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간강사

사인(私人)으로서의 교사(敎師)

  풀 타임 연구자(?)로서의 삶을 살지 못한지도 벌써 한 해가 넘었다. 대학원에서 한 발을 뺀 채, 생계 유지에 여념이 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뜻밖에도 강의를 하게 되었다. 학위 소지자들도 강의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주제넘은 짓이지만, 고백하건대, 강의란 것이 이렇게나 삶을 정신없이 휘두르는 것인 줄 알았다면 나는 절대 강의 제의를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으로서의 나날을 살게 될 줄이야!
  연구자라는 직위에도 익숙하지 않지만, 교수자라는 자리는 그보다 내게 더 낯설고, 어쩌면 내가 평생 동안 가져 볼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자리이다. 친구들은 학생들에게 대체 어떤 악영향을 끼칠 생각이냐며 나를 말렸고, 나 스스로는 아이들 앞에서 얼어붙어 단 한 마디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꺼려 왔던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아마도 내가 지니고 있던 어떤 교사의 상이 있었을 것이다. ‘교수자는 학생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존재인데, 어떻게 내가 교수자가 될 수 있겠어?’ 하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는 틀린 말이 아니다. 지식을 전달하는 것 이전에, 내가 가졌던 걱정은 바로 나의 인간상이 교수자와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따로 공부를 하는 시간을 빼기는커녕, 생계 유지를 핑계대며 수업을 듣는 데에도 이토록 게으른 내가 어떻게 학습의 본이 되겠는가. 학부 시절에는 가방만 던져 놓고 수업을 빼먹곤 했으면서, 5분가량 지각을 했다고 학생들의 출석 점수를 깎는 일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칭찬보다는 조롱이, 격려보다는 반어적 냉소가 익숙한 데다, 애초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어떤 관심도 두지 않는 사람이 과연 학생들과 교감이란 걸 할 수 있을까.
  글쎄. 내가 찾아낸 답은 결국 연기였다. 강의란 것은 일종의 연기라고 함께 강의하는 선배는 말했다. 자신이 설계한 수업안을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계산된 행동 하나하나를 마치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떠올린 것인 양 말하고, 학생들을 유도하고, 호응을 이끌어낸다는 측면에서 강의는 연기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강의가 연기라는 말은, 교사로서 도무지 부적격한 나의 모습을 감추고 학생들 앞에 설 수 있는 하나의 가면을 만들어내는 역할극이라는 의미에 가깝다. 성실한 체, 나이 많은 체, 경력이 풍부한 체, 학생들을 위하고 도덕적인 인간인 체하며 매일을 강단에 오른다.
  사인(私人)으로서의 나라면 경멸하고 조소했을 그러한 행동들을 매순간 반복하는 것은 상당한 내적 고투를 요하는 일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러한 가면극이 필요한 이유는 교수자라는 위치의 애매성에 있지 않을까. 직장에 있을 때의 나, 수업을 들을 때의 나와는 달리 남들을 가르칠 때의 나는, 그 순간만큼은 서른다섯 명의 학생들의 시선에 노출된다. 이 학생들을 장악하고 어떤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성적이라는 통제 수단이 아니라, 사인으로서의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교사의 권위이다. 나와 학생들 모두가 공유하는 교사의 상에서 비롯하는, 그 신비화된 권력 말이다. 나는 이상적인 교사의 기표를 수행하고, 학생들은 그 모습을 통해 이상적인 교사의 기의를 읽어 낸다. 그것은 하나의 쇼에 가깝다.
  이 과정은 또한 다분히 우스운 행동들을 수반한다. 나는 이제야, 왜 고등학교에 교직원 화장실이 따로 있으며, 대학의 교수들이 수업이 있는 층이 아닌 다른 층의 화장실을 쓰는지 깨닫게 되었다. 어떤 보이지 않는 권위에 호소하는 이상, 그 신성함은 화장실이라는 공간에 의해 세속화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그것은 시끄러운 수다나 단정치 못한 몸가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로서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수업 외 시간, 나는 결국 학생들의 시선을 벗어나, 강의준비실이라는 공간에 숨어드는 길을 택한다. 모두를 위한 암묵적인 합의. 사인으로서의 삶을 숨기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다. 일이며 수업이며 강의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학생들에게서 기대하지 않았던 성실함이나, 예기치 못한 명민함을 발견한 순간에는 그 모든 피로를 압도하는 기쁨이 온다. 그러나 학생들을 좋아하게 될수록, 가르치는 일에 기쁨을 느끼게 될수록 나는 나의 자리를 질문하게 된다. 언젠가는 우상의 권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학생들을 대할 수 있는 시간이 올까? 다시 글쎄. 그러기 위해선 본격적인 교수자의 길을 걸어 보아야 할 텐데, 아직 풀타임 연구자로서의 삶조차 시작하지 못한 나에게 있어 그 대답은 요원하기만 하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3 20:2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