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눈의 외국인부터 남녀노소 모두가 허리를 굽히고 한 곳을 응시한다. 시선이 모이는 그곳에는 조선 백자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 있다.
간송문화전의 1부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진행되고 있다. 성북동에서 한시적으로만 공개됐던 간송 소장품의 첫 나들이인 만큼 세간의 관심이 뜨겁다. 이에 신미리 DDP 큐레이터와 오세현 간송미술관 연구원의 자문을 받아 중요 작품을 짚어봤다. 작품 소개는 간송의 인생 흐름에 따라 구획한 섹션(△길을 열다 △지켜내다 △찾아오다 △훈민정음)의 순서를 따랐다.


길을 열다
간송의 초기 수집품을 다룬 ‘길을 열다’관에는 겸재 정선의 , 심사정의 , 고려청자 등 최상의 명품들이 전시돼 있다. 20대 후반, 젊은 나이의 간송을 대수장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명품 작품을 살펴봤다.
    
① 촉잔도권(蜀棧圖卷)
심사정(沈師正, 1707-1769)
자본담채
58.0×818.0cm
긴 화폭에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그려낸 가 중국의 걸작이라면, 우리나라에는 8미터가 넘는 화폭에 심사정의 모든 역량이 담긴 이 있다. 소박한 우리의 옛 그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엄청난 규모의 앞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현재(玄齎) 심사정의 인생이 담긴 은 중국의 풍경을 한국화한 그의 절필작이다. 그림의 시작을 유년기로 보고, 그 흐름에 따라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로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실제로 중반부 이후부터는 굽이치는 협곡을 볼 수 있고, 끝으로 갈수록 평화로워져 노년기의 모습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림 안에는 현재(玄齎)의 모습을 담은 나그네의 모습도 보인다.
에는 수리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간송의 손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그림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만지면 부스러질 정도였다고 한다. 간송은 제대로 알아보기도 힘든 이 그림을 5000원이라는 적지 않은 가격에 구입한다. 놀라운 안목이 아닐 수 없다. 간송은 그림을 구입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시 첨단복원기술을 갖고 있던 교토에 그림을 보내 수리를 맡긴다. 수리비로는 그림보다 비싼 6000원을 지불한다. 그림을 간직해 후대에 물려주겠다는 그의 사명감과 결단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②청자상감운학문매병(靑磁象嵌雲鶴文梅甁)
13세기
높이 41.7cm
국보 제 68호

69마리 학의 떼가 청자를 휘감아 덮고 있다. 화려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은 고려청자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손꼽힌다. 고려 후반기 무신정권의 취향을 그대로 담은 이 청자는 상부는 웅장한 남성의 어깨를, 하부는 잘록한 여성의 허리를 나타낸다. 작품의 핵심은 단연 검은색과 흰색으로 상감돼 있는 69마리의 학과 구름이다. 상감과 기존의 흙은 구울 때 서로의 온도가 달라 균열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모든 학과 구름을 살리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100번은 넘게 같은 도자기를 구워야 온전한 도자기가 나온다고 한다. 고려시대 장인들의 정신과 기술 수준을 가늠하게 해준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간송의 수집인생에 큰 전환점을 가져다 준 작품이기도 하다. 도굴을 통해 세상에 나온 이 청자는 여러 경로를 거쳐 일본인 마에다에게 넘어간다. 마에다는 간송에게 청자의 가격으로 굉장히 비싼 가격을 제시하는데, 간송은 한 푼도 깎지 않고 의연하게 도자기를 구입했다. 그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모든 장사꾼들은 물건이 생기기만 하면 간송을 찾아갔다고 한다.
한번은 일본인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간송을 찾아와 2배의 가격을 제시하며 청자를 팔라고 요구한다. 이때 간송은 의가 상하지 않도록 완곡한 거절법을 쓴다. “당신이 볼 때 이 도자기가 아름다운 것처럼 나에게도 정말 아름다운 도자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이 도자기를 팔면 기쁨이 사라지니 나에게 더 아름다운 도자기를 가져오십시오. 가져오시면 2배가 아닌 원래 가격에 팔겠습니다”. 문화재를 지키고자 했던 간송의 노력과 배포 있는 그의 성품을 느낄 수 있는 일화이다.  


지켜내다
일본은 경매소인 경성미술구락부를 통해 우리 문화재를 헐값에 사들이는데 이 경로를 통해 소중한 문화재가 대규모로 반출됐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여기에 제동을 걸기 위해 일본 거대 자본가들과 맞서 싸웠다. ‘지켜내다’관에서는 간송이 일본인과 경쟁해 지켜낸 문화재들이 전시돼 있다.


③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白磁靑畵鐵彩銅彩草蟲蘭菊文甁)
18세기
높이 42.3cm
국보 제294호

한 도자기 안에 3가지 색을 모두 살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불가능을 뚫고 나온 유일무이한 백자가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이다. 보통 백자하면 무늬가 없는 순백의 도자기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다양한 색이 사용됐다. 붉은색, 푸른색, 짙은 갈색의 3색은 각각 굽기 위한 적정온도가 다르다. 그럼에도 한 온도로 구웠을 때 모든 색이 잘 발생된 것으로 보아 당시 도자기 제작 부분에서 최첨단의 기술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제작의 어려움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는 돋을새김 방법을 활용해 양각으로 그림이 새겨졌다. 새겨진 문양 등도 수준급이다. 특이한 점은 이 작품이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과 그림을 그리는 화공이 협력해 만든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도자기의 모형은 들어가는 입구가 칼로 자른 듯이 단호하고 내려오면서 펑퍼짐해진다. 때문에 한 도자기 안에서 파격미와 절제미가 모두 세련되게 표현됐다.
간송 전형필 선생은 최고의 백자인 이 도자를 지켜내기 위해 일본의 거대 상회 야마나카와 물러설 수 없는 대결을 벌인다. 치열한 경매의 결과 백자의 가격은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가인 1만 4580원을 기록한다. 이 580원은 간송 선생과 야마나카상회가 경매가 끝날 무렵 10원 단위로 가격을 계속 올리며 경쟁한 흔적이라고 한다.

찾아오다
‘찾아오다’관은 간송이 외국에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아온 작품들로 구성돼 있다. 특히 간송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를 만나 기와집 400채 가격을 지불하고 고려청자를 일괄 구매한다. 이때 구입한 도자기는 총 20점인데, 그 수준이 높아 4점이 국보로, 3점이 보물로 등록됐다.


④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靑磁母子猿形硯滴)
12세기 중기
높이 9.9cm
국보 제270호

한국판 피에타라고 볼 수 있는 청자모자원숭이형연적은 상감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 청자다. 원숭이 모형에 인간의 모성애를 담은 것이 이 작품의 재미있는 특징이다. 이 청자는 당시 고려 초반 문신들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원숭이형연적은 부모가 자녀의 공부방에 주로 선물했는데, 원숭이 ‘후(猴)’자가 제후를 나타내는 한자 ‘후(侯)’와 발음이 비슷해 출세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었다고 한다. 형태는 어미 원숭이 뒤통수로 물을 집어넣고 애기 원숭이 뒤통수로 물을 꺼내는 아기자기한 구성으로 돼있다. 어미 원숭이의 배꼽까지 그려져 있는데 섬세한 표현이 한층 재미를 더한다.


⑤청금상련(廳琴賞蓮)
신윤복(申潤福, 1758-?)
자본담채
28.2×35.6cm

‘좌상(座上)에는 손님들이 항상 가득 차 있고 항아리에는 술이 비지 않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 은 혜원의 제화시와 함께 한적한 양반가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신윤복의 그림에는 어떤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은 양반의 사생활이 가감 없이 드러나 있다. 가야금을 들으며 연꽃을 즐긴다는 그림의 제목처럼 3명의 고위급의 관료와 3명의 여인이 한여름의 흥취를 즐기고 있다. 허리에 붉은색 끈을 한 것으로 보아 이들의 신분은 굉장히 고위급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손에 든 합죽선 역시 고위급 신분을 나타낸다. 이 지체 높은 양반들이 지금 풍류를 즐기고 있는 장소는 사랑채 뒤에 뜰이다. 사랑채는 집안 마나님들이 절대 드나들 수 없는 남자들만의 공간이다. 신윤복은 이런 은밀한 장소에서 은밀한 사생활을 즐기고 있는 양반의 모습을 화려한 색체로 표현했다.
30점의 그림으로 이뤄진 혜원 신윤복의 그림첩은 오사카에 반출돼 있었다. 오사카에 접선을 시도한 간송은 흥정이 잘 이루어지지 않자 직접 오사카에 찾아가 혜원의 그림을 일괄 구매한다. 이때 간송이 신윤복의 작품을 구매하지 않았다면 빈부격차가 절정기였던 시기, 화려한 삶을 누리던 양반의 삶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훈민정음
‘훈민정음’관에는 간송이 가장 사랑한 보물 이 전시돼 있다. 간송이 훈민정음 정본을 찾기 전에는 그 누구도 한글 창제의 원리와 용법을 알지 못했다. 한글 사용을 금하고 창씨개명까지 요구하던 일제 식민지 시절, 간송에게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 문화를 수호하는 한줄기 빛이었다.


⑥훈민정음(訓民正音)
1446년
반곽
23.3×16.6cm
국보 제70호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는 문구는 전 국민이 익히 들어 아는 내용일 것이다.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을 밝힌 서문의 내용이다. 간송이 훈민정음 정본을 구하기 이전에도 위의 서문 내용은 등의 기록으로 전해져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한글 창제의 원리와 용법이 상세히 밝혀져 있는 해례는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간송이 목숨을 걸고 지킨 훈민정음 정본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훈민정음은 1500년대 한글이 창제됐을 당시 목판 인쇄를 통해 배포됐지만 1900년대에 들어와 그 족적을 감추게 된다. 1940년 7월, 간송은 훈민정음을 애타게 수소문하다 안동에서 드디어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책의 소장자는 간송에게 기와집 한 채 가격인 1000원을 요구한다. 적지 않은 금액에도 간송은 ‘훈민정음이면 만원은 해야 된다’며 1만원을 지불하고 오히려 중개 수수료로 1000원을 지불하게 된다.
간송이 훈민정음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1940년대가 일제감정기 중에서도 민족문화말살 통치 시기였기 때문이다. 간송 선생은 민족을 수호하려면 훈민정음을 꼭 지키고 보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명에서 간송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훈민정음 거래를 성사 시켰고, 거래 성사 이후에는 가족에게까지 비밀로 하며 보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해방이 되자 간송은 국문학자들을 불러 모아 훈민정음을 펼쳐서 연구 시켰다. 한글 창제 이후 500년 만에 드디어 우리 글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간송의 우직한 사명감이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은 한글의 우수성을 입증할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글·사진│이상욱, 이영현 기자 news@
사진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6-17 08: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