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바보가 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어
  4월 말의 캠퍼스에는 봄기운이 가득하다. 활짝 핀 꽃과 나무들만큼이나 학부생들은 싱그러움으로 가득 찬 존재인 것 같다. 꺄르르 웃으며 지나가는 그들을 보며 나는 자주 부러워하고, 또 자주 과거를 떠올린다. 물론 기억은 왜곡되고 미화되기 마련이니, 내가 학부생이었던 그 시기에도 결코 매일 매일이 즐거웠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없고 그때는 있었던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다.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 대신 내가 얻은 것은 대학원에서 낙오하지 않고 잘 적응하는 방법 정도일까.
  사실 누군가 나에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다고 말해 주기 전까지 나는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나에게 “너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라고 알려준 것은 바로 나의 지도교수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날부터 그 ‘무언가’의 정체는 무엇인지,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하다 잃어버린 것인지 곰곰이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무언가’를 어느 한 순간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그것을 조금씩, 조금씩,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수업, 세미나, 연구실에서 만난 교수님과 선배들은 나를 동등한 연구자로 대해 주었지만, 그 관대함은 이미 정해진 규칙에 잘 따르고, 자신들이 공유하고 있는 의견에 동의할 때에만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무언가 결정해야 하는 사항이 있을 때 그들은 언제나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지만 사실 그 의견이 받아들여진 적은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고 답은 이미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이 세상사는 규칙이라는 것을 배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업에서는 교수님이, 세미나에서는 학기 수 높은 선배가 하는 말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연구실에서는 교수님의 말 한마디로 새로운 일이 갑작스레 시작되었다가 맥없이 끝나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누구도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궁금했다. 아직 너무 순진했던 나는 친하게 지내던 선배에게 왜 우리는 이 모든 불합리한 일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느냐고, 왜 그저 따르고만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런 나에게 선배는 왜 피곤하게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똑똑한 바보’가 되라고. 너무 잘하지도 말고, 이유를 알려고 하지도 말고, 그저 적당히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이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선배의 말에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차마 반박할 수는 없었다. 나도 사실은 정답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선배들과 교수님의 의견에 반기를 들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꾹꾹 참는 습관이 생겼다. 대학원 생활에 대해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대학원 선후배가 아닌 대학원 밖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만 말했다. 그 편이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수님과 선배들이 나에게 질문을 해 오면 진짜 내 생각은 감추고 그 사람이 원하는 정답을 들려주게 되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갈등은 피할 수 있었고 나는 그럭저럭 대학원 생활에 잘 적응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은 것이다. 언젠가 선배가 말했던, 바로 그 똑똑한 바보가 되어 버렸구나.
  똑똑한 바보가 되면서 내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말로 표현하려니 너무나 진부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굳이 말하자면, 누군가에게는 ‘열정’일 수도, 또 누군가에게는 ‘패기’일 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젊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꿈같은 단어들을 새삼 입에 담으려니 무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의 말랑말랑했던 나는 이제 너무도 딱딱해졌다. 하나를 알면 자신 있게 그것을 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열을 알아도 확실하지 않은 하나가 마음에 걸려서 선뜻 안다는 말을 입 밖에 꺼낼 수가 없다. 그때의 나는 오답을 말해도 언제나 옳은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나는 ‘정답’만 말할 때에도 늘 틀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시간이 흘러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새 선배보다는 후배가 더 많아져 있다. 지금의 나는 똑똑한 바보가 되라던 선배와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수업에서, 세미나에서, 연구실에서, 수없이 교수님과 선배들의 눈치를 보았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눈치를 보아야 하는 대상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선뜻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어서 서글퍼진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4 15:5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