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ㅣ고대신문 DB

최근 대학가에는 대자보가 다시 붙여지고 있다. 독재정권에 대항하고 학생들의 의사결집의 수단이었던 대자보는 80년대 대학가의 모습을 대변한다. 2000년대 이후에는 학생들의 대자보 게시가 점차 줄어들며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다. 그런 대자보가 2013년 주현우(경영대 경영08) 씨가 게시한 ‘안녕들하십니까’를 계기로 전국 대학생의 호응을 일으켰고, 최근 국정교과서 논란으로 대자보 부착이 늘고 있다. 이로써 학내 사안과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을 보여주는 ‘창’ 역할을 다시 하고 있다. 최근에는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대자보가 온라인으로 확산되며 과거와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시 주목받는 대자보

2013년 12월 주현우 씨가 철도 민영화, 불법 대선 개입 등 각종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청년들에게 ‘안녕한지’ 묻자 이는 급속도로 전국 대학가의 대자보 운동으로 퍼졌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국정 교과서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의 대자보를 게시하며 ‘대자보 릴레이’가 대학가에서 다시 펼쳐지고 있다.

대자보가 다시 주목받자 대자보를 통한 의견표출의 형태도 점차 다양해지고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가미되고 있다. 최근 서울대생이 대자보에서 수식으로 국정 교과서를 비판하며 화제가 됐다. 연세대에서는 한 학생이 한국사 모의고사 문제 형식으로 대자보를 쓰기도 했다. 이 대자보를 쓴 안희제(연세대 경제15) 씨는 “줄글로 된 대자보보다 특이하게 쓰인 대자보가 재미있고 학생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북한어투로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는 대자보를 쓴 본교 문과대 졸업생은 “종북 반대를 이유로 국정화를 내세우는 국정화론자들이 자신들이 욕하던 북한과 너무 닮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경신(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너무 재미있어서 누군가 올릴 거라고 생각하고 참고 있었는데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며 본교에 게시된 국정교과서 비판 대자보를 공유하기도 했다.

QR코드 등 온라인 서비스와 접목한 대자보도 등장했다. 본교생이 올린 대자보 중에는 대자보 내의 QR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찍으면 국정화 반대 서명을 위한 인터넷 페이지에 접속하도록 했다. 10월 30일 기준으로 이 온라인 서명에 참가한 사람은 본교생 1215명을 포함해 3922명에 달한다. 이를 기획한 황유덕(문과대 독문12) 씨는 “대자보가 오프라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로 작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깊은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해

대자보가 그 형식과 내용을 다양화하며 대학가에서 다시 힘을 얻고 있지만, 대자보에서 다루는 각종 문제의식이 구성원 사이의 깊은 논의까지 이어지기엔 한계가 있다. 권구선(문과대 서문13) 씨는 “대자보를 통해 여론이 형성돼도 그 여론을 모아 공론화하고 학내에서 흐름을 만드는 것은 대자보의 능력 밖이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자보를 통해 실제 학생들의 움직임이 가시화된 것은 ‘안녕들하십니까’나 세월호 사건, 최근 국정 교과서 정도에 그친다.

대자보가 하나의 유행처럼 작용해 대자보의 내용보다 자극적인 내용으로 관심 끌기에 치중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자보의 속성상 단방향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되기 쉽고, 그 주제도 한쪽 의견으로 치우친다는 점이다. 상호의견 교환의 부재는 곧 문제의 해결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모습으로 비치게 된다. 권순민(문과대 사회13) 씨는 “(대자보가) 서로 다른 의견이 오가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같은 생각을 하진 사람이 자기 확신을 굳히는 성격이 강한 공간에 가깝다”고 말했다. 우다현 생활도서관장은 “(문제에 대해) 심화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해당 사회문제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에 있어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기가 어렵다”며 “학내에 온전한 공론장을 세우는 것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론장 만드는 노력 이어져

대자보가 개인의 주장에 그치거나, 단편적인 여론만을 만든다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자보의 단방향적인 특징을 벗어나 공론을 모으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본교에서도 대자보를 게시하는 주체가 다른 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스티커를 붙이게 하거나 사회 현안에 대해 직접 한 줄씩 적도록 하는 등 사람들을 공론장으로 이끌기 위한 다양한 형식의 대자보가 출현하고 있다.

정경대 학생회는 10월 ‘대자보전’을 기획해 여러 대자보를 연이어 붙이고 그중 공감 가는 대자보에 공감스티커를 붙이게 해 학생들의 반응을 파악했다. 설동연 정경대 학생회장은 “학생들이 대자보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쉬웠다”며 “대자보를 써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함께 사회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낼 기회를 만들자는 생각에 스티커 참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노동개혁 등 사회문제를 다룬 이들 대자보 중 국정화 관련 대자보에는 300여 개의 스티커가 붙어 학생들로부터 가장 많은 공감을 얻었다.

생활도서관도 중간고사 기간 동안 학생들이 직접 대자보를 써보도록 ‘같이 쓰는 올바른 대자보’라는 이름의 백지 대자보를 기획했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우다현 생활도서관장은 “학회나 학생회에 소속돼 평소 토론에 익숙한 사람들 이외에 다수의 학생을 위한 것”이라며 “사회문제에 대한 의견을 내놓을 수 있게 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대자보가 갖는 의미를 유지하되, 대자보가 갖는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최정기(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개인이 자신들의 생각을 공론장에 올리는 것이 여전히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대자보는 민주적인 소통과 합리적인 판단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SNS를 활용하는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대자보가 갖는 시‧공간적인 한계를 넘어 대자보의 본 기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혜진, 이경주, 이지영 기자  news@kukey.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29 1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