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에서] 막장 作家의 '막장 퇴출'
김성현 문화부 차장 | 2015/04/27 03:00


방송작가 임성한 은퇴설(說)을 접하면서도 내심 믿기지 않았다. '보고 또 보고' '온달 왕자들' '인어 아가씨' '신기생뎐'과 최근작 '압구정 백야' 같은 드라마들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10여년간 시청자들을 울고 웃긴 작가 아니던가. 흔히 '막장 드라마'라는 손쉬운 꼬리표로 그의 작품들을 폄하했지만 이 작가의 예술 세계는 지금이라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안방 드라마에 공상과학(SF) 영화의 웅대한 상상력을 접목시켰다. '신기생뎐'에서 귀신에 빙의된 등장인물이 눈에서 파란 레이저를 내뿜고, 투시 능력으로 상대의 질병을 알아낸다는 설정을 그가 아니면 또 누가 할 수 있었으랴. SF 영화의 금자탑 '스타워즈'의 광선검을 순식간에 장난감으로 전락시키고, '하얀 거탑'의 외과 의사 장준혁을 돌팔이 수준으로 떨어뜨린 작가의 상상력은 다시 봐도 입을 다물기 힘들 정도다. 경쟁이 치열한 안방극장에서 그는 막대한 예산을 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특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또 그는 드라마를 통해 사람이 얼마나 어이없게 죽을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인생의 부박함과 위험의 일상화에 대해 성찰할 기회를 주었던 '철학자'였다. 등장인물들이 차에 치이거나 폭력배에게 맞아서 죽는 건 물론이고, TV를 시청하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두는 장면을 통해 삶과 죽음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음을 입증했다. 끝없는 죽음의 행렬에 간혹 일부에선 '임성한의 데스 노트'라는 식으로 비난을 퍼부었지만 어쩌면 그는 죽음을 공포로 여기지 않았던 원시적 상상력을 간직한 작가였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는 '막장 드라마는 뻔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역발상의 소유자였다. 바로 엊그제도 '압구정 백야' 드라마의 소개 기사를 읽다가 '백야에겐 시어머니이자 친어머니인 셈'이라는 구절에서 마시던 커피를 내뿜을 뻔했다. '내게 생명을 주신 친어머니'와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가 한 분일 수도 있다는 도발적인 설정은 어쩌면 고전 비극 '오이디푸스왕' 이후 처음 접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그는 '드라마는 개연성(蓋然性)을 갖춰야 한다'는 공식에 도전했던 '문화 테러리스트'였다. TV를 시청하는 모습을 소재로 삼았던 예능 프로그램 '작정하고 본방 사수'에서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던 대상이 임 작가의 드라마였다. 허탈함과 분노, 당혹감 같은 복잡한 감정을 짧은 시간 내 '종합 선물 세트처럼 선사했던 작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눈치 빠른 독자는 짐작했겠지만 반어법(反語法)으로 살펴본 임성한 작가의 예술 세계다. 최근 공중파 방송사에서 차기작 계약 의사가 없다고 밝히면서 작가의 '은퇴설'이 나오고 있다.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 설정으로 '안방극장'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했던 작가의 퇴출이야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약속된 주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당혹스럽다"는 방송사 관계자의 책임 회피는 뻔뻔스럽다. 그럼 지금까지는 약속대로 했는데도 저 지경이었다는 말인가.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5042602718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3 06:3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