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우
본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비교문화협동과정 석사과정

“부풀어 오른 절름발이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날자”

다사다난한 봄에도 절정은 오는지 많은 학우들이 주섬주섬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올 봄의 색은 사건들 때문인지 미세먼지 때문인지 여느 때보다 탁하다. 간절히 기다리던 배는 올라왔지만 아직 많은 이야기들은 여전히 가라앉아 있다.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개혁을 농단을 재구축을 중얼거린다. 하루를 버티는 사람들 뒤에 폭력은 산재해 있고,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사람들 뒤에 들려온 죽음들, 들어야만 하는 죽음들, 들리지 못한 죽음들이 있다. 그럼에도 기억되어야만 하는 죽음들 위로 누군가는 다시 출발하고, 애도는 막 시작되었지만 정략적이고 간편한 말들이 위로 다시 찌꺼기를 흘린다. 우울한 배경으로 글을 시작했지만 우울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위태로운 삶들이 너무 가까이 있음은 분명하고, 그 안에서 읽고 공부하며 글을 쓰려는 입장에서 무력해질 때가 없는 것 역시 아니다. 나는 어디까지 말하고 어디까지 쓸 수 있는가? 고통은 비교가 불가능하다지만 더욱 불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원우 발언대에서 어느 연구 노동자가 메이데이를 앞두고 고한 글에서 읽은 불가능들은 단순히 고통 또는 비극으로만 해석될 수 있는가? 하지만 그 명백한 불가능들 앞에서 투쟁은 구조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는 학자적 명제를 쉽게 발설할 수 있는가? 치열한 삶의 위반에 대하여 오히려 결정적인 중단을 막는 작은 위반들이라고, 혹은 누군가의 자리를 빼앗는 본질주의라고 폄하할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라도 있는가? 이미 사막에 내던져진 수많은 말들이 말라 죽어갈 때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 속에서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나의 공부는 자꾸 바깥을 보고 있다. 다시 부끄럽다. 반복되는 말들의 범람 속에서 말들은 어쩐지 가치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나만의 고민인 것은 아니다. 많은 원우께서도 끊임없는 편지를 여기 보내어 왔지만 편지는 어딘가 다른 곳에 도착한다. 나도 아마 많은 글들을 오해하며 읽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안에서만 머뭇거리는 말들은 눈치를 보면서 불안정안 자리를 방어하기 바쁘다. 촛불이 생각하고 이야기했던 그동안 생각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불가능들은 다시 길을 잃는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아마도 이것이 내가 유일하게 단언할 수 있는 주장이다. 편지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지만 결국에 어떤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한다. 물론 말들은 많지만 이야기는 적다. 말들은 왜곡되고 집을 잃어버린 이방인이 되어 유랑한다. 바깥에서 이야기들이 침투한다. 하지만 어디까지 읽어낼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말들은 다시 오해되고 지금 나의 말들도 오해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오해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글에서 누군가로 가정되는 수신인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만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 설명이 어디를 향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매일 실패하지만 적어도 나의 말들을 통해 나는 조금 더 집을 잃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집을 민다. 집을 이고 이동하는 달팽이를 좋아한다.
어쩌면 진실은 생각보다 더 끔찍한 곳에 있을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시간을 마치 잃어버리지 않은 것처럼 산다.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일단 살아남아야 하기에. 흔적들을 쉽게 지나치면서 새로 나온 맛집을 검색하고 놓친 말들이 없는지 핸드폰 액정 화면을 내리고 누군가 올린 여행 블로그로 판타지를 가꾸고 물음표를 하나 더 지운다. 가까움에 질식하는 것이 두려워 마스크를 쓴다. 하지만 미세먼지의 탓으로 돌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왜 이렇게 말을 바꾸십니까? 여전히 일관됨을 요구하는 삶 속에서 단단해지는 방법은 모든 물음표를 지우는 방법뿐이다. 마스크를 쓴 이상 무엇도 삼키지 않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눌 필요도 없다. 불편함은 삶에 침투하지 못하고 ‘시간’을 지나간다. 잃어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보인다. 설명 불가능한 “사건이 그들을 덮쳤을 때” 침묵은 폭력적이다. 불편함을 더 마시고 싶다. 마스크를 벗는다.
문득 목구멍이 가렵다. 그래서 글에 탁음이 이토록 섞였는지 모르겠다. OECD 기준에서 오늘의 미세먼지 농도는 ‘나쁨’이지만 휴대폰 액정의 날씨는 ‘보통’이라고 보여준다. 하지만 미세먼저의 농도가 보통이기에 마스크를 벗은 것은 아니다. 나쁨을 보통이라고 말하는 화면을 고발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고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부풀어 오른 절름발이의 고통을 기억하면서 날자”는 이상의 말을 기억한다. 여전히 애도할 것이 남았고, 없는 말들을 더욱 주워 모아 이야기해야 하지만 공기가 아직은 탁하다. 맑은 하늘을 위해, 나의 섣부른 글이 삭제해버린 물음표가 없었기를.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19 17:3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