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신문 DB

공론장은 사회구성원이 합리적 토론을 통해 사회의 공적 이익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소통의 장이다. 공론장 개념을 제시한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생활 세계에 대한 통제가 날로 강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성찰하는 주체가 모여 형성된 담론의 장인 공론장의 역할을 강조했다. 김문조(문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한국 사회 민주화를 선도해 온 고려대에서 공론장은 꾸준히 성장했지만, 외형적 성장 발전에 버금가는 공론장의 질적 향상이 이뤄졌는지에 대해선 자성할 점이 많다”고 말했다. 현재 본교 공론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작은 공론장 활발, 큰 공론장 부족

현재 본교 오프라인 공론장은 소수 학생이 사회정치적 현안에 대해 토론하는 공간을 중심으로 활성화돼 있다. 사회과학분과 소속 동아리나 단과대 학회는 큰 공론장 이전 단계에서 논의가 이뤄지는 작은 공론장 역할을 한다. 소수로 구성돼 있지만 의사소통이 활발하고, 논의했던 내용을 더 큰 공론장에서 발언하는 등의 행동으로 이어져서다. 이헌준 동아리연합회 사회과학분과장은 “사회 현안에 대해 토론하는 동아리와 학회는 공론장 기능을 하는 동시에 공론장의 주체”라고 말했다. 현재 사회과학분과 소속 중앙동아리는 9개이며 정경대 내 학회 15개를 포함해 각 단과대학 학회들이 존재한다.

최근에는 이런 작은 공론장도 위기를 맞고 있다. 현재 사회과학분과 동아리원이 줄어들면서 세미나 같은 활동을 이끌 학생이 적어 공론장이 축소됐다. 신입생은 진보적인 논제를 다루는 학회를 ‘운동권’이라 인식해 가입을 꺼리고, 기존 동아리원은 군대나 취업 준비 때문에 동아리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 사회의 기초 단위인 과반도 정치적 공동체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사회과학분과 중앙동아리 ‘수레바퀴’ 회장 고준우(문과대 사회14) 씨는 “과반을 스쳐 지나가는 곳으로 여기는 학생들이 많아 고학년이 되면 과반이 와해되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작은 공론장이 다수가 동참할 수 있는 공론장으로 개방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상적인 공론장은 이미 함께 있거나 앞으로 함께 있게 될 잠재적인 대화 상대자 모두에게 원칙적으로 개방돼야 한다. 26일 민주광장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공개 토론회를 연 최민식(문과대 국문10) 씨는 “공론장은 개방성과 확산 가능성이 핵심”이라며 “소수 학생만 토론하는 폐쇄적인 공간은 그들만의 공간으로 공론장이라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가볍게 다가서고 물러나는 온라인 공론장

온라인 공론장은 접근하기 편하고, 익명으로 의견을 표출할 수 있어 학생에게 심적 부담이 적다. 익명성은 학생들이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의견을 펼칠 수 있게 한다. 본교의 온라인 커뮤니티 고파스 ‘호랭이광장’에서 익명으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해 토론을 나눈 경영대생 A씨는 “오프라인에서 서로의 정치적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감정만 상하는 경우가 많다”며 “온라인의 익명성 덕분에 나의 의견은 ‘누군가의 의견’으로 받아들여져서 마찰이 적다”고 했다.

온라인상에서 형성된 공론장을 ‘진정한 의미의 공론장’으로 볼 수 있는 지는 의문이다. 현재 본교의 온라인 공론장은 고파스와 고려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는데, 일상적인 가벼운 주제가 대부분이다. 김윤태(인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익명의 존재는 책임 있는 의견 교환, 소통을 할 수 없다”라며 익명성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말을 아끼는 20대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이 적은 현실은 소리 없는 공론장을 불러왔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사회 현안에 대해 깊게 알려 하지 않는 세태로, 공론장의 참여자는 극히 일부로 한정됐다. 사회학과 학회 ‘횃불’의 학회장 서정수(문과대 사회14) 씨는 “대학생들이 인터넷으로 얕게 얻은 정보와 주위 분위기를 보고 자기 입장을 결정하는 경향이 있다”며 “문제를 분석하지 않아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해 결국 공론장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대학생이 목소리를 내기 꺼리는 가장 큰 원인이다. 대학생 대다수는 과제, 학점, 취업 등 개인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도 바쁘다. 구본빈(경상대 경영13) 씨는 “학점, 취업 등의 이유로 내 앞 현실을 챙기는데 급해서 당장 큰 연관이 없으면 관심을 쏟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권정혜(문과대 심리학과) 교수는 ‘개인적 이득과 관련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는 것이 아깝다’는 말을 현재 20대의 정치 관점을 가장 잘 요약하는 말로 꼽았다. 권 교수는 청년들의 제한된 심리적 자원을 이유로 들었다. 권 교수는 “20대들은 다른 세대보다 개인 힘으로 앞날을 헤쳐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눈앞의 과업에 에너지를 집중한다”며 “그만큼 사회 이슈에 쏟을만한 심리 자원이 제한돼 있다”고 말했다.

권정혜 교수는 학습된 무기력에서 비롯한 정치적 냉소주의가 무관심으로 발전했다고 분석했다. 자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거의 없고, 기득권과 소수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방향대로 정책이 정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정치 전반에 대한 무관심을 초래한 것이다. 권 교수는 “노력이나 행동 여부와 무관하게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이 반복될 때 초기의 극복 의지나 노력은 사라지고 무력감에 휩싸인다”고 말했다.



공론장으로 학생들을 유도해야

청년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들어볼 수 있는 장소를 계속 마련해야 한다. 사회과학분과 동아리나 학회가 연대해 공동 포럼같이 큰 공론장을 형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한 86학번 교우는 “과거에도 소수 공론장은 독립적으로 활동하다가도 사회적 사건이 생기면 연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다”고 말했다. 발언하지 않더라도 사회 현안에 대한 논의를 들어보는 기회가 중요하다. 횃불 학회장 서정수 씨는 “공론장에 직접 참여해서 사회 문제에 대해 과학적으로 분석해본 사람의 발언을 들어봐야 사건에 대해 단편적이고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20대를 공론장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기 위해선 과반, 학과가 공론장 역할을 해야 한다. 학생회가 과반 내에서 정치 토론을 이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재우 안암총학회장은 “과반 기층단위 공론이 모여 총학생회 차원의 큰 공론장이 형성되는 것이 이상적”이라며 “과반 학생회가 학내, 사회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주도하고, 총학생회는 공론장이 확대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형성된 공론장이 건전하게 유지되기 위해선 대학생은 올바른 토론 자세를 가져야 한다. 2013년 ‘5.18 사진전’ 훼손 사건이나 2014년 성소수자 동아리 ‘사람과 사람’ 현수막 훼손 사건처럼 타인의 개인적 의견을 표출할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공론장은 누구나 평등하고 자유롭게 존재해야 하는 공간으로 소수자의 의견도 존중해야 한다. 의견이 다른 상대의 주장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 공론장에 참여하기 전 문제를 분석하고자 하는 열의도 필요하다.

공론장이 온라인으로 급속하게 탈공간화 되고 있는데, 이러한 새로운 공론장(Neo-Public Sphere)에서 경박한 행태를 부추기는 압력에 맞설 수 있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김문조 명예교수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시대’를 극복하려는 지성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혜진, 이경주, 이지영 기자  news@kukey.com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5-31 16:3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