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데이를 앞두고 어느 연구노동자가 고함

2017년 3월 10일 국민이 투표로 선출한 대통령이 탄핵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태를 직접적으로 유발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애써 한국 사회가 외면해왔던 본질적인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촛불시위에서 만난 고3 학생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 이번에 깨달았다고 했다. 지난 대선에서 한 후보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그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었지만, 이 사회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게 된 지금만큼 이 말이 적실한 때는 없는 것 같다.

탄핵 이후 앞으로의 국면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정한 시스템의 복구가 될 것이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자신이 최선을 다한다면 그만큼의 대가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적인 신뢰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헬조선’의 ‘흙수저’로 태어난 이상 죽어다 깨나도 ‘금수저’가 먹는 밥은 구경도 못할 것이라는 절망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절망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흙수저’로 태어났을지언정 ‘금수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노동의 대가를 통해 나름대로 먹고 살만할 것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적인 신뢰가 복구되어야 한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이 문제의 핵심에는 노동 문제가 있다. 자신의 노동을 정당하게 인정받고 그에 따른 공정한 대가를 받는 것이 무너진 신뢰를 복구하기 위한 첫 걸음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경제민주화’는 의제로 설정되긴 했으나 ‘박근혜-최순실’ 정권 아래 별다른 진전이 없었으며 사회적 양극화에 대한 대중들의 체감은 더욱 깊어져가고 있다. 이제야말로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를 발전시켜야 할 때다. 당장 우리 주변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또는 취업을 한 그리고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모든 이들의 문제가 노동과 연관되어 있다.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대기업/중소기업 격차, 남성/여성노동 문제, 청년 취업 문제, 받을 수 없는 야근 수당, 공정하지 않은 회사 내 진급 시스템 등등. 지금이 한국 사회가 변화해야 하는 시기라면 바로 여기부터 변화해야 한다. 앞으로 진행될 한국 사회의 변혁은 노동문제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에 달려있다.

자, 그럼 이제 우리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연구노동은 생소한 개념이다. 여기서 나는 연구노동을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결과를 생산하는 행위와 함께 연구자집단 내에서 연구자에게 부여되는 자잘한 일들을 포함한 넓은 개념으로 정의한다. 대개 연구노동은 ‘학업의 연장선’, ‘연구의 연장선’으로 여겨지며 노동으로서의 정당한 임금이나 합당한 노동환경은 바라기 어렵다. 연구자라고 해서 밥 대신 꿈을 먹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과 같은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마찬가지의 개인으로서 노동의 대가로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연구자가 언제나 하고 있는 연구 작업과 자잘하게 하고 있는 부수적인 일들은 ‘열정페이’인 경우가 많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자신의 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생계를 위한 비정규직/계약직 노동을 병행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연구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구노동의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지고 있는가? 많은 경우, 폐쇄적인 연구자 집단 내에서 노동은 임의로 배분된다. 보통 연구노동에 대한 참여는 자유로운 경쟁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거나 옆에서 건네진다. 특히 그것이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노동이라면 더욱 그렇다. 물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좋은 자리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반대로 그만큼 좋은 조건의 자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선별과정은 필연적이다. 물론 이때의 선별기준은 집단마다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해당 연구자가 본교 출신인가? 남성인가? ‘성실한 학생’인가? 아무도 공식적으로 언급하진 않지만 보통 우리는 알고 있다. 모두가 바라는 그 자리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연구노동의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다. 모두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아는 이가 없다.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통해 먹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연구결과를 숫자로 평가하는 현실 속에서 연구의 가치는 자기소개서에 써넣을 수 있는 한 줄의 스펙에 불과하다. 연구노동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많은 연구자들이 수행하고 있는 조교, 간사, 총무의 업무는 어떻게 하면 ‘열정페이’가 아닌 노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문제가 있다면, 누구에게 문제제기를 해야 할 것인가? 내 논문에 도장을 찍어줄 지도교수에게? 이 바닥에서 끊임없이 부딪혀야 할 선생들에게? 언제나 연구자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통로’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연구노동권’의 확보를 위한 연구자들의 연대와 조직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5월 9일에 치러질 조기 대선을 앞두고 ‘메이데이’가 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전개된 7·8·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독재정권 아래 억압 받아온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강렬하게 이 사회에 전달했다. 이번에야말로 한국 사회의 노동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도 이 흐름에 함께 연대하자. 우리 역시 빵을 필요로 하는 노동자다. 연구자집단 내에서 당장의 문제제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연대할 수 있는 내 옆의 동지를, 내 편을 찾는 것부터 시작이다. 우선 ‘불편함’을 고백하자. 지난여름 여성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그것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감내해야 할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는 이제 철 지난 말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에겐 이 말이 필요하다.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