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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소련 여행기(?)의 마지막 글입니다.
첫 여행기는 소비에트 연방 찬가로 문을 열었는데, 마지막은 소련 찬가로부터의 작별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991년 소련 해체 직전, TV 예능 프로그램의 프로젝트로써 소련 국가를 락으로 편곡한 것입니다.
노래의 첫 소절을 부르는 분이 본 프로그램의 프로듀서, 이고르 우골니코프라고 합니다.
가사는 공산주의 조국의 위대함을 찬미하고 있지만 정작 그 멜로디는 자본주의의 느낌이 물씬 느껴져, 소련 해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1. 전날 여행기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이 사진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사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레반에서 서울로 오는 직항이 없어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환승을 하기로 했고, 환승 대기시간으로는 2시간 25분을 잡았습니다.
다만 모스크바 공항의 악명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몰라서 그 공항을 자주 이용하시는 지인분께 여쭤 보았습니다.
그분 말씀으로는 자기는 수하물 잃어버린 적 단 한 번도 없었고, 1시간 반으로 잡아도 환승은 넉넉하게 할 수 있으며 자기는 나가서 담배까지 피고 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모스크바 공항과 아에로플로트의 서비스도 나날이 개선이 되고 있다고 하니 괜찮겠지 싶어서 모스크바 환승으로 비행기표를 예매했습니다. 카타르나 폴란드 등 다른 나라에서 환승하는 선택지도 있긴 했지만, 비용과 시간 면에서 압도적으로 손해더군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오후 4시 5분에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던 비행기가 갑자기 오후 7시로 연기가 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 폭설이 내려 셰레메티예보 공항이 혼잡해진 상황이라, 예레반 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2시간 55분이나 지연이 되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하면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30분 전에 출발하고 없는 상황이고요.
사람이 극한의 좌절과 분노 상황에 놓이면 웃음부터 나오더군요.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낄낄 웃다가 겨우 정신줄을 붙잡고... 먼저 아에로플로트 콜센터에 전화해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대충 설명을 듣기는 했는데, 결론은 모스크바 도착하면 공항 3층에 매표소와 서비스 센터가 있으니 거기에서 직접 상담받는 편이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고 집에 이러이러한 상황이라 한국에 하루 늦게 돌아올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고, 모스크바에 있는 호텔을 급하게 예약을 한 후 공항 출국장에 갇혀 2시간 55분 동안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같이 여행을 간 친구에게 비상금으로 2천 루블을 빌리고, 다음날 오전 10시 반에 붉은 광장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비행기가 다시 앞당겨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는 별다른 의미는 없지만) 비행기는 더 이상 연착이 되지 않고 모스크바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혹시나 해서 내리자마자 호다닥 뛰려고 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니 게이트가 아니라 활주로 한복판이었고, 앞에 셔틀 버스가 기다리고 있더군요.
마음을 비우고 입국심사를 받은 뒤 3층 출국장으로 올라갔습니다.
매표소에 가서 상황 설명을 하고 놓친 비행기에 대한 환불을 받고, 다음날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새로 받았습니다(사실 여기서도 문제가 또 생겼는데 이건 뒷부분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서비스 센터(매표소 바로 뒤에 붙어 있습니다)에 가서 제 수하물 태그를 보여주고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 혹시 짐을 찾을 수 있는지 물어봤습니다.
직원분이 어디론가로 열심히 전화를 하더니 40분 뒤에 몇번 카운터로 가 보라고 합니다.
추가로 발생한 여행 비용에 대해서는 귀국한 뒤 아에로플로트 고객센터에 메일을 보내면 그쪽에서 보고 판단한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가장 중요한 비행기표와 짐은 확보를 하였으니 호텔로 들어갑니다.
환전소는 문을 닫아... 친구에게 받은 2천 루블이 매우 유용하게 쓰였습니다.
호텔은 공항에서 무료셔틀로 10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이렇게 사랑의 불시착...이 아니라 폭설의 불시착을 찍게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저와 함께 여행하던 친구는 그 다음주부터 모스크바에 교환학생을 가기로 되어 있었고, 일찍 도착하든 늦게 도착하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입장이었고, 모스크바에 이미 자기 숙소가 따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친구가 제 정신줄을 잡는데 큰 도움을 줬습니다.
이 글을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2. 다음 날 아침... 원래대로라면 인천공항에 내려 서울로 들어오는 공항철도를 타고 있어야겠지만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가는 공항철도를 타고 있습니다.
정말 눈이 많이 오긴 했습니다... 후우...
3.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아에로익스프레스(공항철도)를 타고 35분 가면 시내 서쪽에 있는 모스크바 벨라루스 역에 도착합니다.
벨라루스 방면으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기 때문에 벨라루스 역이라고 합니다.
모스크바에는 벨라루스 역 말고도 상트페테르부르크 역, 야로슬라블 역 등 다른 도시 및 지역의 이름을 붙인 역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로 치면 서울역은 서울 중앙역(서울 신의주역+서울 부산역), 구로역은 서울 인천역, 용산역은 서울 원산역, 청량리역은 서울 경주역 이런 식이지요.
참고로 러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 지역은 기차역과 지하철역의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습니다. 공항도 마찬가지...
4. 벨라루스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붉은 광장으로 가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의도치 않게 볼쇼이 발레 극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더더욱 없으니 발레는 다음 기회에...
5. 붉은 광장입니다.
테트리스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성 바실리 성당이 보입니다.
여기서 친구들 다시 만납니다.
여담이지만 붉은 광장은 바닥이 검은색이고 전혀 붉은색이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붉은 광장이었는데요, 붉다는 뜻의 러시아어인 '끄라스나야'는 원래 '붉다'와 '아름답다'는 뜻을 같이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붉다는 뜻만 남게 되었고, 그러니까 원래는 붉은 광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었다고 합니다.
6. 크렘린입니다.
간혹 성 바실리 성당을 크렘린으로 잘못 알고 계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게 진짜 크렘린입니다.
7. 크렘린 맞은편에는 국영 백화점, 줄여서 '굼'이 있습니다.
이름만 국영이지 실제로는 한참 전에 민영화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에는 주요 도시마다 이렇게 굼이 있는데, 물론 모스크바의 굼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8. 국립 박물관이랍니다.
박물관은 이미 질리게 봤는데다가 시간도 애매하여 패스합니다.
정문에는 독소전쟁의 명장,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 동상이 있습니다.
이분이 콜라를 참 좋아했다는데... 소련군 원수라는 사람이 미제 검은물을 마시다 들키면 곤란해지므로 코카콜라에 투명한 콜라를 특수 주문해서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9. 주코프 동상 근처에 긴 줄이 있길래 따라가 봅니다.
크렘린 벽 묘지로 들어가는 줄이었습니다.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과 장군, 그 외 소련에 큰 공을 세운 인민 영웅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 그리고 소련 우주개발의 아버지 세르게이 코롤료프도 여기 잠들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 우주비행사들이 러시아의 소유즈 우주선을 빌려 타고 우주로 갈 때마다 이곳에 와서 코롤료프의 묘에 헌화를 하고 가는데, 골때리는 것은 이 코롤료프라는 사람이 미국을 핵공격할 수 있는 ICBM을 개발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레닌의 무덤은 레닌 영묘라 하여 옆에 따로 있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레닌의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유리관 안에 따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내부 사진 촬영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레닌은 자신이 죽으면 평범하게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스탈린이 레닌을 우상화하면서 미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오쩌둥, 호치민, 김일성도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라가 되어버렸습니다)
스탈린은 자신이 원해서 미라가 되었고 레닌과 나란히 전시(?)가 되었으나, 그의 후임인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해 버렸습니다.
지금의 러시아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은 그를 매장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통합 러시아당은 전형적인 권위주의 우파 정당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의 상징인 레닌 영묘가 거슬리는 것이지요.
매장이 레닌의 원래 유언이었기 때문에 인도적이라는 명분도 있고요.
그러나 소련 시절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향수도 있고, 제1야당인 공산당의 반대가 심할 뿐 아니라, 이미 유명 관광지화되어 말로는 계속 매장 타령을 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레닌은 오늘도 어머니 곁으로 가지 못하고 자본주의 시대의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0. 점심은 굼 안에서 먹기로 합니다.
건물 내부가 매우 아름답습니다.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 있는데, 정교회 국가들은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이라고 합니다.
달력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가톨릭과 개신교는 크리스마스 날짜를 같이 바꿨는데 정교회는 달력만 바꾸고 크리스마스 날짜는 그대로 뒀다고 합니다.
참고로 학계 정설은 예수님이 실제로 그 날에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되겠습니다...
11. 점심으로는 비프 스트로가노프를 사먹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먹은 것은 토마토 소스 베이스였는데, 여기는 크림 소스 베이스였습니다.
얘네는 크림을 정말 사랑합니다... 만두에도 크림을 발라 먹고 컵라면에도 크림을 넣어 먹는다고... 그래서 크림반도를 침공했나? 죄송합니다...
12. 무명 용사의 묘입니다.
푸틴 대통령이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여기서 헌화를 하는 모습이 화제가 된 적이 있지요.
러시아도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나라이긴 합니다만, 국가를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예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13. 크렘린 내부에 들어가 봅니다.
일부는 박물관으로 개방이 되어 있고, 일부는 대통령 집무실 및 관저로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박물관도 볼 것이 많다는데 시간이 많지는 않아, 가장 싼 표를 끊고 한 바퀴 구경만 하였습니다.
14.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입니다.
실전에서 사용된 적은 없고 러시아 제국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정설이었으나... 최근에 대포 안에서 화약 성분이 검출되어 발사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네요.
도대체 어디다 대고 쐈을까요...
15. 세계에서 가장 큰 종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답게 큰 물건들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종이 원래는 교회에 걸려 있었는데 떨어지면서 한 조각이 꺠져 나갔고, 지금은 저 안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용으로 쓰고 있다고 합니다(...)
16. 대통령 집무실입니다.
아쉽게도 그분(?)을 만나뵙지는 못했습니다... ㅎㅎ
이제 크렘린을 나와 공항으로 돌아갑니다.
공항에서 셔틀을 타고 호텔에 들러 짐을 챙기고 다시 공항으로 갑니다...
17. 저녁은 공항에서 우즈벡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실 비행기를 타기까지도 한 번의 우여곡절이 있었는데요...
전날 매표소 직원이 '오후 6시 35분 대한항공 비행기가 있고, 오후 9시 아에로플로트 비행기 중에 무엇을 타겠냐'라고 물어봤습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탈출하고 싶어서 전자를 택했고, 제 카드로 결제를 하고 영수증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게 결제취소 영수증만 있고 새로 결제된 영수증은 없었습니다... 영수증이 러시아어로 되어 있어서 저는 그런지 전혀 몰랐고요.
한마디로 놓친 비행기는 환불이 되었는데 새 비행기는 결제가 안 된 것이었습니다.
대한항공 체크인 카운터에 갔는데 탑승정보가 없다고 해서... 말 그대로 패닉 상황이었습니다.
다행히 대한항공에 현지인 직원이 있었고, 그분이 확인해 본 결과 아에로플로트에서 공짜 표를 새로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9시 비행기를 타고 무사히 공항에 올 수 있었습니다.
다만 공항에서 또다시 2시간 25분 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시간에 쫓기며 모스크바 관광을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하고 왔는데, 이걸 미리 알았다면 좀 더 돌아보고 올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이런 아쉬움 때문에라도, 다음에 모스크바를 가게 된다면 여유를 가지고 넉넉하게 구경하고 싶습니다.
13일차는 사실 후기라 할 게 없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계속 자기만 하다가 인천공항 내려서 점심으로 비빔냉면을 먹은 기억밖에 없습니다.
제2터미널은 처음으로 이용해 보았는데, 크기는 작지만 매우 쾌적했습니다.
고객센터에 메일은...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서 추가로 발생한 비용이 돌려받은 비행기 값보다 적었기 때문에... 인생 공부했다 생각하고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그것보다는 아에로플로트와 대한항공 간에 마일리지 교차적립이 되는데, 깜빡하고 대한항공 마일리지로 안 넣은 것이 더 빡치네요 ㅎㅎ 한참 지나고 나서야 생각이 나더라는...
이것으로 원래대로라면 10박 12일이여야 하지만 어쩌다 보니 11박 13일이 되어버린 기나긴 여행기를 마무리합니다.
제가 여행을 다녀와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것이 2016년 12월, 그 때도 대만 여행이었습니다.
확실히 여행기를 남기게 되면 복습도 되고, 기억에 훨씬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다녀온 여행은 오래된 것도 있겠지만, 이렇게 썰을 풀 정도로 명확하게 기억이 안 남더라고요.
이제 이렇게 여행기를 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도 저 옛날에 다녀온 기억으로 여행기를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만큼 제 기억력이 좋지 못해서 아쉽습니다.
그래도 쓸 수 있는 데까지는 열심히 이야기를 마저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읽어 주신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댓글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 完 -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01 22: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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