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연구자의 바람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곽태진

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학문의 근본적 성격에 대한 고민이다. 기본적인 것은 학부 과정에서 배웠다고 전제하고, 세부전공에 따라 심화된 연구를 하는 것이 대학원생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자신이 전공하고 있는 학문 자체에 대한 숙고는 제쳐두게 된다. ‘실적’에 대한 압박이 일찌감치 다가와 있는데 ‘학문의 근본적 성격’을 굳이 숙고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그런 고민조차 할 기회가 거의 없는지도 모른다. 학문을 하고 있는 우리들 상당수에게 학문론은 정작 낯선 분야로 남는다.

만약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철학 전공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타당한 생각이다. 철학 전공자가 아닌데 학문론 혹은 과학철학 일반에 대해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분과학문에 대해서라면 문제는 조금 달라진다. 특정 학문의 대상과 연구방법 문제에 대한 고민은 철학 전공자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저 트리그가 사회과학철학을 두고 “모든 사회과학의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이라고 한 것은 학문 전반에도 확대할 수 있다. 즉 학문론은 학문의 필수불가결한 출발점인 것이다.

학문론에서 핵심이 되는 것은 학문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논의이다. 특히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는 학문의 출발점은 학문과 학문의 대상을 구분하는 것이다. 연구와 연구대상을 구분하는 것은 근대적 과학의 전제가 된다. 교육학을 예로 들자면, 교육에 대한 이론 체계로서의 교육학과 그 대상인 교육이 구분되는 것이다. 물론 관찰의 이론의존성 명제나 양자역학 등을 내세워 연구와 연구대상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현대철학이나 과학사회학을 공부했다면 대상을 규정하는 언어의 중요성이나 이론의 사회적 구성이라는 측면을 내세워서 연구대상이 연구자 및 연구공동체에 의존적이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겠다.

그런 주장들에는 분명 타당한 측면들이 있다. 하지만 연구와 연구대상을 구분하지 않는다면 합리적인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과학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발견들을 보면, 극단적인 주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적어도 연구대상이 연구자가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즉 최소한의 독립성은 확보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는 지금 모종의 실재론적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 입장 자체를 논증할 여유는 없다. 다만 연구대상과 연구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을 때, 나아가 연구자의 희망을 연구대상에 투사시킬 때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가령 일부 비판적 교육학에서, 학교교육의 재생산 측면을 강조하는 입장을 두고, 교육과 사회변혁의 ‘희망을 제공하지 못하는’ 관점이므로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을 살펴보자. 일부 비판적 교육학자들의 ‘진정성’과는 관계없이 이 주장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물론 학교교육이 재생산만을 하는 것이 아님을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며, 그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어떤 연구 결과가 희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적절한 방법에 의해 수행된 연구의 결과 연구대상의 성격이 특정하게 판단되었다면, 연구자의 주관적 바람을 근거로 해당 연구를 반박하는 것에는 다소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 사례는 연구대상에 연구자의 바람을 개입시킴으로써 연구대상과 연구를 구분하지 못하는 문제를 보여준다. 그 첫 번째 문제는 물론 학문적 엄밀함의 훼손이다. 위의 사례에서 희망이 전제가정이 되어버린다면 이후의 과학성에 의문을 품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필연적으로 비과학적 결과를 도출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문제는 연구의 실천적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게 될 가능성이다. 연구대상과 연구를 제대로 구분하지 않을 때 갖게 되기 쉬운 생각 중 하나는, 연구가 즉각적으로 연구대상에 변화를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 자체가 연구대상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연구 자체가 연구대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전혀 다른 사회에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대안적 삶과 사회를 고찰한 얼마나 많은 연구들이 있었던가. 물론 그 반대의 편향, 즉 이론 및 연구를 경시하는 경우도 가능하겠으나, 우리가 빠지기 쉬운 길은 전자일 것이다. 우리가 하는 연구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되기를 바라면 바랄수록, 그리고 세계, 특히 사회세계를 바람직한 것으로 바꾸고자 하기를 원하면 원할수록 더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가장 실천 지향적인 사조로 여겨지는 마르크스주의조차, 앙리 르페브르가 지적한 것처럼 그것 자체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의 변화에 기여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이 언급했듯이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연구와 연구대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는 문제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흔히 발생한다. 인문사회과학의 대상은 그 연구와 마찬가지로 인간 활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구분이 자연과학보다 엄밀하지 않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연구와 연구대상을 개념적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언어의 중요성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하는 포스트 담론의 영향력 속에 있는 우리 세대의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세계는 연구자의 바람대로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