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한 거짓말과 진실의 자리 – 조수경의 「유리」 (조수경, 『모두가 부서진』, 문학과지성사, 2016.)

한영인 문학평론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한다. 수업 시간 중 담임선생님께서 여기서 비행기를 타본 적 있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모든 아이들의 시선은 유일하게 손을 든 나를 향했고 선생님께서는 조금 의외라는 듯 언제 어디를 갔냐고 물었다. 나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미국에 갔어요. 근데 갔다가 하룻밤도 안자고 바로 돌아왔어요. 선생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같은 반 아이들은 모두 내 말을 믿는 눈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꼬맹이다운, 빤한 거짓말이었는데 그래서 이젠 그런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요새는 더 교묘하고 치밀하게, 타인은 물론이고 때론 나 자신조차 말끔하게 속아 넘는 그런 거짓말을 주로 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기억이 문득 떠오른 건 조수경의 단편 「유리」를 읽으면서였다. 작중 소설가인 ‘나’는 이혼을 요구하는 남편을 피해 공항 커피숍에 앉아 있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우연히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한때 단짝이었던 유리였다. “다가가고 싶어도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소녀”였던, “풍기는 분위기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유난했던 유리는 웅장한 대문을 자랑하던 고급 주택에 살던 소녀였고 가정환경 조사서에 자신의 부모 직업을 ‘의사’라고 기재하던 아이였다. ‘나’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그녀를 선망했고 마음이 잘 맞았던 둘은 이내 만화와 이야기를 적은 돌림노트를 교환하는 단짝이 된다. 유리는 자신이 고급 주택의 지하에 세들어 사는 가난한 세입자일 뿐이라는 걸, 그녀가 적은 부모님의 직업인 의사는 실은 주인집 내외의 직업이었다는 걸 드러내고 고백할 만큼 ‘나’에게 마음을 연다.(유리의 거짓말은 일찍이 마르토 로베르가 ‘업둥이 의식’으로 유형화했으며 아리엘 도르프만 역시 “많은 아이들이 빠져드는 환상 – 우린 실제로는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 아니라 갓난애일 때 바꿔쳐진 것이며, 우린 왕자와 공주이며 우리 가문은 실제로는 왕족이라는 환상”이라고 말한, 유년기 성장담에 자주 등장하는 종류의 것이다.) ‘나’는 유리의 “낡고 허름한 비밀”을 독점함으로써 그녀와의 배타적 관계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둘의 관계가 깨지게 되는 작은 사건이 발생한다. ‘나’는 유리를 비롯한 여섯 명의 아이들과 한 조가 되어 조별 과제를 하게 된다. 문제는 사진 촬영이었다. 유리는 자신의 집 앞에서 찍겠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궁전 같은 (가짜) 집으로 아이들을 데려온다. 순간 ‘나’는 “무엇보다 그 낡고 허름한 비밀은 가장 친한 친구인 나에게만 공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혼자 물으며 잡고 있던 유리의 손을 놓아 버린다. 유리는 그 집이 진짜 자기의 집인 양 천연덕스러운 연기를 펼치고 다른 아이들은 그런 유리를 선망과 부러움에 차서 바라본다. 이 작은 사건이, ‘나’의 마음에 다시 붙일 수 없는 균열을 남기고 끝내 나로 하여금 유리가 기거하는 곳이 궁전 같은 집이 아니라 ‘쪽문 아래로 난 어둡고 축축한 지하 세계’임을 반 아이들에게 폭로하게끔 만든다. 이후 유리는 외톨이가 되어 “복도 쪽 맨 끝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애”로 남게 되지만 이 잔인한 진실의 폭로가 준 트라우마는 비단 유리만의 것이 아니다. ‘나’ 역시 한 인간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는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소설 속 ‘나’와 유리,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소녀들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레이첼 시먼스가 쓴 『소녀들의 심리학』이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다. 레이첼 시먼스는 “친구들로 구성된 긴밀한 관계망 속에서 이루어”지는 “소녀들의 은밀한 공격 문화”를 다룬 문화기술지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여성적 친밀함의 이면에는 은밀하고, 분노를 특징으로 하는, 침묵 속에서 자라고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 ‘나’가 유리에게 가지는 복잡한 마음은 그 ‘은밀한 침묵의 영역’이 간단치 않은 것임을 우리에게 일러준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단지 성장기에 아이들이 겪곤 하는 따돌림에 대한 소묘에 그치지 않는다. 레이첼 시먼스가 말한 “소녀 시절의 어둡고 추악한 비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비밀과 거짓말’이 성인이 된 지금까지 삶을 분식하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는 서늘한 사실이다.
  ‘나’는 과거에 유리의 거짓말을 폭로한 사람이지만 이제는 반대로 자신의 거짓말이 폭로당할까봐 전전긍긍하는 처지다. 이혼을 목전에 두고 남편과 별거하고 있지만 이 사실을 숨기고 평온한 중산층 가정을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자신의 부부관계에 이상을 감지하고 떠보듯 관심을 내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처한 현실보다 남의 불행을 캐내려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 역시 여전히 타인의 불행을 상상하고 그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속물적 욕망에 지배당는 존재다. ‘나’는 유리를 태우고 공항을 나와 S구에 있는 한 저택의 대문 앞에 그녀를 내려준다. 그렇게 유리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가려는 순간, 이제 막 중국에서 돌아왔다는 유리가 손에 든 것이 클러치백이 전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저택의 한 편에 자리한 파란 쪽문을 발견하게 되면서 쪽문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성인이 된 ‘유리’가 진짜 저택에서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누추한 지하 세계에 살고 있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그 ‘진실’을 확인하고자 하는 ‘나’의 관음증적 욕망의 정체다. 허언증일 수도 있는 유리의 거짓보다 그 거짓을 끝내 확인하고자 하는 ‘나’의 행위가 더 섬뜩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거짓말과 진실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 선과 악 혹은 정의와 부정의의 앙상한 이항대립의 구도에 갇히지 않는다. 진실에의 욕망이 거짓에의 욕망보다 윤리적으로 더 뛰어나다고 볼 근거도 없다. 우리는 늘 거짓을 폐기하고 진실을 드러낼 것을 요구하지만 아주 가끔, 진실의 자리를 마련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그럴 듯한 거짓만도 못할 때가 있다. 조수경의 「유리」는 그 서늘한 진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08: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