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인문학, 위기를 넘어 다양한 가능성으로

인문학공동체의 발견과 새로운 인문학의 발명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과 마주하게 된 지도 오래다. 오늘날 인문학 전공 대학원생들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협당하는 방식으로 인문학의 위기를 감각한다. 과연 인문학 연구에 종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인문학이 창출하는 가치는 어떤 것인가,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학의 위기’가 있다. 대학원생이 대학원을 다니며 조교로 일하다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이후에 교원으로 임용되리라 기대되는 학내 연구 인력의 재생산 사이클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국가가 인문학 박사를 (비)정규직으로 고용하는 HK사업도 HK+ 사업으로 전환되는 가운데 그 지속성을 상실했다. 대학이라는 울타리 밖에서도 연구자로서 살아가기 위해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할지는, 한층 절실한 물음으로 제기되고 있다.

본지는 대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는 색다른 조언을 듣기 위해 인문학협동조합의 오영진 총괄이사와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대학 밖 연구공동체’를 지향하는 한편, ‘기계비평’, ‘테크노페미니즘’, ‘게임 인문학’과 같은 새로운 인문학 연구 분야의 개척과 기획을 주도해 왔다.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Q : 인문학협동조합의 창립 배경에는 대학의 위기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문제의식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대학의 위기’가 ‘대학 밖’ 연구 활동의 필요성을 견인하고, ‘인문학의 위기’가 또 다른 ‘인문학’을 상상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던가. 본지는 자세한 질문으로 나아가기에 앞서, 오영진 총괄이사가 상기한 바와 같은 ‘위기 상황’들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 묻고자 했다.

A : “대학 안의 정상 인문학이 있고, 대학 밖의 비상상황의 인문학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학이 여전히 가장 유력한 공부의 공간이긴 하지만 어느 시대나 대학이 아닌 곳에서도 공부를 해 오곤 했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피해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이미 잠재해 있던 ‘방법’을 조금 더 다양하게 열어보고 있을 뿐입니다.

소위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낮아지고, 사회적으로 그 쓸모를 더 이상 통용받기 어려운 현실에서 기인합니다. 반대로 사회의 일부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인문학은 전문분야로서 파고들기엔 매력이 없지만 모든 학문의 기초로서 즉 내용이 아니라 형식으로서 요청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생각의 내용보다는 생각의 방식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한편, 대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대학전체의 위기입니다. 그 구성원 사이에 오래도록 고착된 위계질서와 낡은 평가방식, 교육보다는 사업에 목적이 있는 부패한 관리자들이 만들어낸 위기입니다.

인문학자들은 사회의 요구와 주변의 위기를 빠르게 파악하고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타 학문에 비하면 자본이나 제도의 장력에 심하게 좌지우지 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문학자들은 ‘무엇을’ 말할 것인지 고민하면서도 ‘어떻게’ 말할 것인지도 요청받고 있습니다. ‘어떻게’의 요청이 당혹스러워 이 모든 것을 위기라 지칭한다면 현실 인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대안적 연구공동체의 모색

Q : 일반적으로 인문학 영역에서 연구 활동이란 개인의 역량에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우리는 KCI 등재(후보)지에 ‘많은 수’의 논문을 내놓기 위해 각개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어떤 점에서 중요할까.

A : “연구에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연구자에게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나의 생각에 협력하든 반대하든 간에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시선이 자기 생각을 입체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 접속하지 못한 연구자는 토론을 하지 못합니다. 토론이 없으면 고립되고, 누구에게도 통용되지 않는 언어를 익히게 됩니다. 대학 안에서만 공부했던 우리는 이렇게 서로 돕고 싸우는 사고의 과정에 익숙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토론마저도 ‘배틀(대결)’의 형식으로만 익혀왔기에 토론이 주는 사고의 간섭과정에 대해 즐거움과 그 창의적 결과물을 맛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늬앙스를 띠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독하지만 외롭지는 않아야 공부를 오래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공동의 힘으로만 해결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도 많습니다. 당장 새로운 이야기를 대중 앞에서 하고 싶다면 강의나 출판을 해야 합니다. 강의를 기획하고 홍보하고 수강생을 모집하고 출판기획서를 쓰는 등 모든 일에는 노동이 뒤따릅니다. 제도의 힘이 사라진 자리에 우정의 힘이 대신하도록 연구자들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 그렇다면 인문학협동조합이 진행하는 주요 활동과 그 방향성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본지는 그에 관한 간략한 소개를 요청하면서, 오영진 이사에게 ‘대안적 연구 공동체’로서 인문학 협동조합이 어떤 가능성과 의미를 지니는지 물었다.

A : “현재 인문학협동조합에는 인문학계열의 연구자들이 70여명 모여 있습니다. 각기 다른 전공과 관심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여전히 고민이 많습니다. 다만 4년 동안 활동해 본 결과 저희 조합의 방향은 크게 3가지로 요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 대중과 접속. 20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대학 강의의 형태를 벗어나 다양한 시민들과 만날 수 있는 자리를 자주 마련했고, 이를 통해 연구자들의 강의주제와 방식에 크게 변화를 꾀했습니다. 고령화와 직업주기 다양화로 인해 앞으로는 평생교육의 시대가 열릴 것입니다. 조합에서는 인문학자들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가급적 많은 대중강의를 만들거나 연결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회와 대화. 대학 안에만 있다 보면 학문이 사회를 반영하지 못하고 고립되는 일이 잦습니다. 지식인의 위상 같은 것은 사라진 오래지만, 정작 어떤 사회적 문제 앞에서 말로서 강하게 개입할 수 있는 지식인은 필요합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이런 때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플랫폼이 되고자 했습니다. 지난 정권 세월호 사건 때도 가장 먼저 인문학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또 청년문제를 생생하게 증언한 『흙흙청춘』 같은 책도 있지요. 저널리즘과 학문의 속도를 절충해 가급적 사회의 흐름에 맞춰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해야만 하는 말’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덕분에 조합과 신문사와 연재기획을 공동으로 하는 일도 자주 있는 편입니다.

셋째, 새로운 발명입니다. 인문학협동조합은 기존에는 인문학의 영역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 영역에 인문학의 상상력을 결합해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었습니다. 오타쿠와 서브컬쳐, 컴퓨터 게임, 테크놀로지 등 오락에 불과하거나 전문가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인문학자의 시선이 어떻게 개입할 수 있는 지 실험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연애인문학>, <게임과 인문학>, <기계비평> 같은 강좌나 출판물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인문학으로 만들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인문학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 새로 보이는 것들을 제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인문학협동조합이 잠금해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중과 만남, 사회와 보폭 줄이기, 새롭게 인문학 발명하기 모두 인문학자들이 예전부터 꿈꾸던 활동 중 일부뿐입니다. 단지 제어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이질적인 것과 융합되는 인문학의 다양한 가능성들

Q : 인문학협동조합에서는 ‘기계비평’, ‘게임과 인문학’, ‘테크노 페미니즘’ 등과 같은 새로운 인문학 연구 분야들을 제시하면서 관련 기획을 주도해 왔다. 이질적인 것들이 접붙여진 이 이름들은 전통적 학제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영진 이사에게 새로운 인문학 분야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했다.

A : “<기계비평>은 제가 한양대 에리카 캠퍼스에 주관하고 있는 초대형 교과목입니다. 400명 수강생과 교내 콘서트 장에서 열고 있습니다. 제목이 조금 낯선데, 계원예대 이영준 교수님의 저서 <기계비평>에서 제목을 가져왔습니다. 매주 각 분야 엔지니어와 철학자, 아티스트 들을 모셔다 인간과 기술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는 주제로 사회자인 저와 토크쇼 겸 강의를 열고 있습니다. 요즘 융복합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데, 이 수업이 그러한 모델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주 오시는 선생님들께서 공학적 지식과 문화역사적 지식, 철학적 통찰 모두를 고르게 담아내는 묘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기획자이자 연구자로서 이 균형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것은 단순히 분량의 분배문제가 아니라 이들을 관통하는 적확한 사고방식을 찾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수업의 방식도, 주제도 새롭다 보니 인기가 높아 매 학기 수강신청이 수초대로 마감되고 있습니다.

또, 이 과목의 미덕은 한번 제시한 커리큘럼은 다시 반복하지 않고 매 학기 새로운 주제로 구성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시민기술시대’, ‘테크노페미니즘’, ‘소프트웨어비평’ 등 다양한 주제로 수업을 진행했고, 현 시대를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과 함께 합니다. 특히 지난 학기 <테크노페미니즘> 강의는 매 회 수업 자체가 페미니즘 논쟁의 격전장이면서도 기술과 젠더의 문제를 사유할 수 있는 사고실험장이 되었습니다. 강의록 자체를 묶어 책으로 출간할 예정에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준된 학문적 결과를 강의하지 말고 수업을 통해 지식을 같이 만들자는 것이 제 아이디어입니다.

<게임과 인문학>은 협동조합원들과 함께 만든 과목이자 기획입니다. 성균관대학교의 천정환 교수님을 필두로 젊은 연구자들이 의기투합 해 컴퓨터게임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를 2년전부터 해 왔습니다. 게임이 오락일 뿐 아니라 사회적 경험이 되어가고, 표현의 매체가 되어가는 과정을 포착해 해석과 논평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소위 ‘겜알못’을 위한 <게임과 인문학>과 ‘겜잘알’을 위한 <게임과 현실>로 구분해 두 개의 과목을 열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수업은 게임텍스트를 심도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문학적 관점을 제공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이 과목은 선생보다는 학생이 더 신나는 과목입니다. 60명 정원에 전원 모두 a4 5페이지에 해당하는 평론을 써 내는 수업은 이 수업밖에 없을 것입니다. 순위가 의미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학기 성균관대 강의평가 상위 0%를 받았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사례만으로도 인문학자들이 정말 할 일들이 많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말씀드리자면 이 두 사례 모두 대학 밖에서 만들고 먼저 실행한 아이디어를 대학 안에도 실험적으로 이식해본 결과라는 것입니다.”

Q : 그처럼 새로운 인문학 분야들은 인문학의 새로운 존재방식 혹은 생존방식이 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일까.

A : “생존이라는 프레임은 거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적으로 인문학은 고사 위기가 아니고 새로운 방법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소통이라면,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인문학자들이 테크노컬쳐나 포스트휴먼 문제를 다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소재의 첨단성이 아니라 주제의 고전성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의 윤리와 존재에 대해 물어야 합니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상상력도 여전히 문제가 됩니다. 이러한 시대에 여전히 통용되는 오래된 인문학의 질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제의 고전성이 중요하다는 말은 소재의 고전성에만 머물지 말자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위키피디아와 구글검색의 시대입니다. 인문학은 특정전문지식의 카테고리를 부수며 다양하게 변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 <기계비평>이나 <게임과 인문학>과 관련된 강의가 성균관대와 한양대 등의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학생들의 반응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강의 과정에서 겪은 흥미로운 일화나 강의를 하면서 느낀 보람과 성취 등에 대해 물었다. 아울러 새롭게 개척된 인문학 영역을 기반으로 강의를 진행하는 데 곤란함이나 어려움을 느낀 부분은 없었는지를 물었다.

A : “커리큘럼 연구가 어렵습니다. 선행연구로 삼을만한 참고문헌이나 사례가 거의 없고 오로지 새롭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기계비평>의 경우, 매회 달라지는 초대 손님이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해 수혈하고 있고, <게임과 인문학>의 경우, 5명의 팀원들이 계속 워크숍을 열면서 자기 연구와 강의 커리큘럼을 업데이트 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저희 수업들은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수업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이를 받아들고 자기 프로젝트로 삼는 경우들이 종종 생깁니다. <기계비평>의 한 친구는 강의를 통해 사운드 아트를 접하고 나서 그 아이디어를 실용적으로 전유해 발명대회에서 입상했다고 합니다. 한 무용하던 친구는 자신의 퍼포먼스에 기계적 장치를 응용할 용기를 얻었다고도 합니다. <게임과 현실> 수업에서는 가상의 게임기획서를 작성하는 과제가 있는데, 일부 과제물은 구현만 하면 상품성과 작품성 모두를 획득할 놀라운 아이디어들입니다. 이것이 이 수업들이 학생에게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인터뷰·정리 : 최은혜, 반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