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너무 좋아서 퍼옵니다.
아침부터 눈물에 앞이 안보이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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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숲 #32358번째 외침:
2015. 6. 28 오전 3:53:48
어릴 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회사 동호회에 곧잘 참석하곤 했다.
당시 아버지는 40대의 건장한 샐러리맨이셨고, 그의 성공과 창창한 앞길을 의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가 참석하신 동호회에서도 그런 그의 사회적 지위가 익히 반영되는 듯 보였다. 아버지가 웃으시면, 사람들도 함께 웃었고, 내겐 그런 광경이 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동료 직원들은 어린 내게 친절을 곧잘 베풀었고, 나는 그런 친절을 당연하게 여겼다. 항상 모두가 내게 먼저 이름을 물었고, 그럼 나는 거기에 대응하여 이름과 나이, 다니는 초등학교, 현재 성적 등을 모두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면 되는 거였다. 그건 거의 관습과도 같은 거였다. 그런 관습적인 행동 속에서 아버지는 항상 내 얼굴을 흐뭇한 듯 쳐다보셨고, 나는 그 광경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모두들 내게 이름을 물을 때에도, 딴에는 짐짓 얄궂은 표정을 지었지만, 직원들이 묻는 말에 하나씩 모두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면 직원들은 환한 보름달처럼 미소 지으며, “와, 똘똘하네!”라고 칭찬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나는 ‘이까짓거.’라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해 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칭찬받을 일도 아니었고, 머리까지 쓰다듬어질 정도의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에는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해보였다. 직원들의 관심, 아버지의 미소, 나의 만족감.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지금의 아버지는 그 시절로부터 15년이 지난 뒤의 아버지이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께서 갑작스럽게 동호회에 함께 참석하지 않겠냐는 부탁을 해오셨다. 내가 마지막으로 동호회에 따라갔을 적은 거의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었다. 그 이후로 아버지께서는 딸내미가 공부에 바쁠 거라며 동호회에 따라가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취지의 동호회였는데, 아버지는 어릴 적의 나와 함께 하던 이후로는 줄곧 혼자 참석하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오늘. 아침 식사 중에 급작스럽게 아버지께서 제안해오셨다. “너도 대학생이고, 나도 올해가 마지막 아니냐. 나 짤리기 전에 함께 가볼래?” 아버지는 올해를 마지막으로 인생의 절반을 몸담아오던 회사에서 정년 퇴직하신다. 갑자기 아버지의 허우룩한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회사 동호회는 내가 상상하던 모습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어릴 적에는 몰랐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곧 퇴직을 목전에 두고 계신 아버지는 회사 내에서 ‘불순물’과도 같은 존재였나 보다. 직원들이 버스 앞쪽에 앉아계신 아버지를 보며 까닥하고 고갯짓을 했다. 몇몇 직원들은 심지어 뒤에 있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며 아버지 쪽을 바라보지조차 않았다. 아버지는 버스 앞쪽에 차분히 앉아계셨다. 그리곤 눈을 감더니 내처 잠이 드셨다.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 위로 예전의 기운차던 동호회 때의 모습이 꿈결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자신감 넘치고 대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어제 일만 같은데. 현재 내 눈 앞에 남겨진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다 그만 눈을 돌려버렸다. 버스 뒤에서는 동호회를 떠나는 직원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오늘 동호회는 단체로 배를 잡아 낚시를 가는 거였다.
고기를 낚는 것은 처음 해보는 거라 무서웠다. 비슷한 걱정을 했는지, 함께 떠나는 사람들 모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도 이내 잠시, 고기들이 펄떡거리면서 올라오는 것을 보자 모두들 얼굴이 활짝 펴졌다. 고기를 잡아서 회를 쳤다. 하얀 살결이 물결치며 살아 움직이는 듯 했다. 상당히 맛있어 보이는 회였다. 회를 중심으로 직원들이 둘러싸 앉았다. 그 분들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떠들고 있었다. 세곡동을 중심으로 주택이 세워진다더라, 이번에 막내 담임 선생님이 촌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더라, 사장이 바뀌면 라인도 개편될 터이더라. 추후 나 역시 사회의 일원이 되어 주고받고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소식들. 직원들은 소주 한 잔을 걸치며 그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버지를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심지어 아버지가 그 대화에 없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울적해진 나는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 배에는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곳은 직원들이 안 쓰는 짐을 쌓아놓는 곳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방으로 빠르게 기어 들어갔다. 아버지께서 세상모르게 주무시고 계셨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햇살을 조금씩 받아서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가방들 사이에 파묻혀서 주무시고 계셨다. 50줄의 나이에, 흔들리는 배에서, 4시간 동안 햇살을 맞아가며, 낚시하는 것은, 당신에게 너무도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어린 치기 때문인지 울컥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깨우기 위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아빠, 아빠!” 아버지는 지칠 대로 지친 것 같았다. 한창 잠꼬대를 칭얼거리시더니 다시 돌아누우셨다. 다시 직원들의 만찬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갔더니, 여전히 그 누구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갑자기 내가 이 동호회의 불순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아주 강하게, 가슴 속을 스쳐지나갔다. 15년 전에는 절대로 느껴본 적이 없던 기분이었다. 묘했다. 동시에 가슴이 아려왔다.
사실 동호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누구라도 그랬을 터였다. 노인의 문턱을 넘어가는 남자에게, 그것도 곧 회사를 나갈 이방인에게 그 누가 친절을 베푼단 말인가.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회사 내의 불문율과도 같은 절차였다. 소위, ‘라인’이란 걸 중요시하는 조직 내에서는 더더욱 중요하다. 앞으로 나가떨어질 양반에게 잘 해줘봤자 뭘 어쩌겠는가. 썩은 동아줄인 것을. 조직과 사회를 이해할 정도의 나이가 되자, 직원들의 태도가 이해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들었던 것은 아버지를 매몰차게 대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예전의 아버지는 항상 업무 얘기만 하셨다. 사장이 이번에는 이쪽 계열을 더 챙기는 것 같아, 걱정이야. 일을 그렇게 처리하고도 여전히 회사에 붙어있다니, 신기할 노릇이군. 그럼 나는 앞에서 그저 끄덕이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드릴 뿐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끼어들라치면 “네가 어려서 아직 잘 몰라서 그런다.”며 싹둑 잘라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버지는 많이 달랐다. 회사 이야기보다는 가족 이야기를 더 많이 하셨다. 회사 업무 얘기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었다. 당신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본 건 언젠가 싶을 정도로 옛날 일이다. 최근 들어 아버지는 내 전공과목이란 과목은 다 꿰뚫고 계셨고, 심지어는 내 학교가 나오는 신문 기사를 전부 스크랩도 해오셨다. 책상 위에 펼쳐진 기사들을 보며 물어도, 아버지는 “참고해라.”라는 짧은 한 마디가 전부였다. 하나씩 다 읽어보면 전부 내가 다니는 학교나 학과 선배, 교수 분들과 관련된 기사들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곤 했다. “뭣하러 이런 걸 다.” 게다가 방학이 되면서 아버지는 부쩍 당신이 다니고 계신 회사 근처에 나를 불렀다. 그것도 점심시간마다 밥을 ‘같이’ 먹자면서 말이다. 나는 밥을 사준다는 말에 신나서 몇 번 찾아간 게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들은 일종의 ‘징조’와도 같은 거였다.
아버지의 사무치는 외로움에 대한 ‘징조.’
인생의 말미를 앞두고 회사에서 쫓겨나는 쓸쓸함은, 사실 아직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가늠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외로움을 안겨준다는 것은 안다. 공공연하게 무시당하면서도 묵묵히 끝까지 고목나무처럼 버텨내야하는 그 끈끈함. 그것은 아직 나 같은 사회 초년생이 버텨내기에는 힘든 자질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직하게 해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외로움을 토해내고 싶으셨겠지만, 입 밖에 꿋꿋이 내지 않고 참고 계셨다. 어린 딸내미의 등록금 때문에라도 꾹꾹 눌러 담으신 거였다. 그리고 그 대신에 가족들을 찾아 헤매고 계셨다. 허우룩한 당신의 가슴을 채워줄 대상으로서 말이다.
난 무지했다.
무지했고, 무식했고, 아무것도 몰랐다.
잡은 고기를 한 손에 들고 묵묵히 걸어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15년 전의 동호회가 떠올랐다. 자신감에 찼던 한 사내와, 지금과는 다른 의미의 무지함으로 자신만만했던 그의 딸. 그들은 비록 무지했지만,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그들이 부러워졌다. 너무 부러워서 못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며 모든 것을 떨쳐내려는 듯이 달려갔다. 그리곤 앞에서 걸어가던 사내의 팔에 팔짱을 꼈다. 희끗희끗한 머리와 둥근 돋보기는 사내의 나이를 짐작하게 해주었지만, 그의 눈동자 속에 쌓여있는 그 무언가는 15년 전의 그것 그대로였다. 사회는 변하겠지만, 아버지는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 여기 계셨다. 그 사실이 중요한 거였다. 15년 전의 사내와 그의 무지했던 딸내미 따위를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지금 여기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만들어 가면 되는 거였다. 아버지의 오른쪽 손에서 수산시장에서나 맡을 법한 비린내가 제법 났다.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은 내게서도 비린내가 제법 났다. 비린내가 너무 시큼해서 눈이 시릴 정도로 행복한 저녁이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9 06: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