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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아! 밥먹어야지? 빨리와.
- 네!~
안방에서 뒤적뒤적 장농을 뒤지던 다섯살 훈이가 아빠의 부름에 주방으로 나갔다.
- 아빠! 근데 방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요!
- 응?
훈이는 아빠에게 책 한권을 보여줬다.
모퉁이가 닳아있는 그 책은 꽤 세월을 탄 것 같이 보였다.
아빠가 책을 받아 들었는데, 책의 표지에는 '미적분과 통계기본' 이라는 글자가 쓰여있었다.
- 음.. 이건 또 어디서 찾았니? 엄마 옛날에 학교다닐때 쓰던 책같은데.. 뭐가 이상한데?
- 당연히 이상하죠! 어떻게 미분을 배우면서 다항함수만 배울 수가 있나요?? 그리구 여기 극한도 가르치는데 어떻게 극한과 미분을 배우면서
sinx와 tanx에서 x가 0으로 수렴할 때 함수값이 같아진다는 사실 조차 기술되어있지 않은거죠? 엉터리 투성이에요!
아빠는 간만에 맛있게 졸여진 장조림 덕에 우걱대며 먹던 밥을 양볼에 한웅큼 물고는 다소 시큰둥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먼산을 봤다.
- 거기다가 보세요. 이 책대로라면 음함수의 미분계수는 손도 댈 수 없어요!.. 지수와 로그도!.. 와 이거 진짜 엠창나네요 아빠!
아빠는 잠시 뒤 입을 열었다.
- 훈아, 그건 말이다.. 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전에.. 그러니까 니 엄마가 학교다닐 시절에 나왔던 책이야. 옛날거라서 그래
그러자 훈이는 더 발끈하며 반박했다.
- 아니에요 아빠! 아무리 옛날이라도 그렇죠! 20년이 아니라 30년전에도 분명히 파인만이 있었고 그보다 훨씬전에도 와일즈 교수는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했다구요.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훈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되물었다.
- 옛날 사람들은 원래 그럴 수도 있어. 언제나 똑똑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까. 그때는 학생들을 이과랑 문과로 나누어서 가르쳤었지.
문과학생들은 다른걸 공부한답시고 수학을 잘 하지 않았었어. 때문에 뭐 그런 점에 있어서는 ...
아빠는 방에서 빨래통을 들고 나오는 훈이 엄마의 싸늘한 곁눈질을 보고는 끝내 말끝을 흐려버렸다.
- 아.. 그런건가요? 그럼 뭐.. 대충 역사책에 나오는 원시인이랑 비슷한건가요? 미개한?.. 식인종?.. 바바리안?
- 으 음.. 그래 밥먹자 훈아
- 아 그랬네요! 역시!ㅎㅎ 말도 안돼요. 어떻게 벡터도 없이 수학을 할 수 있는지 하하하 이런 호모에렉투스 같은 것들~ 미개하기는~ ㅎㅎ
훈이는 그렇게 수긍을 하고나서야 첫 술을 뜨기 시작했다.
아빠는 엄마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밥그릇을 정리했고
훈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먼저 식탁에서 일어났다.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는 엄마의 모습에서
싸늘함을 넘어 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문득 쳐다본 식탁 위 꽃병의 백장미 몇 송이가 어제보다 자라있는걸 발견한 훈이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 엄마! 여기 백합 좀 보세요! 역시 생명은 신비로워요! 생명에 이산적인 것은 있을 수 없어요. 매 순간 연속적으로 자라기 때문이죠!
x가 0에 수렴해갈 때 (1+ x)^(1/x) 인 것 바로 그 자체에요! 바로 이대로 생명은 자라나고 있다는거에요!! 너무 예쁘다!!
엄마는 조용히 빨래를 갤 뿐이었다.
"엄마! 왜 대답이 없어요! 너무해요. 아까 제가 물어본 3차 이상의 고차함수와 사인함수가 합성된 함수의 미분을 통한 그래프 개형파악에 대해서도 아무말 안하시더니! 너무해!!"
훈이가 섭섭하다는 듯 밥그릇을 팽개치고 제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빨래를 개던 엄마의 손이 차츰 느려지더니
이내 엄마는 고개를 서서히 떨궜다.
마치 지우가 대전 도중 다쳐쓰러진 피카츄를 보며 눈물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눈가에 챙모자 그림자를 드리우듯,
엄마의 앞머리가
엄마의 눈가에 그림자를 드리웠을 바로 그 때였다.
엄마가 입가에선
금방이라도 울음보가 터질 것 같은 한껏 절제된 목소리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흡.... "
".. 엄마가..."
"무.."
"문.."
"문송하다 훈아!... 흐으윽!..."
엄마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은 눈물이었고
식탁 위에 남겨진 치우지 않은 밥상과
개다가 만 빨래가 널부러진 거실에 흐르는 것은
문송함이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3 13:37: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