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어데 빈 자리가 있어야지”

K 사장과 둥근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공손히 마주 않아 얼굴에는 ‘나는 선배인 선생님을 극히 존경하고 앙모합니다’ 하는 비굴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구변 없는 구변을 다하여 직업 동냥의 구걸 문구를 기다랗게 늘어놓던 P……P는 그러나 취직 운동에 백전 백패의 노졸(老卒)인지라 K 씨의 힘 안드는 거절 한 마디에도 새삼스레 실망도 아니한다. 대답이 그렇게 나왔으니 이제 더 졸라도 별 수 없는 것이지만 허실 삼아 한 마디 더 해보는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러시다면 지금 당장 어떻게 해주십사고 무리하게 조를 수야 있겠습니까만은…… 그러면 이담에 결원이 있다든지 하면 그때는 꼭……”

<채만식 – 레디메이드 인생>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서 보던 씁쓸한 이야기. 기억을 더듬어 이 소설을 생각해보면 ‘채만식, 인텔리 계급의 비애, 식민지 사회……’ 등과 같은 지식들이 단편적으로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요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이 소설이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는지. 내 주변엔 P씨와 꼭 닮은 사람들이 왜 점점 늘어나는지. 그리고 내가 P 씨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 사회는 돌고 돈다더니 30년대 공부를 하고도 취직을 못해 무기력해진 지식인들과 대학 졸업을 하고도 취업을 못해 전전 긍긍하는 우리의 모습이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다른 게 있다면 30년대 P씨는 알음 알음 취업 자리를 구걸하는데 반해, 2009년 P씨는 ‘더 잘난’ 지식인이 되기 위해 야금 야금 스펙을 쌓고 있다는 사실.

▶ ‘이태백’, ‘88만원 세대’ ‘100만 실업자 시대‘… 우리에게 붙은 우울한 꼬리표  

   혹시 ‘이태백은 이제 옛말, 이젠 이퇴백!’, ‘88만원 세대’, ‘실업 예정자’ 같은 신조어가 가슴속에 콕콕 박힌다면 당신은 졸업을 앞둔 ‘취준생(취업준비생)’이 틀림 없다. ‘경기가 안 좋다’는 말은 하지만 도대체 취업 시장이 어떻길래 이런 말이 나오는 걸까?

통계청이 18일 내놓은 ‘2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수는 2274만2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달보다 14만2000명(0.6%) 감소했다. 이는 2003년 9월(18만9000명) 이후 5년5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한 것이다. 취업자수는 지난해 12월 1만2000명 줄어든 이후 지난달(-10만3000명)까지 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이어갔다. 실업자수는 지난 달 92만4000명으로 늘어 이 같은 추세라면 3월이나 4월에 ‘100만 실업자 시대’에 진입할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업률 통계에 잡히지 않는 비경제활동인구는 1623만3000명으로 1년 전에 비해 50만9000명 늘어 2003년 4월(51만4000명)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증가했다. 지난달 구직단념자는 16만9000명으로 1년 전보다 5만명(41.5%) 급증했다.

실제 많은 학생들이 취업을 원하는 대기업들의 경우도, 채용 인원을 많이 줄이고 지원자는 늘어나 입사 경쟁률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 지고 있다. 삼성의 경우 올해 대졸 신입사원을 당초 계획했던 4000명보다 1500명 늘어난 5500명 채용하기로 했으나 역시 전년도보다 줄어든 수치이다. 기업들에서는 정규직 채용 인원을 유지, 증가 시키기 보단 인턴 사원을 모집하는 추세다.

중견 기업들의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중견 기업은 대부분 채용 계획이 없거나 극소수를 뽑을 예정이다. 휠라코리아는 영업부문 1명 모집에 1700명의 지원자가 몰려 170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 학점과 영어 성적은 기본, 개강 첫 주부터 열람실은 가득

‘놀자 대학생’ 이란 말을 아는지. 고등학교 때까지는 열심히 공부 하다 대학만 들어오면 학문은 뒷전, 놀기에만 바쁜 대학생을 빗대던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 말도 듣기 힘들어졌다. ‘대학 가면 고등학교 때 공부 반의 반만 해도 A+는 받는다’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말만 믿고 있었다면 낭패다.

개강 둘째 주 화요일이었던 지난 10일, 대부분 학우들의 수업이 끝난 5시 50분 경 열람실 사용 실태를 조사했다.

백주년 기념관은 고시 전용 열람실로 쓰이는 평균 65.2%의 좌석 점유율을 기록했다. 중앙 도서관의 경우 WEB 학습 코너 1과 2의 좌석 점유율은 각각 84.4%와 73.9%, 제 2 열람실 81.6%, 제 3 열람실 90% 로 학기 초임에도 상당히 많은 학우들이 과제 및 공부를 하기 위해 열람실을 찾고 있었다. 이공계의 하나스퀘어의 경우 대부분의 열람실이 100%에 육박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었다.

▲3월 10일 5시 50분 중앙도서관 자리 배정 현황

과학도서관에서 “기아자동차 연구장학생 모집 면접”을 준비하고 있던 기계공학과 04학번 김명은씨는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에는 주로 공부를 한다”며 취업을 위해 학점은 학기 중 꾸준히 관리하는 편이며, 방학을 이용해 컴퓨터 활용 능력, 워드프로세스 등의 자격증을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을 찾았다고 말했다.

학점 뿐 아니라 영어도 학생들이 가장 많이 시간과 돈을 투자해 공부하는 과목이다.

서울 YMCA 가 1월과 2월 서울, 경기 지역의 대학생 781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69%가 지난 해 영어 학습과 관련 해 사교육비를 지출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으며, 이 중 대부분의 사교육은 “토익” 을 위한 것이었다. 1인당 연 평균 사교육비는 64만 2천원이었다.

실제 휴학을 한 후 영어공부 등을 하는 경우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SSAT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학교 화공생명학과 03학번 서진형씨는 지난 학기 휴학을 하고 토익학원과 스터디를 찾아 공부를 했다고 밝혔다. 서진형씨는 본인과 같이 휴학을 한 후 어학연수를 가거나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많다며 “경기도 어렵고 채용 회사도 적어 압박을 느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실제 학원 등에서 하는 스터디 등은 휴학을 하지 않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듯한 스케쥴을 요구하기도 한다. 종로 학원가에서 만난 국민대학교 윤모씨(25)에게 실제 휴학을 하고 하루 종일 영어 학원에서 공부를 했을 당시 스케쥴을 들을 수 있었다.

스터디원끼리 서로 숙제를 내주고 체크를 엄격하게 하고, 학원 내에서는 영어만 쓰도록 한 영어와의 한 학기. 현재 윤씨는 또 다시 중국어를 배우고 있다.

▶ 학점만 가지고 되나? 이젠 경력도 필수! 그래서 대학 5학년도 필수!

이젠 학점과 영어성적은 더 이상 취업의 충분 조건이 아닌 필요조건.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첨가하기 위해 대학생들이 더 분주해 지고 있다. 인턴·아르바이트·공모전·봉사활동·자격증 등은 이른바 ‘취업 5종 세트’로 불린다.

이런 활동들도 경쟁률이 점점 치열해 지고 있다. 최근 공공기관들의 아르바이트 경쟁률은 38 대 1에 육박했다. 이는 기업에서 채용 시 이러한 아르바이트 경험을 경력으로 취급해 주기 때문이다. 이 와 같이, 증명서를 발급해주는 아르바이트들의 인기는 날로 치솟고 있다. 한 캠프의 경우 캠프 카운슬러 지원자의 경쟁률이 20대 1정도였다. 또한 용산구청에서 얼마 전 선발한 ‘대학생 글로벌  페스티벌 자원지도자’의 경우 9명 선발에 총 119명이 지원을 해 약 13: 1의 경쟁률을 보여 예년보다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해외 집 짓기 봉사활동을 하는 포스코 대학생 봉사단의 경우도 평균 경쟁률이 10 대 1을 넘어 섰다.

 학점 관리하랴, 영어 공부하랴, 게다가 취업 스펙 쌓기까지. 요즘의 대학생은 너무나도 바쁘다. 이런 대학생에게 대학 4년이란 너무 짧다. 실제 요즘 대학교 5학년, 6학년이라는 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예전에는 9학기 까지 다닌 사람에게 “왜 아직까지 학교 다녀요?” 라는 질문을 했다면 요즘엔 “9학기 째에요”라는 대답에 그저 “아~” 하며 고개가 끄덕여지는 때.

우리학교의 경우 2009년도 1학기가 9학기 째인 사람이 1845명, 10학기 등록자가 1110명, 11학기 이상 등록자는 573명이다. 학적수업지원팀 측에서는 우리학교의 경우 공식적인 졸업 유보 제도가 없어,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교수에게 찾아가 F 학점을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 당신의 스펙, 88만원 세대에서 업그레이드 해줄 비장의 무기?

대학 4년 동안(또는 5년, 6년 동안) 학점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 영어 성적도 웬만큼 나온다, 스펙을 쌓기 위해 각종 공모전, 봉사활동에 있는 대로 다 지원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스펙은 몇 점? 당신의 취업을 도와 줄, 그리고 연봉을 몇 만원이나 올려줄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일까?

우리학교 경력개발센터 신정 과장은 “남들이 하는 경력 쌓기에 휘둘려서 이것 저것 하는 것은 오히려 도움이 안된다”고 조언했다. 남들과 똑같은 스펙은 오히려 변별력이 없기 때문에 괜한 시간 낭비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인턴, 봉사활동 등을 계획하고 있다면 자신의 지원 분야를 확실히 정해놓고 그 분야에 관련된 경험을 쌓는데 올인 하고, 관련 자격증을 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충고했다.

실제 기업의 인사 담당자들도 “요즘 취업준비생들은 학점, 영어 성적, 대외 활동 등 이른바 ‘입사에 필요한 스펙’만 신경 썼지 정작 실무에 필요한 능력은 형편 없는 경우도 많다”며 채용 분야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분야에 경험이 있는 취업지원자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우리 학교 취업지원팀 신정 과장은 “IMF 이후 대학생들의 평균적인 ‘스펙’이 상향 평준화 됐다.”며 “예전에는 토익 750이면 기업체 합격이 가능했는데 요즘에는 그저 졸업 요건을 충족시키는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런 사회 추세에 맞춰 ‘스펙’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오늘날의 수많은 대학생, 지식인 P씨들. 우리 P씨들의 이력서는 한 줄, 한 줄 늘어나고 88만원 짜리 비정규직이 아닌 초임 연봉 3000만원의 직업에 지원 가능한 자격을 갖춰가고 있을 테다. 하지만 ‘남들이 하니까’ 라는 생각에 우리가 꿈꿨던 것이 어디였는지를 잊는 것은 아닐까. 당신의 스펙이 남들과 똑 같은 레디 메이드(Ready-made : 기성품)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