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김지영,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일곱번째숲, 2017.

지옥에 발 딛은 페미니스트들의 시대, “우리는 헬페미다”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을 합성한 ‘헬조선’이란 ‘지옥처럼 살기 힘들고 희망이 없는 한국 사회’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청년들인 ‘삼포세대’와 그들이 살고 있는 ‘헬조선’은 2010년대 부터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잘 보여주는 세태어로 여겨졌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저서 『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이하 『헬페미』)에서 그 ‘헬조선’속에서 울부짖는 ‘삼포세대’청년들의 성별은 ‘남성’뿐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논의를 열기 시작한다. 저자는 지옥과 페미니스트의 합성어인 ‘헬페미니스트’(이하 ‘헬페미’)란 용어에 주목한다. 사회의 지반을 전복하고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자들은 결혼과 출산이 처음부터 ‘기회’도 ‘권리’도 아니었기에 더 잃을 것이 없는, 그래서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헬페미’들이다. 이번 호에서는 󰡔헬페미󰡕의 저자 윤김지영 선생을 만나 새로운 페미니즘의 세대와 지형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았다.

Q. 제목에 쓰신 개념들이 책의 주제를 응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목으로 사용하신 ‘헬페미니스트’라는 정의, ‘선언’이라는 개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A.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의 세기가 다시 열렸을 때, 이 새로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을 어떻게 부를 것인가의 문제도 대두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새롭게 등장한 페미니즘 물결을 명명할 때, 선배 페미니스트들을 준거점으로 하여 ‘영페미’, ‘영영페미’라고 붙이는 식이었어요. 그러나 현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을 그렇게 나이나 세대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권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가 운동의 궤적 안에서 발명한 이름이며 그들이 무엇을 하고자 하고,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주목한다고 했을 때, 그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헬페미’라는 단어가 떠올랐어요. ‘헬페미니스트’란 즉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라는 의미입니다. ‘헬페미’는 헬조선이라고 하는 절망의 공간에서 지금까지 여성에게 허용된 절망의 담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면서, 이 헬조선이라는 지옥도를 다시 부수고 그 폐허 위에 새로운 것을 정초해 나가려는 움직임으로서의 의미가 깃든 새로 등장한 페미니스트들의 이름이죠.

‘헬페미’라는 고유함은 이전 세대의 페미니스트들과의 차이에서도 드러납니다. 대학 운동권 내부의 여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영 페미’, ‘올드 페미’의 경우 설득의 언어를 중시했습니다. 그들은 디지털 공간의 여성혐오에 대응할 수 없었어요. 여성혐오의 언어는 무논리의 언어이자 증오의 암호인데, 거기에 대해 논리적 설득의 언어로 반격하면 ‘진지충’이라는 희화화가 돌아올 뿐이었거든요. ‘저네들은 어쩔 수 없다’고 방치하고 미뤄두었지만, 디지털 공간과 그 영향력의 확대에 따라 디지털 공간에서 유행하는 언어와, 혐오의 문법이 현실공간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자 여성혐오의 언어는 정복 불가한 듯 보였습니다. 그런데 메갈리아나 헬페미가 등장하며 미러링의 방식으로 혐오의 언어를 되받아치고, 분노의 언어로서 욕설을 만들고, 과격한 이야기를 하는 등 여성에게 용인되지 않았던 많은 것들을 흡수해서 반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디지털 공간 안에서 방치되었던 여성혐오의 난무가 점차 페미니스트에 의해 다시 접수되기 시작한 것이죠. 이를 주도하는 헬페미들이 어떤 언어와 특성을 가졌는지 이야기하려면 나이에 따른 구분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선언’또한 새로운 현상입니다.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들조차 적극적으로 “페미니스트냐”는 질문을 회피하고 ‘페미니스트’로부터 자신을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페미니스트가 사회적 낙인이었다는 거죠. 그러나 2015년 이후 이제 많은 여성들이 감히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그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을 스스로 부과하면서 “나는 페미니스트다”하고 선언했어요. ‘페미니스트’는 더 이상 사회적인 낙인과 고립의 이름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위한 연대의 이름이 된 것이죠.

Q. 무엇보다 ‘그날 이후’는 여는 글에서 밝히셨듯이 ‘post it’이라는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셨는데요. 이 의미를 어떻게 연결하셨나요?

A. 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사건이 일어났던 5‧17 페미사이드를 추모‧기억‧애도‧분노하는 방식으로 포스트잇이라는 매체를 선택했습니다. 파편적이고 일회적이어서 언제든지 떼어내어 버릴 수 있는, 단발성의 매체에 그려진 그림과 메시지, 낙서같은 것들이 커다란 공명을 일으키는 이어말하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선동자나 영웅이 대자보를 통해 서론, 본론, 결론을 갖춘 완결된 이야기로 모든 서사를 마치는, 거대한 영웅서사가 아니었죠. 포스트잇 정치학으로서의 ‘그 날’은 한국 여성들에게 페미니즘의 전환기, 대중적인 확산의 계기에서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작은 포스트잇으로 그 이름 없는 많은 여성들이 함께 나와 말하기를 이어갔다는 것, 이 사건을 ‘여성혐오사건’이라고 진단한 것도 전문가들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서 여성혐오를 마주치는 여성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진단되고 명명되었다는 방식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Q. ‘헬페미’는 ‘주체’자격을 거절하는 ‘변이체’라는 논의가 흥미로웠습니다.

A. 여성은 항상 ‘대상’의 입장이었고, 남성 주체에 의해서 ‘의식의 대상, 관찰의 대상, 욕망의 대상’이 되어왔다고 했을 때, 페미니스트들은 다시 주체 자격을 탈환해 내는 길이 이기는 정답이라 생각할 수 있죠. 주체subject 개념의 어원은 라틴어입니다. 라틴어 수브엑툼subjectum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아래sub+내던져지다jectio의 합성어에요. 어원학적으로 ‘아래에 내던져진 것, 아래에 매몰당하고 내깔린 것’이라고 하는 수동적이며 복종적이고 예속적인 것이라는 의미도 주체에 포함됩니다. 또한 라깡의 정신분석학에 의하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나의 자율적인 선택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도덕규범과 언어질서 안에 내가 순응해서 들어가고 편입하는 방식을 통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이처럼 주체가 가지고 있는 신빙성과 복종성, 예속성의 측면을 봤을 때, 여성이 다시 주체의 자리를 갖는다는 것은 결국 이 현실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남성중심적 질서-아버지의 법질서 안에 그냥 다시 예속되는 것에 불과하죠.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주체화 양태를 생각해 볼 수 없을까? 다른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법을 생각할 수 없을까? 이제는 남성주체의 자리를 탈환해서 거기 앉는 것이 답이 아닌 거죠. 새롭게 자기 자신을 구성해 내는 방식으로 생각한 게 ‘변이체metamorphoject’ 개념이에요. 변이metamorphosis+내던지다jectio를 합성한 것으로, 변신과 변화, 생성을 향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내던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즉, 변이체로서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하는 순간부터 자기 자신도 문제시 하는 거죠. 이렇게 보면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선언이란 결국 세계와 완전히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를 선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 자신마저 변용의 에너지 안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내가 변했다는 것은 결국 나와 관계 맺는 가족, 연인, 세계와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재설정하게 하는데요. 그렇게 세계와 나와 타자의 관계망을 구성하던 다양한 규율과 질서, 규범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불편함과 낯섦을 유발하며, 변신을 요청하고 강제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변이체인 것이죠. 페미니스트는 이미 예전의 주체개념으로 포획될 수 없는, 그 자체로 변이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Q. 본문에서 헬페미들은 설득의 언어마저 개념녀의 다른 버전일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경계한다고 설명해주셨고, ‘성녀와 창녀’라는 개념이 허구이듯 ‘착한 페미니스트’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셨는데요. 그렇다면 변이체인 페미니스트란 페미니스트에게 씌워져 온 구분 자체를 무너트리고 있다는 것이라 이해해도 될까요?

A. 그렇습니다. 예전의 페미니스트들은 설득의 언어, 정치적 올바름을 장착해야 한다는 부담이 매우 컸어요. ‘페미니스트라면 최소한 이 책은 읽어야 한다’는 강박, ‘적어도 내 주변 남성들 몇은 동지로 포섭할 정도의 설득력을 가져야만 한다’는 자격조건이 오히려 페미니스트라는 자리를 어렵게 한 것일 수 있는데요. 설득의 언어를 통해 우리 진영에 남성들을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남성이 들어도 이해할만하고, 남성에게도 과격하지 않아서 남성이 부담을 덜 수 있는 페미니즘으로 설명하자는 것이죠. 일종의 전략일 수는 있겠지만 한편으로 또 다른 ‘개념녀’ 프레임이기도 합니다.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는 “우리는 주인의 도구를 가지고 주인의 집을 부술 수 없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이미 내재한 설득의 언어조차도 굉장히 남성 중심적인 언어들이 대부분입니다. 남성 동료가 들어도 이질적이지 않은 ‘남근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이성의 언어’로 과연 이 남성중심 질서에 얼마나 균열을 낼 수 있을까요? 그 페미니즘은 가장 올바른 족쇄를 차고 있기 때문에 지금처럼 과격하거나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전략을 이끌 수 없었던 것이죠.

메갈리아가 처음 나왔을 때 많은 반응 중 하나는 “저들은 여자일 리 없다”는 것이었어요. 기존에 승인받은 ‘여성의 언어’와 전혀 다른 방식의 욕설과 분노, 고함의 언어들이 예의 정치적 올바름의 언어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내파하게 하는 지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페미니즘,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즘은 또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과 ‘그 오빠가 어딜 감히! 라며 반동을 일으키는 페미니즘’일 테죠. 페미니즘 개념의 옳고 그름이라는 양분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 승인의 몫을 남성들에게, 더 나이 많고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넘겨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올바른 페미니즘과 올바르지 않은 페미니즘이라는 이분법적 질서 자체에 이미 남성 중심적인토대가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보아야 해요.

Q. 앞으로 함께 선언을 해나갈 헬페미들과 대학원신문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헬페미라는 명칭 안에 운동‧공부‧활동 등 정말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함께 있습니다. 헬페미란 단순화해서 특정 부류만을 지칭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헬페미 안에서도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그룹이 동시에 존재하거든요. 설령 운동의 방식이나 페미니즘을 정의내리는 방식, 활동의 반경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그 다른 차이를 인정하고, 어떻게 함께 공생하고 연대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다른 전략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는 모습을 지금도 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한 그룹만의 승리가 아니라 다각적인 전략과 가능성을 모색하는 연대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이 과연 어떠한 세기를 열고, 어떤 많은 일들을 했으며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어떻게 일상을 재개편하고 있는지에 대한 그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글로 읽히길 바랍니다. 또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 남성들의 “페미니스트들이 욕하고 설친 것 말고 한 게 뭐냐”는 비아냥에 대해 우리의 전략이 얼마나 풍부했는지, 우리가 겨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응수하는 지점이 되길 바랍니다. 여기서 발견한 것을 디딤돌 삼아, 우리의 집착으로 연장해내고 도약할 수 있다는 것도, 함께 기억하고 해석하는 책임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 인터뷰·정리: 신지현 기자 jhlily0408@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