 자리로 돌아갈래.” 동훈이 낌새를 알아채고 물었다.

“날 피하는 거야?”

“넌 정말 심성이 고약한 놈이니까.” 태운이 용기 내어 말했다.

“뭐? 나는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학생이야.”

“그럼 선엽을 괴롭히는 행동들은 뭐지?”





“모범적인 거랑 멍청한 놈을 괴롭히는 거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야?” 태운은 황당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준억을 바라봤다.

“박태운, 너 저딴 녀석 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거야? 네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동훈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뾰족한 이가 보였다. 태운은 그의 목소리가 선엽을 협박했을 때와 같다는 걸 느꼈다. 태운은 동훈의 집요한 협박에 더 이상 응하지 않았다. 태운은 준억 옆에 앉았다. 준억은 그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준억아….”

“말하지 않아도 돼. 네 표정에서 알 수 있어. 돌아온 걸 환영해.” 태운은 더 이상 구차하게 준억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다. 준억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태운이 악한 세계에 발을 디뎠었고 다시 선한 세계로 돌아왔음을.

5교시 수업시간과 토요일 자습시간은 아무 탈 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 태운이 오랜만에 맞이하는 온화한 오후였다. 태운은 자습시간 내내 글쓰기에만 몰두했다. 도문호 선생님에게 보낼 편지였다. 마지막 종이 울리고, 다른 학생들이 집에 가기 위해 가방을 정리하고 있을 때 태운은 교무실에 들어갔다. 그는 원고지뭉치와 한 장의 편지지를 텅 빈 책상 위에 몰래 올려놓고 나서야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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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14:2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