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노인은 모래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한낮이라 케이블 밖에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요즘 연예인은 알지 못 했고, 자연스레 다큐멘터리나 건강 정보 프로그램 밖에 보지 못 했다. 동물이 나오는 내용은 이제 지겨웠다. 준 전문가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보는 프로그램은 건강 프로그램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흥미가 생겼다. 따라서 불쾌한 감정은 정규 프로그램 때문이 아니었다. 중간에 나온 광고 때문이었다.

광고의 내용은 요실금용 성인 기저귀였다.

‘나이가 들면 방광의 기능이 약해지고 둔해져 소변이 새어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이것만 있으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습니다.’

정 노인은 텔레비전을 껐다. 광고에서 나온 증상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정 노인은 요실금의 전조를 직접 겪고 있다. 하지만 아직 기저귀를 사용하진 않았다. 유아기로 퇴행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못 했다. 어른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기저귀를 차고 며느리한테 당당한 시아버지 없다.’

노인정 최 노인의 말이었다. 그는 부쩍 자신감을 잃었다. 군인 출신으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다니던 최 노인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고개를 숙였다. 당당한 모습이 사라진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 노인은 시계를 봤다. 오후 세 시였다. 손녀인 혜수가 돌아올 시간이다. 정 노인은 일어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요새 부쩍 귀염을 떠는 손녀 보는 재미가 유일한 낙이었다.

외투와 모자를 눌러쓰고 정 노인은 밖으로 나섰다.

-

[할아버지는 왜 만날 모자 써?]

어린이집 차에서 내리자마자 혜수가 물었다.

[선생님께 먼저 인사 드려야지.]

정 노인은 혜수에게 말했다. 그러자 혜수는 입을 동그랗게 만들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획 돌아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혜수도 잘 가. 할아버님 안녕히 계세요.]

어린이집 선생은 사람 좋은 웃음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노란색 어린이집 차는 심하게 쿨럭이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정 노인은 혜수를 봤다. 혜수는 정 노인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응?]

혜수가 굉장히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 노인은 한참 생각하다 겨우 대답했다.

[모자 말이냐?]

[응, 왜 항상 모자 써?]

정 노인은 모자를 살짝 들어 이제 민둥산이 된 머리를 쓸었다.

[할아버지 나이가 되면 머리가 다 빠져.]

[모자는 안 빠져도 쓰잖아.]

[머리카락이 없으면 굉장히 춥거든.]

정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혜수는 쪼르르 다가와 손을 잡았다. 혜수는 아직 크지 않아서 정 노인의 손을 다 잡을 수 없었다. 혜수는 정 노인의 검지와 중지를 왼손으로 잡고 겅중겅중 걸었다.

[머리카락은 그럼 다시 안 나?]

[응, 안 나.]

[나 그럼 할아버지 안 할래.]

정 노인은 허허 웃었다.

[할아버지는 안 되도, 한참 지나면 혜수도 할머니가 될 텐데? 그럼 머리 빠질지도 몰라.]

[백 밤 자면?]

혜수에게 가장 먼 시간이었다.

[더 지나면.]

혜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할아버지, 집에 가면 머리 빗어줘요.]

[그래. 그래도 앞은 보고 가야지?]

[응]

대답을 하고도 머리에 신경이 집중된 혜수였다. 정 노인은 허허 웃으며 혜수를 안아 올렸다. 버릇 나빠진다고 며느리는 좋아하지 않지만, 정 노인은 체력이 되는 동안은 손녀를 안고 싶었다.

[할아버지한테 좋은 냄새 나.]

혜수는 정 노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정 노인은 혜수의 머리를 빗어주면서 텔레비전을 봤다. 며느리는 오후 7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왔다. 맞벌이를 하기에 어린이집이 끝나는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는 정 노인이 혜수를 돌보았다. 정 노인에게 가장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다.

아침 일곱 시에 아들 내외가 출근하면, 정 노인이 혜수를 씻기고 어린이 집에 보냈다. 며느리가 살림을 도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들의 벌이보다 며느리의 벌이가 좋았다. 또 생활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다. 혜수가 어린이 집을 다니면서 더 지출이 늘었다. 원래는 저녁까지 맡길 생각이었으나, 정 노인이 직접 며느리에게 제안했다.

[내가 돌보면 되니 아가는 걱정 말고 일 보고 와.]

며느리는 못 이기는 척 하며 정 노인에게 혜수를 부탁했다.

[할아버지 이거.]

혜수는 정 노인의 목에 뭔가를 파란색 스카프를 매주었다.

[이게 뭐야?]

[할아버지 춥지 말라고 내가 매주는 거야.]

[하하, 우리 손녀가 최고네.]

혜수는 한참이나 낑낑 거리며 목에 스카프를 맸다. 집에 돌아온 며느리는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제 스카프는 왜 목에 하고 계신 거예요?]

[아, 이게 아가 거였니?]

혜수가 엄마에게 달려가 안기며 말했다.

[내가 매줬어. 할아버지 따뜻하라구.]

며느리는 혜수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부비며 말했다.

[그랬어? 우리 혜수 착하네.]

[헤헤.]

정노인은 스카프를 풀었다. 그 모습을 보고 며느리가 웃으며 말했다.

[아버님 그거 혜수가 선물해드린 거니까 사용하셔요. 저는 이제 쓸 일이 없는걸요.]

[아니다. 아냐.]

[아버님께 잘 어울리는 걸요. 또 오월이라고 해도 아직 바람이 차요. 저는 괜찮으니 아버님이 쓰세요.]

며느리는 그렇게 말하고 부엌으로 급히 들어갔다. 저녁을 다 먹고 아홉 시가 넘어서야 아들이 귀가했다. 부녀는 혜수가 잠들기 직전에 잠깐 동안만 상봉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경기가 좋지 않아 귀가는 점점 더 늦어졌다.

[아버지, 오늘 혜수한테 별 일 없었어요?]

[오늘은 구구단 배웠다고 내 앞에서 열심히 외더구나. 일은 좀 어떠니?]

[그렇죠 뭐.]

서로의 하루를 묻는 대화가 오갔다. 주된 이야기는 물론 혜수였다. 열시가 채 되지 않아 정노인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이가 들수록 밤잠은 많아졌다. 반대로 새벽잠이 없어졌다. 그 날 밤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

새벽달이 빛 속에 파묻히기도 전에 정 노인은 눈을 떴다. 아직 사위는 어두웠다. 그리고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 났다. 그건 이불 아래 아랫도리 부근이었다. 초등학교 때 무서운 이야기 듣고 다음날 아침에 느꼈던 축축한 느낌. 키를 쓰고 소금을 얻으러 다닌 유년 시절에서 끝나야 할 느낌이 났다.

불을 켜니 더욱 확실해졌다. 요의조차 느끼지 못 했는데 실례를 한 것이다. 정 노인은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내가 늙었구나. 나이를 의식하게 되고 절망감이 찾아왔다. 그리고 유년 시절의 일을 되풀이 했다. 젖은 속옷을 몰래 내놓고 이불보를 벗겼다. 그 때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뭐 해?]

혜수가 눈을 비비며 방으로 들어왔다. 정 노인은 아찔함을 느꼈다. 손녀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

혜수가 얼룩이 진 이불보를 보고 사태를 이해한 듯 했다. 정 노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움직이지 못 했다. 하지만 혜수는 방문을 소리가 안 나게 닫더니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쉬잇.]

정 노인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멍 하니 혜수를 바라봤다. 혜수는 쪼르르 달려와 조그만 몸으로 낑낑대며 이불을 접었다. 정 노인은 그런 혜수를 도와 이불을 다 포갰다. 혜수가 고개를 들어 속삭이며 말했다.

[이건 할아버지랑 나만의 비밀!]

정 노인은 사태를 이해했다. 그리고 검지를 입술에 댔다.

-

[오늘은 노란 장화 신자.]

정 노인의 말에 혜수는 잔뜩 기대하는 표정이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노란색 장화, 우비, 우산을 준비했다. 노란색이 가장 좋다며 혜수는 폴짝폴짝 뛰었다. 봄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는 봄비가 가만가만 내렸다.

[넘어질라 천천히.]

[응.]

혜수는 무릎을 굽히지 않는 걸음으로 물장구를 치며 걸었다. 정 노인은 우산을 팔을 뻗어 혜수의 머리 위로 들었다. 때문에 등은 젖고 있었다.

참방 참방.

노란색 어린이 집 차 앞에 도달했다. 혜수는 차에 올랐다. 그리고 정 노인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 우리 손녀.]

정 노인도 손을 흔들며 대답했다. 차가 떠나고 정 노인을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의 뒷모습이 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아도 한참을 서 있었다. 젖은 어깨를 털고 정 노인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녀와의 은밀한 비밀을 공유한 할아버지는 아침까지 생각을 했다. 요실금이 시작된 거라면, 기저귀 없이 외출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외출하지 못 하면 이 작은 행복도 포기해야 했다.

정 노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침침한 눈으로 아들의 번호를 찾았다. 하지만 쉽사리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 했다.

한참을 빗속에서 휴대폰만 만지작거렸다. 머리로는 결정이 났지만, 손끝이 움직여 주지 않았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혜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정 노인은 숨을 깊이 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는 동안,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기 위해서 손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응, 수환이냐? 애비다. 그게 말이다…….]

정 노인의 하얀 입김이 빗속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