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의 책임감, 안녕하십니까?

어느 대학원생

이직을 밥 먹듯이 하는 친구 한 명이 또다시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왜 한 직장에 머무르지 못하고 옮기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친구의 말을 들어보니 원하는 업무 환경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월급 루팡’이 될 수 있는 곳. 다시 말해 불로소득에 가까운 혜택을 받을만한 곳. 로또 당첨과 같은 인생 역전을 꿈꾸기에는 너무 늦었으니 소박하고 소소하게 월급 루팡이나 되고 싶다는 것이 친구의 꿈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이를 소박하고 소소한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우습다. 이 꿈은 소박한 것이라기보다는 양심 불량자가 되겠다는 고백처럼 들린다.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를 보면서 사람이 모인 곳의 생리는 사회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나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새삼 씁쓸해진다. 같은 보상을 받으면서도 자신에게 부과된 일이나 의무를 정직하게 이행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늘 있다는 사실은 곧 일 안 하는 이의 몫까지 감당하느라 정신적, 육체적 피로를 배로 느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도 뜻한다. 어떤 집단이든 일복이 많은 사람은 소수이다. 일복이 많은 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남의 몫까지 부당하게 떠안게 된 사람을 두고 ‘능력자’라는 공치사로 추켜세우는 일은 불편할 뿐이다. 직장 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이런 문제들은 대학원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대학원생은 일반적으로 조교 일을 통해 학비를 충당하고 있다. 물론, 조교가 조교노동을 통해 받는 금액이 ‘임금’이 아니라 ‘장학금’의 명목으로 지급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다. ‘장학금’은 노동의 대가로 주는 돈을 뜻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교는 학내의 각종 업무를 감당하는 조교의 노동력에 지불해야 할 예산을 엉뚱하게 ‘장학금’ 예산으로 편성해 두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대학원생 조교도 자신이 받고 있는 금전적 보상에는 값할 만큼의 업무와 책임을 감당할 자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최소한의 떳떳함이 있어야 구조적인 부조리에 대해서도 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건 아닐까? 조교가 받는 금액이 학교 측이 시혜적으로 베푸는 ‘장학금’이 아니라 ‘임금’이라고 주장하려면, 최소한의 성실성을 갖고 그 일에 임하는 자세가 조교 당사자에게도 필요하다. 엇비슷한 금액의 장학금을 받더라도 일하는 학생들의 업무량은 천차만별이다. 장학금 액수의 차이가 없다면 조교 간의 업무량도 형평성 있게 주어져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서, 어느 연구실이든 일은 결코 형평성 있게 배당되지 않는다. 아니 형평성 있게 배당되더라도 문제는 결국에 일 하는 사람만 일 하게 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이처럼 형평성에 어긋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을 두고 계속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방치할 수만은 없다.

일이란 대개의 경우 남과 함께 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무책임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건 고역이다. 어떤 일만 주어지면 ‘나는 못하겠다’거나 ‘할 줄 모르겠다’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하는 무책임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태도나 모습이 겸양의 말이 아니라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준비 작업임은 모두가 안다. 컴퓨터 작업이든 특정한 행정 처리든 모르는 것은 죄가 아니다. 모르면 물어물어 배워서 하면 된다. 무지(無知)를 방패막이처럼 사용하는 것은 지성인답지 못한 행동이다. 나 하나 없더라도 결국 어리숙하거나 착해빠진, 책임감 있는 누군가가 일을 떠안고 해낼 것이라는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는 것일까. 실수를 했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으면 그만이다. 벌여진 사태를 가능한 데까지 수습하는 일이면 족하다. 비겁한 방식으로 동정심을 유발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려는 행동은 그만두었으면 싶다. 당신이 총체적 난국을 홀로 변명으로 빠져나간 사이, 모두가 함께 감당해야 할 그 어려운 상황을 수습하는 건 매번 똑같은 사람들이 된다. 왜 늘 착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그런 몫을 감당해야 할까.

앞서도 말했듯이 형평성에 어긋나는 이런 상황은 언제 어디에나 발생한다. 그래서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조교 업무가 공정하게 분배될 수 있는 시스템이 정착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누구는 가만히 앉아서 말 그대로 ‘장학금’ 받는 조교 자리를 얻고, 누구는 매주 꼬박꼬박 근무하고 일처리를 해야만 ‘장학금’ 받는 이런 시스템, 분명 개선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조적인 부조리를 타파하고 개선시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조교 스스로도 조교업무에 책임감 있게 임했으면 한다. 당신이 회피한 일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다. 결국 다른 동료 대학원생 조교가 하게 될 것이다. 그 동료 대학원생 조교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을 온 것이며, 마찬가지로 시간이 소중하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