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첫차를 타고 봄날로, 건너간다 – 이인휘, 『건너간다』, 창비, 2017.

한영인 

문학평론가

정태춘의 노래를 듣고 자란 세대는 아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중 한 곡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처음 듣던 때의 전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정말 모든 걸 잃어본 자만이 낼 수 있을 것 같은 쓸쓸한 목소리가 박은옥의 읊조림을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갑자기 운명에 패배한 자의 비감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 우두망찰한 순간이 지나고 간주가 흐르자 이내 텅 빈 눈동자 같은 정태춘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 해 이후 내게 봄은 오래 오지 않고 / 긴 긴 어둠 속에서 나 깊이 잠들었고 / 가끔씩 꿈으로 그 정류장을 배회하고 / 너의 체온 그 냄새까지 모두 기억하고’ 무엇이 한 인간을 그토록 긴 어둠 속에 잠들게 했을까. 동면(冬眠)을 깨워줄 봄은 왜 유독 그만을 외면했을까. 차라리 그가 다가오는 봄을 거절한 건 아닌가. 질문이 거듭될수록 내 가슴은 텅 비어갔다. 무엇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나 역시 소중한 무언가를 자꾸 잃어버리고 긴긴 어둠속으로 침잠하는 기분이었다.

이인휘의 신작 장편소설 『건너간다』는 정태춘의 또 다른 명곡 <92년 장마, 종로에서>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무슨 이유였을까.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면서 가슴이 찢기는 통증을 느꼈다. 눈가로 슬픔이 모여들어 끝내 눈물을 흘리다 통곡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센티멘털리즘은 최근 이인휘의 약점으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센티멘털리즘이야말로 이인휘의 소설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동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는 슬픔에서부터 통곡을 길어낼 줄 아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의 소설엔 그가 세계로부터 흡수하는 갖가지 슬픔과 노여운 감정들로 그득하다. 그의 소설은 그가 현실에서 토해낸 통곡의 충실한 반영이자 엄격한 재현이다.

『건너간다』는 그의 다른 소설들처럼 자전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작품이 시작하는 시점은 식품 공장과 합판 공장 생활을 하며 한동안 문학을 손에서 놓았던 작가가 「공장의 불빛」과 「폐허를 보다」 등을 발표하며 세간에 반가움을 선사한 이후다. 한때 다시는 소설을 쓰지 못할 거라 여겼던 작가가 돌아온 탕아처럼 다시 문학으로 복귀했으니 – 게다가 그는 돌아온 뒤 작품집 『폐허를 보다』로 만해문학상까지 거머쥐지 않았던가. - 그 기쁨과 충만함을 좀 즐길 법도 하건만 그는 여전히 “끝내 치받아 오르는 감정을 삭일 수 없어”하며 눈물을 쏟는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숨 막히는 세월을 건너가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은 하태산(정태춘)의 노래와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박해운의 삶을 직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해운의 삶은 다시 두 갈래로 나뉘어 서술되는데 하나가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하는 연대기라면 다른 하나는 식품 공장에서 일하던 근과거(近過去)다. 어린 시절 무당집 막내아들로 넘치는 흥과 끼를 주체하지 못했던 작가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를 마치고 공장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배움에의 열의를 채 버리지 못했던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셋째 형 덕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고 대학에 입학하지만 1980년 전두환의 쿠데타로 인해 젊음의 푸른 꿈은 짓밟히고 만다. 이후 군대에 다녀온 박해운은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저기를 떠돌며 일용직 노동자의 삶을 시작한다. 그러다 친구의 소개로 한 타이어 공장에 들어가게 되는데 – 이 이야기는 작가의 다른 소설 『내 생의 적들』(2004)에도 등장한다. - 이 공장 생활이 그의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꿔놓게 된다. 안지성(안재성) 등과 함께 문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노동운동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대우어패럴 투쟁과 구로동맹파업(1985), 신흥정밀의 박영진 열사 사망(1986)등의 굵직한 사건을 통과해 온 박해운은 정도상에게 넘긴 미발표 원고가 『녹두꽃』 창간호에 실리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는 김한수, 정화진 등과 함께 노동문학 모임을 같이 하며 활기찬 한 때를 보내게 된다.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을 다룬 그의 장편 『활화산』이 출간된 것도 그 무렵이다.

박해운이 걸어온 삶의 궤적만큼이나 독자의 눈을 붙드는 건 그가 일했던 식품공장의 이야기다. 어느덧 공장(에서의 노동)은 가난과 비참이 결코 모자라지 않은 요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었다. 작가는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과의 대화를 매우 생생하게 묘사해내고 있는데 그 대목들을 읽노라면 우리는 아직도 곁에 존재하는 삶과 투쟁의 장소로서의 공장을 너무나 말끔하게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떠안게 된다.

이 작품은 한 소설가가 건너온 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소설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힌 ‘소설론’이기도 하다. 박해운은 이렇게 말한다. “화려하게 꾸민 문장보다는 생명의 숨결이 파도치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다. 나의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 너의 아픔을 느끼고 나와 너를 아프게 하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저항하는 글을 쓰고 싶다.” 생명의 숨결이 파도치는 그런 문장이 정확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미리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파도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몸과 삶을 그 위에 얹는 자만이 마침내 그 파도를 건너 “초록의 그 봄날 언덕길”(정태춘)으로 갈 수 있을 것임을 우리는 믿는다. 다시 한 세계를 건너가는 그의 발걸음에 계속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