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의 대화>
손호철,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박정희, 87년, 97년 체제를 넘어서』,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7년.
촛불혁명 이후 2017년 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박근혜게이트로 촉발된 역사적인 ‘11월시민혁명’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완수할 수 있는가.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저서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에서 박근혜게이트와 ‘11월시민혁명’을 박정희체제와 87년 체제, 97년 체제로부터의 수직적 층위의 문제로 분석하고 지난 해방 70년 정치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본다.
저자는 책 서두에서 화가 폴 고갱의 작품명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 것인가?”를 빌려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저자는 촛불혁명의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지만,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임을 지적하며, 우리의 문제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가 아닌 ‘어디로 가야하는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이러한 문제제기에는 역사 주체들의 책임에 대한 각성 요구와, 그들이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 들어있다. 이번 호에서는 87년 체제 30년을 맞아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의 저자 손호철 교수와 함께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와 ‘2017년 체제’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보았다.
Q. 촛불혁명의 원인을 세 가지 층위로 분석하셨는데요. 박근혜게이트는 현상이며, 87년 체제의 불완전성이 그 원인이 되었고, 그보다 근저에는 97년 체제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잠재해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87년 체제의 불완전성은 대표적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와 대의민주주의 실패로 나타났다고 보셨는데요.
A. 돌이켜보면 대통령의 권력남용과 측근 비리 문제는 정권을 불문하고 계속 제기되어왔습니다. 김영삼도 아들 김현철게이트가 있었고, 김대중의 경우도 세 아들이 감옥에 가야 했죠. 노무현대통령 또한 박연차게이트로 인해 목숨을 잃어야 했고요. 87년의 민주화가 제왕적 대통령제에 의존했기에 이런 비극들이 계속 있었다는 거죠. 이것은 비단 대통령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국회와 여당, 언론이 이를 제대로 견제했다면 이렇게까지 심각해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대의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87년 체제는 불완전한 민주화의 결과였습니다. 촛불혁명을 촉발한 원인이 바로, 의회나 대통령이 국민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87년 체제의 불완전한 민주화라고 본 겁니다. 이런 의미에서 87년 체제는 정치학자 기예르모 오도넬의 ‘위임민주주의’에 가깝습니다. ‘위임민주주의란’ 민주선거로 대통령이 선출되지만, 대의민주주의를 무시하고 모든 권력을 위임받은 것처럼 전권을 행사하는 왜곡된 민주주의를 말합니다.
Q. 그 기저의 원인으로 지적하신 97년 체제는 양극화와 민생불안을 야기한 신자유주의 체제가, 혁명의 저류에 있던 대중들의 분노의 원인이라 이해하면 될까요.
A. 저는 이번 촛불혁명에서 가장 큰 기폭제가 된 인물이 정유라라고 봅니다. 혁명의 불씨가 붙으려고 하는 순간 정유라가 휘발유를 부은 격이었죠. 결국 정유라가 SNS에 남긴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실력”이라는 말이 저 밑바닥부터 쌓여있는 우리 사회의 응축된 분노, 특히 ‘헬조선’, ‘흙수저 사회’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분노를 터트린 거죠. 정유라가 받았던 각종 특혜가 우리나라의 불공정성, 재벌, 정경유착과 같은 모든 문제를 보여준 거잖아요. 입시부터 학점까지 정말 힘들게 노력한 수많은 학생들은 뭐가 되겠습니까. 말 그대로 ‘돈 많은 부모 만나는 것도 실력’인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게 된 것이죠. 제가 촛불집회에서 본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에 대한 포스트잇 중 하나에는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는 부모님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자식들에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라 적혀있었습니다. 그런 ‘흙수저 사회’에 대한 분노가 기저에 깔려져 있었다는 겁니다.
Q. 촛불혁명 이후의 ‘2017년 체제’라는 실천 명제에 대한 해답으로 탈신자유주의를 제시하셨고, 보다 현실적인 목표로는 ‘복지자본주의’를 제시하셨습니다. 적폐청산을 그 과제로 지목하셨고요. 그 두텁고 거대한 ‘적폐’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의 수립 가능성에 대해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촛불혁명을 주도했던 ‘퇴진행동’의 대변인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촛불혁명이 “한국현대사에서 최초로 성공한 혁명”이라 평했어요. 87년 6월 항쟁의 경우 직선제 개헌과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직선제 개헌에는 성공했으나, 양김분열로 인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민주정부 수립은 좌절되는, 반쪽의 승리가 되었죠. 그런데 이번 촛불혁명을 통해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고,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퇴진, 민주정부의 수립이라는 두 개의 목표를 이루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이것이 항쟁이 아닌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혁명은 4.19처럼 보다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부당한 권력을) 쫒아내면 혁명이고 못 쫒아내면 항쟁이라 불리는 것이 아닙니다. 박근혜 탄핵,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1차적 목표가 달성된 듯 보이지만, 박근혜 정부가 과거 박정희체제와 87년 체제, 97년 체제에 걸쳐 응집된 모순의 폭발과 함께 막을 내린 것이라면, 이제는 그 체제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무엇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당시 ‘퇴진행동’이 내건 적폐청산 6대과제는 세월호 진상규명,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특검, 국정교과서 중단, 언론독립, 성과퇴출제 중단, 사드배치 중단 등이었습니다. 몇 가지는 현재도 진행 중이지만, 사드배치는 정세의 변화에 민감한, 중장기적으로는 동북아 전체에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올 수 있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지금과 같은 ‘헬조선’, ‘흙수저 사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를 이룩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좀 더 인간적인 복지자본주의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요. 이에 대한 단초들은 상당히 많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마가렛 대처의 별명인 TINA(There Is No Alternative) 대신 제가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TATA(There Are Thousands Alternatives)입니다.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하는 겁니다. 정리해고 대신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서로 일자리를 나누는 등, 대안은 늘 존재하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숙명론적인 커다란 혁명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다양한 대안들을 모색하고 현 상황을 넘어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가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인상 등 대안의 단초를 마련하고는 있습니다만, 당초 목표했던 부자증세분의 1%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직은 갈 길이 너무나 멉니다.
많은 분들이 박근혜 탄핵으로 ‘박정희신화’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민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박정희’는 다시 살아날 겁니다. 트럼프 같은 사람이 어떻게 미국에서 대통령에 당선될까요? 저학력, 저임금의 백인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했는데요. 결국 기존 체제에 대한 서민들의 분노인거죠. 책에서 논했듯, 김대중이 당선되었던 9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김대중을 찍었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인 2007년 대선에서는 가난한 사람일수록 이명박을 찍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심화되었거든요. 결국 김대중, 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의 민생파탄이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를 찍겠다’는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결국 보수정권이 들어선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를 지지하는 현상, 그리고 일베와 같은 청년보수의 등장도 같은 맥락이죠. 민생문제, 즉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젊은 층에서 결국 사회적 낙오자들의 보수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민생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박정희’가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인 것이죠. 그래서 2017년 체제의 문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이 아니라, 다시 민주주의의 문제입니다. 박근혜 같은 정권을 다시 겪지 않고, 트럼프 같은 대통령을 한국에서 보지 않기 위한 근본적 접근이 필요합니다.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낙오한 사람들이 새로운 대안으로 트럼프를 지지한 것처럼, 민주정부를 지지했는데도 민생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정치는 과거로 되돌아 갈 겁니다. 이에 대한 경계의 의미에서라도,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권에 대한 지지와 날선 비판이 함께 필요합니다.
Q. 현재 시점의 일상적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젠더민주주의에 대해 언급하신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책에서는 간략히 정리되었지만, 이에 대해 보다 소상한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A.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고, 민주화되었다’ 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굉장히 성급한 판단입니다. ‘프리덤하우스’의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민주주의도 2등급, 1.5등급을 기록하고 다시 2등급으로 떨어져 대만보다 뒤지는 수준이고요. 더군다나 인터넷 및 언론의 자유는 60~70위권을 기록하고 경제적 민주주의는 더 후퇴하여 ‘헬조선’이라는 말이 나오는 상황입니다.
‘작업장 민주주의’는 또 어떻습니까? 저는 민주주의에도 여러 층위가 있다고 보는데, 자본주의 하에서는 모든 민주주의가 공장 문 앞에서 멈춥니다. 공장에서는 (원칙적으로) 상급자가 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모든 시민권을 포기하고 지배-종속의 관계에 놓이는 거죠. 그렇지 않으면 자본주의는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1987년,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난 이유 중 하나가 ‘바리깡’입니다.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자유도 없던 거죠. 군대도 아니고, 공장에서 머리 길이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최근에는 야구감독 김성근이 작년에 어떤 외국선수의 염색을 두고 문제 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선수가 염색을 하는 것을 왜 감독이 문제 삼습니까? 이런 경우들은 일상성의 민주주의의 문제라 볼 수 있습니다. 일상성의 민주주의는 우리 삶의 문제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젠더 문제를 비롯한 성 소수자의 민주주의가 있고, 학교에서는 교내 민주주의가 있겠죠. 가정의 민주주의는 어떨까요.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가장도 투표로 뽑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가장이 되면 이렇게 하겠다’고 공약을 내고 선거유세를 하고 투표를 거치는 거죠. 민주주의의 궁극적 지점은 결국 우리에게 어디까지 투표권이 주어지냐는 것이니까요.
이러한 일상적 민주주의에 있어서, 젠더란 굉장히 오래되고 뿌리 깊은 사회적 불평등 관계의 한 측면입니다. 87년 체제를 돌아보며, 우리는 젠더민주주의와 같은 일상에서의 민주화는 얼마나 성취되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여성운동이 전개되어 왔지만, 아직도 젠더민주주의의 측면에서는 잘못된 것들이 많죠. 이 문제는 젊은 세대들의 경우에 특히 심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우리 세대는 가부장적으로 살아왔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있기에 여성주의 운동들- ‘메갈리아’에 대해서도 우호적이고 동정적인 감각을 가진다면, 젊은 세대들은 젠더문제를 (오히려) 신자유주의적인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는 듯 보입니다. 예전과 달리 여성들이 입시나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자 남성과 여성을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굉장한 피해의식을 가지는 거죠. 이렇게 형성된 젊은 세대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적 분위기도 일정부분 과거 체제의 산물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국 젠더 문제 또한 87년 체제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됩니다.
Q. 마지막으로 2017년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주체이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A. 항상 촛불을 들 수는 없겠지만, 늘 가슴속에 촛불을 켜고 계시기를 당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는 언제든 예전으로 돌아가겠죠. 요즘 젊은 세대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압니다. 저는 그럴수록 그들이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정의하는 것은 팔 할이 정치입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김수영 시인의 유명한 시구가 있죠. 자신의 시야가 ‘조그마한 일’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핸드폰을 사는 문제만 갖고도 많은 고민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정치의 엄청난 무게에는 무감각해지기 쉽습니다.
제가 지난 촛불시위에서 들었던 젊은 세대의 발언 중 충격을 받은 말이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은 분노하고 있지만 촛불을 들러 나오려 해도 알바 때문에 못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이 정말 생존의 문제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 확 와 닿았죠. 87년 체제가 우리에게 정치적 자유를 줬다면 97년 체제는 우리에게 경제적인 불안을 준 것이죠. 그 두 가지의 콤비네이션 속에 있는 것이 최근의 젊은 세대가 아닌가. 지금 대학원에 재학 중인 젊은 세대들이 다중적 압력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럴수록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개인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입니다. 정치를 바꾸지 않고는 우리의 삶의 궤도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광장과 촛불에 대한 관심을 늘 놓지 않기 바랍니다.
■ 신지현 기자 jhlily0408@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19 04:09: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