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할 말이 있어요.]
씻고 나오자 아내가 말을 꺼냈다.
[아이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말해주세요.]
잠시 침묵.
[알았어요.]
[재촉하지 않을테니까, 금요일 저녁에 답해주세요. 주말에 시댁하고.. 친정 다녀오기로 했잖아요? 그 때 말씀드리게요.]
아내는 방 문을 닫았다.

2. 매주 월요일 아침에 있는 사장실에서의 대화는 여전하다.
[별 일 없지?] [예, 그렇습니다.] [그래. 올라가 봐.]
다만 이번주는 한 마디가 추가되었다.
[토요일에 오나?]
문 앞에서 대답했다.
[그 날 아침에 가겠습니다.]

3. 세 달 남짓 전부터 팀원들은 그와 미묘하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왕의 남자'같은 농담은 그저 시덥잖을 뿐, '데릴사위'류의 냉소는 다른 부서에서 파다했다.
부러워하는 남자들, 어이없어 하는 여자들. 그 누구도 본심을 물어보지 않는다.
대답을 들으면 수많은 감정에 파묻혀 버릴지도 모르므로.

외롭다.
어차피 평사원, 실컷 일을 시켜도 좋으련만 임원까지 그의 눈치를 보는 마당에 누구도 업무를 부탁하지 않는다.
그의 일과 중 1/5은 협조 부서에서 일을 받아오는 것이다.
업무 시작 30분 전에 출근, 12시부터 홀로 조용히 점심, 6시 조금 넘어 다른 팀원들과 퇴근.
그는 야근을 권장하지 않는 회사 문화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겼다. 퇴근시간이 그래도 비슷하니까.
뒷담화를 듣기 싫어 최대한 열심히 했고 출장도 꺼리지 않았다. 험한 일도 나서서 했다.
그러기를 석 달, 그가 조용히 있자 그는 조금씩 화제에서 벗어났다.
다만 '이제 취미로 회사다니겠네' 하는 부러움 반, 질투 반의 대화는 여전히 회색빛 담뱃재, 식은 커피와 함께 있었다.

4. 금요일은 결혼 후 100일이 되는 날이다.
남편은 시간되면 밖에서 식사하자는 말을 꺼냈고, 아내는 동의했다.
몇 가지가 빠졌지만 어릴적부터 막연히 생각해온 무난한 결혼생활이었다.
그러나 몇 가지가 빠졌기에 이를 결혼생활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싶은 결혼생활이다.
사랑과 진실, 혹은 진심 - 우리 부부에겐 이게 없나, 하고 아내는 생각했다.
작고 아담해서 그냥 보기엔 공부 잘하고 성실해 보이던 남자,
그러나 처음 눈을 봤을 때 조금 두려웠었다. 상처와 절박함이 가득하던 그 두 눈.
지금 그녀를 보는 눈은 여동생을 보는 그것이지만 그 눈초리를 잊을 수가 없다.

룸메이트, 그것이 아내가 자신과 남편을 정의하는 관계였다.

5. 아내가 아르바이트를 마치는 시간이 7시, 6시가 조금 넘어 퇴근하는 그는 그녀가 일하는 곳 근처에 와 있었다.
결혼 후 그녀가 하고싶은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이 정규직 직장의 퇴직과 카페 취업임을 듣고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가 더 행복할 수 있다면 이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사장의 딸치고는 씀씀이가 적어서 돈은 모이고 있었다.
원하는 것은 언제고 말하라 했었고, 그녀의 생일에는 가방이 낡아보여 핸드백 하나를 사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도 달라하지 않았다.

아내는 정직하고 진실했다. 굳이 묻지 않아도 그녀의 모든 일상은 그의 휴대전화로 들어왔고 흔한 고부갈등조차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가 목요일에 휴가를 써달라고 연락하자 즉시 팀장에게 휴가결제를 올렸다.
[비뇨기과와 산부인과를 가야겠어요] 라는 내용을 보고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 없이.

사랑이 맞느냐? 진심인가? 두 가지 의문 모두에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를 믿느냐? 하면 믿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어줍잖은 감정보다 차라리 확고한 신뢰가 낫다, 라는 신념에 응답하듯이.

그는 얼음조차 녹아버린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그냥 구상하던 글입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8 03:37: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