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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흘 전 목욕탕 건만 하더라도 나는 저에게 조금도 잘못한 것은 없다.
새기가 목욕을 하러 왔으면 왔지 남 옷 입는데 쌩이질을 하는 것은 다 뭐냐. 그것도 발소리를 죽여 가지고 등뒤로 살며시 와서,

"얘! 너 혼자만 왔니?"

하고 긴치 않는 수작을 하는 것이다.

어제까지도 저와 나는 이야기도 잘 않고, 동방이나 실험실에서 만나도 본체 만 척하고 이렇게 점잖게 지내던 터이련만
오늘로 갑작스레 대견해졌음은 웬일인가. 항차 망아지만 한 새기가 남 목욕하는 것 보구…….

"그럼 혼자 하지 떼루 하듸?"
내가 이렇게 내배앝는 소리를 하니까,
"너 목욕하기 좋니?"
또는,
"집에서나 하지 여기 와서 하니?"

잔소리를 두루 늘어놓다가 남이 들을까 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그 속에서 깔깔댄다.
별로 우스울 것도 없는데 날씨가 풀리더니 이 새기가 미쳤나 하고 의심하였다.
게다가 조금 뒤에는 카운터와 평상 주위를 휘 둘러 보더니 등 뒤에 감춰 두었던 바른손을 뽑아서
나의 턱밑으로 불쑥 내미는 것이다. 언제 감았는지 더운 김이 홱 끼치는 맥반석 계란 세 개가 손에 뿌듯이 쥐였다.

"너 이거 먹어본 적 없지?"

하고 생색 있는 큰소리를 하고는 제가 감은 것을 남이 알면은 큰일날 테니
여기서 얼른 먹어 버리란다. 그리고 또 하는 소리가,

"너, 맥반석 계란이 맛있단다."

"난 계란 안 먹는다. 너나 먹어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손으로 그 계란을 도로 어깨 너머로 쑥 밀어 버렸다.
그랬더니 그래도 가는 기색이 없고, 뿐만 아니라 쌔근쌔근하고 심상치 않게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진다.
이건 또 뭐야 싶어서 그때에야 비로소 아다보니 나는 참으로 놀랐다.
제대후 이 놈을 알게 된 지가 근 삼 년째 되어 오지만 여태껏 가무잡잡한 정수의 얼굴이 이렇게까지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법이 없었다.
게다가 눈에 독을 올리고 한참 나를 요렇게 쏘아보더니 나중에는 눈물까지 어리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옷을 챙겨 입더니 이를 꼭 악물고는 엎어질 듯 자빠질 듯 신발을 챙겨 목욕탕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다.

어쩌다 동아리 선배가
"너 얼른 여친을 만들어야지?"

하고 웃으면,
"염려 마서유. 때 되면 어련히 생길라구!"

이렇게 천연덕스레 받는 정수였다.
본시 부끄럼을 타는 놈도 아니거니와 또한 분하다고 눈에 눈물을 보일 얼병이도 아니다.
분하면 차라리 나의 멱살을 한번 모질게 잡아후리고 달아날지언정.

그런데 고약한 그 꼴을 하고 가더니 그 뒤로는 나를 보면 잡아먹으려 기를 복복 쓰는 것이다.

설혹 주는 계란을 안 받아먹는 것이 실례라 하면, 주면 그냥 주었지 '너 이거 먹어본 적 없지.'는 다 뭐냐.
그렇잖아도 저는 조교이고 나는 그놈 반에서 실험을 하므로 일상 굽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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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를 하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암만해도 고놈의 목쟁이를 돌려놓고 싶다.
동방에 가서 망할 새기 등줄기를 한번 되게 후려치겠다 하고 싱둥겅둥 마무리를 짓고는 부리나케 나왔다.

거지반 학관에 다 와서 나는 그 새기 모습을 보고 발이 딱 멈추었다.
정경관에서 내려가는 계단 옆에 하이얀 밤꽃이 소보록하니 피었다.
그 밑에 자리잡고 앉아서 이 새기가 청승맞게시리 내 보고서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보다도 더 놀란 것은 고 앞에서 또 지이익, 지이익, 하고 들리는 펜 긋는 소리다.
필연코 요놈이 나의 약을 올리느라고 또 내 보고서를 집어내다가 내가 내려올 길목에다 자리를 잡고
거기에 앉아서 천연스레 피드백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으리라.

나는 약이 오를 대로 올라서 두 눈에서 불과 함께 눈물이 퍽 쏟아졌다.
가방도 벗어 놀 새 없이 그대로 내동댕이치고는 성질이 뻗쳐서 허둥허둥 달려들었다.

가까이 와 보니 과연 나의 짐작대로 내 보고서가 오,탈자 수정과 의견첨부로 거의 빈사지경에 이르렀다.
보고서도 보고서려니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 없이 고대로 앉아서 벙글벙글 웃는 그 꼴에 더욱 치가 떨린다.
동아리 내에서도 소문이 났거니와 나도 한때는 걱실걱실히 공부 잘 하고 얼굴 괜찮은 새기인 줄 알았더니
시방 보니까 그 눈깔이 꼭 여우새끼 같다.

나는 대뜸 달려들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빨간 플러스 펜을 쥐어 내동댕이 쳤다.
딱 하는 소리가 나는 듯 싶더니 잉크가 터져 못 쓰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섰다가 정수가 매섭게 눈을 홉뜨고 닥치는 바람에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이놈아! 너 왜 남의 펜을 못 쓰게 하니?"
"그럼 어때?"
하고 일어나다가,
"뭐 이 자식아! 누구 펜인데?"

하고 복장을 떼미는 바람에 다시 벌렁 자빠졌다.
그리고 나서 가만히 생각을 하니 분하기도 하고 무안도스럽고,
또 한편 일을 저질렀으니, 인젠 조교요청으로 F를 받고 재수강을 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비슬비슬 일어나며 소맷자락으로 눈을 가리고는, 얼김에 엉 하고 울음을 놓았다.
그러나 정수가 앞으로 다가와서,

"그럼 너 이담부텀 안 그럴 테냐?"
하고 물을 때에야 비로소 살길을 찾은 듯싶었다. 나는 눈물을 우선 씻고 뭘 안 그러는지 명색도 모르건만,
"그래!"
하고 무턱대고 대답하였다.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펜 부순건 염려 마라, 태도평가 반영 안 할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하이얀 밤꽃나무 둥치에 털썩 기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더니 국제관 쪽에서,
"정수야! 정수야! 이놈이 기자재를 옮기다 말고 어디 갔어?"
하고 이공캠에서 뛰어 온 듯싶은 교수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정수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민광으로 내려간 다음 나는 가방을 챙겨 학관으로 가며 담배를 태우지 않을 수 없었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9 07:57: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