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의 끝, 그리고 그 너머

<<역사비평>> 118호(2017년 봄호)의 권두언 제목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끝, 그리고 그 너머〉이다. 해당 글에서 박태균은 박근혜 정권의 종말은 30년간 지속된 1987년 체제의 끝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모든 문제를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블랙홀”로 수렴시킨 1987년 체제는 정작 1987년 이전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다 해결하지 못했으며 역사학계의 흐름 역시 마찬가지였다. 북한 역사학에 대한 연구, 대중독재, 포스트모더니즘과 탈식민주의, 그리고 탈민족주의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학제 간 연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등 역사 연구의 새로운 시도가 활발하게 모색되는 듯 했지만 이는 곧 냉전적 역사관과 국수주의 역사관의 재등장으로 정체되고 말았다. 이에 1987년 체제가 끝을 고하는 지금, 역사학계 역시 위의 논의들을 재점화하고 1987년 이전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호 <<역사비평>> 기획의 취지이다.

‘과학대통령 박정희’ 담론의 허구성
김근배는 ｢박정희 정부 시기 과학기술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과학대통령 박정희’라는 신화의 허구성을 비판했다. 김근배에 따르면 우선 과학기술이 1960년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 물론 박정희 정부가 제도적 인프라 구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이승만 정권이 구축한 풍부한 인적 자원의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전두환,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 각종 개발 연구가 성과를 나타내기도 했다. 즉, 1960~70년대가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유일한, 혹은 결정적인 동인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박정희가 과학정책의 주요 결정 과정에서 ‘최종 통과지점’에 위치했을지언정 유일하고 절대적인 주체였던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과 관련된 많은 결정은 정치권력과 과학기술자들의 파트너십을 통해 추진되었다. 예를 들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과학기술처의 설치, 그리고 전 국민 과학화운동 등은 이미 그 이전부터 과학기술계에서 필요성을 주장해 오던 사업들이다. 한편 ‘과학대통령 담론’의 한 특징은 과학기술과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적 순결성을 과도하게 강조한다는 점인데, 알려진 것과 달리 박정희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은 시대적 정치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졌다. 과학기술처와 전 국민 과학화운동은 각각 대통령 선거 공약인 조국 근대화를 뒷받침할 히든 카드, 그리고 유신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었다.
위와 같은 정치권력과 과학기술의 유착이 결정한 한국 과학기술의 방향성은 현재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첫째로, 과학기술은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도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둘째로, 새로운 과학기술 개발을 추진할 때마다 필요 여부에 상관없이 새로운 조직이 설치되고 이 조직이 개발을 주도했다. 이는 대학을 비롯한 기존 조직의 위축을 가져온다. 셋째로 정치권력의 관심을 받은 특정 과학기술의 대형화 경향이 심화되었고, 이는 주목받지 못한 과학기술과의 커다란 불균형을 초래했다. 넷째로, 과학자사회의 정치적 의존이 심화되면서 자율성이 위축되고 대중과의 거리도 점점 멀어졌다. 이러한 문제점이 개선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아직까지 박정희 정부 시기에 굳어진 방향성에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이 김근배의 주장이다.

‘실험장’으로서의 한국전쟁, 그리고 미국의 냉전 사회과학
한편 한국전쟁을 통해 지식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생산되는 과정을 살펴본 기획 〈냉전의 사상·심리전, 한국전쟁을 만나다〉에는 두 편의 글이 실렸다. 우선 김일환·정준영은 ｢냉전의 사회과학과 ‘실험장’으로서 한국전쟁｣에서 한국전쟁기 미국 군학복합체(Military-Academic Complex)의 지식 생산 과정에 드러나는 분열성과 지식의 유통 양상을 분석했다.
한국전쟁 시기의 한반도는 적국(敵國) 사회의 작동방식과 취약점을 포착하고자 한 군(軍)과 소비에트화의 사회적 효과 등에 대한 사례 수집을 원하는 미국 사회과학자들에게 적절한 ‘실험장’이었다. 그 실험보고서의 대표적인 예가 미 공군대학 인적자원연구소(Human Resource Research Institute, 이하 ‘HRRI’) 한국 연구팀의 보고서이다. 2권으로 구성된 HRRI 보고서에서 아카데믹한 소비에트화 연구(1권)와 폭격과 관련된 장병 사기 연구(2권)라는, 학계와 군의 연구 목표가 상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4명의 연구자가 취한 방법론의 차이가 만들어낸 1권의 균열이 2권에서는 부분적 삭제를 통해 말끔히 정리된 것 또한 특징적이다.
한편 군은 자금 외에도 기초 연구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과학의 냉전적 인식틀 생산에 일조했다. 한 달간 한국에 머무른 HRRI 연구팀은 시간의 제약 때문에 ‘전방연합군번역과(ADVATIS)’의 포로 심문서 등의 2차 자료를 주된 연구 자료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첫째, 이들이 군에 기댄 지식생산 맥락을 은폐하려고 했다는 점(심문서의 ‘정보원’→보고서의 ‘나’)이다. 둘째, 중층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할 피란민들을 철저하게 ‘공산주의 탈출자’, 즉 소비에트 사회 경험자로만 설정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원적 인식틀 설정과 탈맥락화는 이 연구가 본국에서 ‘보편적인’ 사회과학의 장으로 편입되면서 심화된다. 즉 ‘1950년 겨울의 서울’은 ‘소비에트화된 국가’로 일반화되며, 한국 피란민들을 대상으로 한 내용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심리전 영향에 대한 보편적 명제들로 제시된다. 일반화하는 것은 조심스럽지만, HRRI의 사례는 미국의 냉전 사회과학이 권력 체계로 작동하는 방식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것이 저자들의 결론이다.

‘적화삼삭(赤化三朔)’ 체험과 사상심리전
옥창준·김민환의 ｢사상심리전의 텍스트로서 한국전쟁｣은 앞서 살펴본 HRRI 보고서가 전쟁 이후 변주되는 양상을 분석했다. 1951년 7월 미국에서 발간된 <<The Reds Take a City>>(이하 ‘RTC’)는 HRRI 보고서를 반공심리전 차원에서 활용하기 위해 기획된 책이다. 심리전 수행을 위해 HRRI 보고서의 일부와 한국어 텍스트 <<나는 이렇게 살았다>>와 <<고난의 90일>>의 전체 혹은 일부분을 번역·발췌하여 새롭게 구성된 것이었다. 이 책에서는 우선 HRRI 보고서에서 누락된 두 부분이 주목된다. 하나는 공산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3장의 진술들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 농민들을 분석한 부분이다. 한국 농민들은 연구자들의 기대와 달리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 수준 자체가 낮아 심리전의 지구적 수행에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에 RTC 편집자들은 농민 대신 공산 지배를 경험한 ‘지식인’에 초점을 맞추었고, 한국어 텍스트 두 권이 추가로 선정되었다.
RTC는 한국인들의 내러티브를 HRRI 보고서로 보완·수정한 형태의 책이었다. 또한 미국뿐 아니라 자유지역의 여러 국가의 독자들을 독자로 상정한 책이기도 했다. 확인된 공식 번역판은 총4종인데, 이탈리아어, 중국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각각 번역되었다. 미국은 ‘반공주의자’보다 ‘전향한 공산주의자’를 내세운 심리전이 더 효과적이라 판단했고, 소비에트를 폭력적으로 경험한 이들의 서사가 담긴 RTC는 이에 적절한 텍스트였다. 또한 RTC는 지식인 계층을 넘어 대중 차원의 심리전을 수행하기 위해 만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동순이와 순최>>라는 만화로 각색되어 유통되었는데, 여기에서 대(對) 아시아 반공심리전의 일면을 관찰할 수 있다. 기존의 RTC에서와 달리 만화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로 마을공동체와 가족을 파괴하는 인물들로 그려지는데, 이를 통해 마닐라 지역제작센터가 출간한 일련의 만화들이 아시아적 토착성을 최대한 강조한 반공심리전 텍스트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대중문화의 ‘항미원조’ 기억과 재현
기획 〈대중문화로 보는 중국의 남북한 인식〉에 실린 김란의 ｢중국 영화와 드라마의 ‘항미원조’ 기억과 재현｣은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의 영화와 드라마에서 항미원조 기억과 재현이 변모하는 양상을 분석했다. 우선 김란은 ⓵ 신중국 건국~1980년 ⓶ 개혁개방 초기(1980년~2000년) ⓷ 2000년~시진핑 집권 ⓸ 시진핑 시대의 네 시기로 나누어 각 시기별 특성을 분석했다.
⓵의 시기에 항미원조전쟁은 냉전체제를 충실히 반영한 구도로 재현된다. ‘폭격’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미국은 ‘절대악’으로, 주로 여성 군인과 여성 민간인 위주로 재현되는 북한은 ‘여성’으로, 중국은 ‘남성’으로 표상된다. 한국전쟁은 중국과 미국의 전쟁임이 강조되며 집단, 국가, 이념 등이 강조되는 반면 개인의 감정은 철저히 거부된다.
⓶의 시기에는 기존의 단순한 이데올로기적 구조가 설득적 구조로 다소 변화한다. 미국은 적이지만 ‘설득 가능한 존재’로 재현되는데, 이는 개방 이후 상대적으로 높아진 중국의 자신감이 반영된 것이다. 북한을 여성으로 표상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나 ‘어머니’로 등장하면서 가족을 중심으로 한 서사가 부각된다. 이를 통해 개인적 감정이 조금씩 관찰되기는 하나 아직 전면화되지는 않는다.
⓷의 시기에 이르러 중미관계가 강화되면서 민감한 소재인 항미원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점차 사라졌다. 그나마 제작된 몇몇 작품들에서는 개인의 서사가 전면화되고 역사적 배경은 뒤로 물러난다는 점이 관찰된다. 즉, 헐리우드식 영웅 서사가 주로 관찰된다.
⓸의 시기에 이르러 G2에 등극한 중국의 자부심을 반영하듯 다시 항미원조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개인 서사가 강조되는 경향은 유지되면서 이전에 삭제된 이데올로기적 입장 역시 다소 세련된 방식으로 부활된다. 이를테면 미국을 비판하되 미국인 개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지 않는다거나, 미군의 모습을 적으로 제시하기보다 인종 문제 등 미군 내부의 균열과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또한 북한군이 여전히 주체로 재현되지 않는 데 비해 오히려 남한군이 인격화된 존재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김란은 이를 남한과의 관계 개선 등의 국제정세가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다.

촛불항쟁의 주체성, 그리고 ‘폭력’ 담론의 문제
천정환의 ｢누가 촛불을 들고 어떻게 싸웠나｣는 작년 겨울부터 이어진 촛불항쟁의 주체성과 비폭력·폭력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 글이다. 우선 천정환은 촛불항쟁의 문화정치가 상당 부분 2008년 촛불집회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촛불항쟁은 이미 2008년부터 기각된 전위/대중, 활동가/시민, 지식인/민중의 이분법 대신 새로운 조직 방법과 주체의 출현을 가시화했다. 개인성, 성찰성, 비폭력성, 합법주의, 문화화 등의 특징을 공유하는 촛불은 넓은 참여성과 내성적인 행동성의 모순적인 결합을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 천정환은 촛불이 집합적 직접행동으로서의 참여 방법의 임계치에 해당되는 것이라 서술하기도 했다.
2008년의 ‘동호인’들에 해당되는 새로운 참여자들의 특성은 ‘깃발’로 표현되었다. 새롭게 등장한 깃발들은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대체로 실재하지 않거나 급조된 자생적인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활동 내용과 이념이 있었으나 깃발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던, 혹은 근래 생겨난 소규모 공동체들이나 연대조직들이다. 전자가 자유주의, 다양성과 연대의 취약성이라는 양가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후자는 강렬한 정체성과 운동성을 보이며 항쟁의 내용 자체를 변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천정환은 기존의 조직, 즉 민주노총이나 전농 등의 전통적인 조직 대중도 분명 항쟁의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폭력’ 담론에 위축된 이들은 이전보다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에 대한 성찰과 개혁이 요청된다는 것이 천정환의 분석이다. ‘민중주의형 시위’가 지닌 역사성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지만, 이전의 ‘비장’과는 다른 정서의 출현에 조응해 새로운 노동운동 문화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천정환은 이번 촛불항쟁에서 ‘폭력 시위’에 대한 접근이 보수 언론과 정치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었음을 비판하기도 했다. 우선 천정환은 폭력, 비폭력, 대항폭력, 반폭력 등의 개념 자체를 정밀하게 적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대중봉기에서의 폭력이란 불가피한 폭력으로 반폭력/평화를 쟁취하든 비폭력으로 지배의 폭력을 넘어서든 “새로운 양태의 힘”으로서의 반폭력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국가폭력은 조직적이지만 시민단체나 개인들의 힘은 대개 우발적·비조직적이며 ‘현장’의 폭력은 기본적으로 전자에 의해 유발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비대칭적이다. 이번 촛불항쟁은 이를 간과하거나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는 것이 천정환의 분석이다.
혁명에서 대안적 권력체가 대중의 인정을 받는 것은 완전한 ‘법 바깥’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네트워크’나 ‘유연자발집단’ 등으로 지칭되는 이번 항쟁의 주체들은 소규모 조직화나 풍자에 능숙했을지언정 지배체제 자체를 해체하는 직접행동에서는 창발적이지 못했다. 분명 ‘혁명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었던 촛불항쟁이 지금의 교착 국면을 돌파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전술한 새로움과 한계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천정환의 결론이다.  

■ 문장원 기자 creep0927@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3 16:5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