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클릿에 실린 인터뷰



어떤 경위로 그렌라간의 일을 맡게 되었나요
실은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거절할까도 생각했어요.
소위 말하는 로봇 애니메이션의 음악 –창문이 불길에 흔들리며 들리는 오케스트라- 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곡을 잘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음악의 연장 이지 않나. 라는 인식이 있어서요.
아이들만이 대상이라면 뭐, 괜찮을 것도 같지만, 성인도 보는 애니에서 만드는건 아깝다는 생각도 들고,
좋아해서 보는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쓰이는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버려요.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제게 이 일이 들어왔다는게 신기해요.

이와사키상이 선택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요?
결정적인 이유를 말하라고 하면 어렵고,
[흔한 로봇 애니메이션의 음악이 아닌 이와사키상이 납득하는 수준에서 성인들도 만족할 수 있는 음악] 이란 리퀘스트를 받았습니다.
이미지보드나 설정 같은걸 보고 그림이 굉장히 멋지다고 느꼈고,
그렇다면 저를 지명한 것에도 어떤 의미가 있을것이란 생각이 든거죠.
일을 받아 들인 후 각본이랑 콘티가 놓여져 있어서 봤는데, 앞으로 어떻게 곡을 써야 할지 머리를 쥐어짰어요(웃음)

일을 받고 나서, 이제부터 어떻게 작업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으셨다구요?
네, 보통 같으면 콘티를 보는 단계에서 곡이 떠오르거나 그러는데 이번엔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아무래도 흔한 로봇 애니 같은 음악이 아니면 안되지 않나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거죠.
[이미지에 맞춘 결과]라고 잘라 말해버리면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잘라 말한 순간부터 1달이나 그런 짓을 계속 하면
스트레스로 미쳐버릴지도 몰라요(웃음). 그리고 그렇게 만든 노래들은 영혼이 들어가 있지 않을뿐더러,
작품에 대해서도 성실하지 못한 거구요.
그래서 고난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겠구나란 생각을 했죠.
이건 철저하게 로봇 애니의 음악을 거부한다는걸 의미합니다.
[로봇 애니 음악으로 기대 받을 만한 것]은 조금도 보여주지 말자란 생각으로 만들자고 생각했는데 역시 좀 무리가 있었죠.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의 BGM의 작곡이란건 애니메이션의 세계관으로 만들어지는건데 그걸 부정해 버리는거니까요.

지금까지 이와사키상이 담당했던 작품에서는 이렇게까지 고민했던 적이 없었습니까?
뭐, 어떤 작품에서도 이렇게 해매긴 하지만요.(웃음) 하지만 이번에는 지금까지 느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어요.
회의 후 2주간동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어요.
반년이란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니 어떻게든 맞춰진거지…

이렇게 고민하고 고민했는데, 실마리는 어디서 발견했나요?
어디를 공략해야 할까.. 엄청 고민했습니다. 어떤 부분을 음악의 희망과 상상력을 빌어 표현할까..
그 답은 카미나의 테마인 랩이었습니다.
반골정신(권력, 귄위, 시대풍조에 반항하는 정신)이라는 것의 메타포(비유)로 음악을 붙였을 경우,
오케스트라나 재즈 혹은 락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한물 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랩이라면 아직 (어디까지나 “아직”이지만)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나..라고 생각합니다….
핑계일지도 모르지만.

랩이 돌파구였군요.
랩부터 만든건 아니지만, 랩을 쓰면서부터 그제서야 [이걸로 가자]라고 생각했죠.
랩은 스토리 속의 [힘(力)]에 대항하는 상징이며, 그것이 [그렌라간] 음악의 핵이 되었습니다.
처음 카미나의 랩[랩은 남자의 영혼이다(카미나의 테마)]를 시작으로 파생된 멜로디가,
카미나의 혼에서 파생된 그렌라간단의 테마 [랩은 남자의 영혼이다!(대 그렌라간단의 테마)]가 된거죠.
그리고 카미나의 테마가 혼자인거에 비해 대 그렌라간단의 테마는 상대 랩퍼를 늘여서,
카미나의 영혼이 대 그렌라간단의 영혼으로 넓혀진(노리고 한거 같지만(웃음)) 연출도 가미 되었구요.

3부에 시몬이 투옥되는 장면에서 사용된 [랩은 남자의 영혼.. 이었…지]에선 랩을 기계적으로 변조해서 음악적인 기술로 변화시켜
[이 영혼은 정말 의미가 있었나?]라고 묻는 형식으로 했습니다.

그리고 최종 결전을 위해 쓴 [“Libera me” from hell]에서는 짖누르는 듯한 소프라노의 성압에 맞서 대항하는 랩이란 구성으로 되어 있어요.
소프라노 부분은 Libera me라는 미사의 전례문중 한 절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 입니다.
억압하는 한편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는, 더블바인드의 상황이죠.
(이중 구속. 두개의 모순 된 명령을 받은 사람이 그 모순을 지적하는 것도 안되고, 모순에 대답 해야하는 상황)

[어디로 가면 되는거야]라는 상황에서 원래 카미나의 영혼이기도 하고,
대 그렌라간단의 영혼이기도 한 랩이 어떻게든 그것을 돌파하려고 발버둥치고, 싸우며 대항하죠.
이런 음악적인 구성을 이용해 최종적인 다이나믹스, 크라이막스를 만들어 내려고 했어요.
랩이 여러 형태로 의미를 바꿔 등장해 음악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이 흐름은 나카시마 카즈키상의 시나리오에 호응하고 싶단 바램도 들어있습니다.
말의 의미를 짜맞춰서 이야기를 견고하게 이끌어 나가는 나카시마상의 각본이 너무 훌륭해서 음악으로 응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카미나가 랩을 부르면서 하늘을 가리키며, 간멘을 물리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단순한 상상을 하기도 했네요.
이번에 제가 쓴 곡들은, 랩 뿐만 아니라, 식상한 로봇 애니 음악을 거부하는 발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말하자면 영상과 음악으로 싸움 붙이려고 한 음악입니다. (웃음) 것보단, 싸우게 만들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음악인 것이죠.

랩을 중심으로 음악 전체를 발상했다는 거군요.
타이틀에 [랩은 남자의 영혼이다]라고 있는데 실은 [랩은 음악의 영혼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렌라간]의 음악의 영혼은 랩에 있어요.

이 앨범의 컨셉은 뭡니까
일반적으로 사운드 트랙이라 함은 본편에서 자주 사용된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앨범은 좀 다른 방향으로 가자고 생각했죠. 아까, 랩은 음악의 영혼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실은 본편에서 랩은 그다지 많이 사용되고 있지 않아요.
굳이 말하자면 사사롭거나 로봇 애니의 요소가 담겨있는 음악이 많이 사용됐어요.
물론, 그런 것들도 제대로 만들긴 했지만, 처음이 로봇 애니 같은 음악은 만들지 말자였으니 제게 있어선 약간 바람 빠진 듯한 느낌이에요.
그런 곡들로 앨범을 가득 채워봤자, 재미없을것 같았고, 개인적으로는 제대로 음악의 영혼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앨범으로 만들고 싶었죠.
베스트 앨범으로, 제가 납득한 곡들로 채워진 결과가 바로 이 앨범입니다. 1장의 음악 앨범으로써 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이 앨범을 사운드 트랙이란 의미뿐 아니라 이와사키상의 하나의 작품으로도 들어달란 소린가요?
네, 그리고 [그렌라간]의 세계를 음악으로 표현했으니 그 점도 유의해서 들어주세요.

어떤 기준으로 곡 순서를 정했나요
편하게 스토리의 순서대로 정했어요.
1화에서는 아반에게 맞춰 대 그렌라간단의 테마로 시작해서, 그 후 고독한 시몬의 곡, 그리고 요코와의 만남.

랩이나 코러스 또는 비라르의 테마 (Nikopol) 처럼 락의 느낌이 나는 곡이 많은 듯 해요
사람의 목소리가 들어간 곡은, 영상음악으로써는 꽤 민감한 부분이에요. 왜냐면 대사와 겹쳐지기 때문이죠.
그런 부분은 엔지니어링 레벨로 겹쳐지지 않게 신경써서 만들었습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스템믹스라는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보통 음악은 스테레오 2채널을 믹스한 형태로 드리는데, 스템믹스는 리듬, 오케스트라, 특정한 악기, 노래.. 각각 따로따로 드리는거죠.
그럼 더빙할 때 노래가 좀 크다 생각되면 노래의 레벨을 줄이면 되는겁니다.
최근엔 계속 이런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음악적으로는 과격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은 사용하기 쉽게 신경쓰고 있답니다. (웃음)

3부, 4부의 곡들은 음악 스타일이 바뀌었네요. 1부와 2부때 만들때와 접근 방법이 달랐나요?
아뇨, 똑같아요. 여전히 힘들었어요. 다만, 3부 이후는 흔히 말하는 로봇 애니의 전개가 아니었지요.
전보다 훨씬 인간 드라마 같은 부분이 나오기 시작해서, 그런 의미로 영상과 조금은 사이가 좋아진 곡들이 많았다고 생각해요.

곡의 타이틀도 직접 생각하신 건가요?
예를 들면, [출격!], [싸워라!! 그렌라간단] 같은 로봇 애니의 사운드 트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타이틀은 어떨까, 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음악도 장면을 설명하는 것만 사용되는게 아니니까, 그런 타이틀을 붙이는건 피하고 싶었어요.
영어로 깔끔하게 정리해버리는 것도 식상했고, 이왕하는거 철저하게 과장해버리거나, 의문스럽게 던지거나,
말도 안되는 타이틀은 어떨까 싶어서 달았어요.

[그렌라간]의 작업을 돌아보며, 지금까지와의 작업과는 다르다고 느낀 점은?
지금의 애니메이션이 요구하는 것을 피해서 만든건 처음이네요. 대충 만들어버리지 않도록 1곡 1곡의 강도를 높여서 만들었습니다.
곡의 완성도에는 만족하고 있지만 이 앨범은 하루 한번 듣는게 한계겠죠.
그 이상 들으면 노래들에 당해버려서 넉다운 될지도 모르니까요(웃음).
지력과 기력 그리고 체력이 있는 분들만 들어주세요.

처음 애니 음악을 작업할 때와 비교해서 곡 쓰는 방법이 변했나요?
그닥 변하지 않았어요. 실은, 처음부터 소위 말하는 1분반의 TV애니메이션 음악에는 위화감을 갖고 있었어요.
TV애니메이션은 40년 정도의 이력이잖아요.
초기 애니메이션은 전위적인 작품이나 실험적인 작품도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상업적인 작품들만 클로즈업되고,
애니메이션 음악도 알기 쉬운 애들을 대상인듯한 음악이 주류였지요. 그런 것들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같습니다.
하지만, 겨우 40년 정도뿐이 지나지 않았는데 아직까지도 유치하다고 느껴지는 음악들이나 설명용의 효과음악이 사용되고 있는건 대체 머야? 라고 생각해요.
전 그런 음악을 이어가는것보다는 좀 더 음악과 영상이 [아, 이런 관련이 있구나!]싶은 곡을 쓰고싶습니다.
영상과 음악이 그 상황을 설명하는것에 그치지 않고 깊은 곳에서 싱크로 되어 긴밀한 영향을 주거나,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거나, 이런 차원의 표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가능성이 있다고 믿으니까, 계속 애니메이션 음악을 만들 수 있는거구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는 더욱 더, 음악과 그림의 연관성이 추구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2007.08.07)

천원돌파 그렌라간 BEST SOUND - "Libera me” from h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