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기들, 그리고 그 이후의 사회사: 주체, 反봉기, 제도변화

지난 11월 열린 한국사회사학회 정기학술대회의 주제는 〈봉기들, 그리고 그 이후의 사회사〉였다. 6월항쟁 30주년, 촛불 1주년을 맞아 개최된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한국 근현대사의 ‘봉기’들과 그에 대항하는 ‘반(反)봉기’,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역동이 낳은 제도적 변화를 다양한 관점에서 살핀 글들이 제출되었다. 이번 호 본지에서는 그 중 몇 가지 글들을 일별해 보았다.

6월항쟁에서의 정당과 사회운동조직 간 연대의 의의와 한계

최종숙은 ｢6월항쟁 주체로서 정당-사회운동조직의 역할 분담과 그것의 고착화｣에서 6월항쟁의 두 주체인 정당과 사회운동조직의 역할분담이 형성·고착되는 과정을 살폈다. ‘사회운동에 의한 민주화’라는 특성을 보이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6월항쟁은 지금의 민주주의를 규정하고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글에서 최종숙은 단순히 ‘국본’의 구성과정에 국한하지 않고 그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포괄함으로써 6월항쟁에 대한 두 조직의 기여도를 평가했다.

6월항쟁 이전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면, 우선 전두환 정권이 사회 전반에 걸쳐 형성한 지배체제, 특히 패권정당체제를 보인 11대, 12대 국회에서 야당은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웠다. 반면 시민사회의 민주화운동은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이전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새로운 조직화 움직임은 1983년 말 이른바 ‘유화조치’의 정세를 거치며 각 조직들의 복원과 조직 간 연대 논의로 이어졌다. 몇 번의 통합을 거쳐 1985년 3월 탄생한 민주민중통일엽합(이하 ‘민통련’)은 명실상부한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었다.

주지하듯 6월항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1987년 4월 취해진 ‘호헌조치’였다. 시국선언, 단식 등이 주를 이룬 초기 형태를 벗어나 자발적 대중저항을 하나로 묶을 전국적 지도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에 출범한 조직이 ‘호헌철폐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이다.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반군부독재전선”이라 평가되기도 하는 국본의 독특성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즉 크게 볼 때 통일민주당(이하 ‘민주당’)과 민통련의 연대조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두 조직이 서로의 필요성을 충족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선 ‘양 김金’의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전국 수준의 집회와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신생 민주당은 이미 지역조직을 갖춘 전국조직이었던 국본의 동원력이 필요했다. 한편 사회운동세력의 경우, 대중의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야당의 상징성이 필요했다. 이전까지 보다 급진적인 변혁을 지향하던 사회운동세력은 1986년 5·3 인천민중대회를 통해 대중들의 외면에 대한 반성을 거쳤고, 야당의 ‘직선제 개헌’ 입장을 받아들였다.

항쟁의 전개과정에서 민주당은 주로 국본과 항쟁참여자를 대표해 정부, 여당과의 협상을, 사회운동세력은 전국조직망을 통한 국민대회 개최 등 조직의 역할을 맡았다. 야당의 ‘개헌프레임’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동원을 이끌어냈고, 사회운동세력은 집회의 기획과 실무를 담당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듯 6월항쟁은 ‘호헌철폐’, ‘직선제 쟁취’를 이루어내며 ‘절반의 성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사실상 야당에게 정치적 역할을 위임한 사회운동세력의 결정은 ‘절반의 실패’로 이어졌다. 실제로 개헌협상국면의 ‘8인정치회담’의 4인을 민정당이 차지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협상에서 주로 다루어진 내용은 헌법을 제3공화국 시절로 되돌리는 수준이었을 뿐 인권, 고문, 집시법, 언기법, 해고자 복직 등의 문제 등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점을 지적해야 할 사회운동세력은 모든 요구를 민주정부로 이월한 채 선거 국면으로 넘어가 있었고, 그나마 소수의 비판적 목소리들도 대선 국면으로 수렴되고 말았다. 또한 사회운동세력이 어떤 절차보다 전두환과 노태우 개인의 결단에 의해 이루어진 6·29선언에 만족함으로써 노태우는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자’로 변신할 수 있었고, 대선에서도 안정적인 지지율을 확보했다. 이에 더해 양김의 분열 역시 사회운동세력이 그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양상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13대 대선에서의 패배가 6월항쟁의 한계라면, 야당의 대정부 협상권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전체의 입장에 반할 때 적절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한 사회운동세력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 최종숙의 결론이다.

혁명과 反혁명의 공간 전략

김백영은 ｢1960년대 서울, 혁명과 反혁명의 공간정치-열정의 과잉표출과 질서의 과잉현시 사이에서｣를 통해 4·19혁명의 광장정치를 봉쇄하고 좌절시킨 박정희 정권의 도시공간 지배전략을 분석했다. 해방 이후 광장정치가 등장한 최초 사례인 4·19혁명에서 6·3까지 수년간 이어지던 ‘데모의 광풍’은 60년대 중반 이후 급속하게 잦아든다. 그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강압적인 힘에서 찾을 수 있겠지만, 거기에 내포된 공간 전략과 그 효과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김백영의 문제의식이다.

일제가 왕조 수도 한양을 식민지 행정수도 경성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도시구조, 즉 소통형 광장을 축소하고 광장의 과시성을 강조하는 구조는 이승만 정권에서도 그대로 전용되었다. 이 과시형 광장에는 경무대·중앙청·행정부·국회·시청·법원 등이 집적되어 있었고, 주요 고등학교와 대학교 역시 모두 도심부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전쟁 직후 이와 같이 주요 정치·행정 시설이 밀집된 공간에 피난민들이 유입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이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도심부 공간의 난맥상은 4월혁명의 국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첫째, 당시 희생된 186명의 사망자 중 94명이 하층 노동자 또는 무직자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최전선에 선 도시빈민들과 이들의 희생이 시위를 급진화시켰다. 둘째, 시위대의 규모와 시위의 정치적 효과를 증폭시킨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상호 소통하고 이동하는 데 용이하게 작용했다. 셋째, 공격 대상의 일원화로 인해 시위 군중의 공간적 집결이 초래되었다. 즉 정치·행정의 중심공간이 한 데 밀집되어 있었던 당시 서울의 공간구조는 4월혁명을 가능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서울의 공간구조를 급격히, 그리고 전면적으로 변화시킨다. 특히 김현옥 등 서울 시장들의 주도로 진행된 도시건설사업의 함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서울의 시가지를 대폭 확장해 초대형 도시로 개발하는 계획이 현실화되었다. 둘째, 시가지의 확장을 바탕으로 기능적·공간적으로 집중되어 있던 국가기능이 분산되었다. 강북(행정)-영등포(공업)-영동(금융)으로 도심 기능을 분할하는 ‘삼핵도시’ 개발안, 입법부의 여의도 이전과 사법부의 서초동 이전, 명문 고교들의 강남 이전 등이 이때 이루어진 사업들이다. 셋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기표를 결합시킨 상징경관이 곳곳에 조성됨으로써 독재권력이 과잉현시된 공간이 창출된다. 넷째, 빈민과 부랑자들을 도시 외곽으로 몰아냄으로써 도심부에는 위로부터의 질서가 안착되었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은 ‘폐허의 무질서’를 ‘재건의 질서’로, ‘일극집중형’을 ‘다극분산형’으로, 그리고 ‘열정이 과잉표출된 공간’을 ‘질서가 과잉현시되는 공간’으로 전환함으로써 대중의 광장정치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는 것이 김백영의 결론이다. 김백영은 글의 말미에서 집권 직후 ‘국풍 81’을 여의도 5·16광장에서 개최한 신군부가 이전 정권의 공간 지배 전략을 계승·변용하는 양상에 대한 분석을 차후의 과제로 남겼다.

지역일반노조운동의 역사-신자유주의 시대 새로운 노조 형태의 모색

장진범은 ｢봉기 이후 노동조합의 변화-지역일반노조를 중심으로｣에서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지역일반노조운동의 역사를 일별했다. 장진범에 따르면 1987년 노동자대투쟁이라는 ‘봉기’를 통해 ‘정규직 노동’이라는 규범이 탄생했지만, 이후 IMF 구제금융 및 신자유주의화의 국면에서 이루어진 자본의 ‘대항봉기’에 의해 비정규직과 노동유연화가 전면화된다. ‘지역일반노조운동’은 이러한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민주노조운동 밖에서 모색된 대안적 조직론의 하나였다.

지역일반노조운동의 효시로 인정받는 것은 2000년 4월 창립된 부산지역일반노조이다. 이들은 추진위 단계에서 1995년 출범한 민주노총이 제시한 ‘산별노조 건설’ 전망을 비판한다. 이에 따르면 산별노조 건설 추진은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임에도 불구하고 ⓵ 불안정노동자들의 조직화가 부차화될 수 있다는 점 ⓶ 해당 업종 중심의 “부문주의적 경향”을 띤다는 점 ⓷ 신자유주의, 특히 초국적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에서 전통적인 산업 단위의 독자성이 크게 약화되었다는 점 등에서 현실에 적절히 대처하기 어렵다.

반면 일반노조운동이 내세운 것은 중소영세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민주노조운동의 대안적 주체 형성’이었다. 이는 기성 노조체제에 대한 대안의 성격을 띠기에 상당한 의식성과 노력을 요구하는 운동이며, 그렇기에 초창기 성원들은 이 운동이 더디게 발전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한창인 정세와 맞물려 일반노조운동은 처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와 속도로 성장했고, 그 성과는 같은 고민을 안고 있던 전국의 활동가들에게 큰 인상을 주어 전국 곳곳에서 일반노조 건설을 추동했다. 또한 다져진 지역조직을 기반으로 전국일반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이 운동의 목적인 바, 이러한 흐름은 2001년 전국일반노조 간담회, 2004년 전국일반노조대표자회의 결성 등 일반노조운동의 전국화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같은 성과 이면의 문제점도 곧 드러났다. 가장 큰 문제는 예상보다 많은 사업장들이, 그리고 현안을 안고 있는 절박한 노동자들이 조직되면서 집행부의 역량 대부분이 사업장별 교섭 투쟁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공동요구-집단교섭-동시타결’이라는 원래 기조를 현실화하지 못하고 처음 비판했던 “기업별노조 교섭 관행”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그리고 일상적 조직활동과 교육활동을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조직원의 수동화와 이탈을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 큰 문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략업종의 전국적 조직화 및 이를 위한 전국단일노조 조기 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2006년, 그러한 논의는 유보되고 지역을 중심에 놓되 민주노총 지역본부 및 산별지역지부 등을 일반노조운동으로 견인하는 방향을 채택한 전국지역·업종일반노조협의회(이하 ‘일반노협’)이 결성되었다.

일반노협은 2009년 무렵부터 진행된 ‘일반노조운동 10년 평가’에서 운동이 정체 상태라고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각 일반노조의 조직화 사례를 공유하고 전국적 특성조직화 등을 기획했다. 그러던 중 2010년에 이르러 서울일반노조와 경남일반노조 등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조직화에서 도약을 보임으로써 일종의 준거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2010년 교육감 선거와 지방선거를 통해 정치 지형에 변화가 일어나는데, 두 노조는 이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주목을 받았다. 서울일반노조와 경남일반노조는 각각 ‘학교비정규직’과 ‘지자체 무기계약직’ 문제를 공론화하며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고, 이후 지방자치단체와의 간담회와 공청회 등을 통해 2,000명 이상의 조직화에 성공했다.

2014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친 일반노협은 객관적·주관적 조건이 변화했다는 판단 아래 전국단일노조 건설 논의를 재개했다. 이에 같은 해 민주연합노조와의 공동투쟁 및 조직통합 논의가 시작되었고, 두 조직은 2017년 3월 통합대의원대회를 통해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연맹으로 통합되었다. 장진범은 결론에서 지역일반노조운동의 역사는 기업별노조주의 극복과 불안정노동자 조직화를 위한 실험과 모색의 역사였으며, 이후 민주노조운동과 지역일반노조운동 사이에 벌어질 논쟁과 상호침투에 귀추가 주목됨을 강조하며 글을 마쳤다.

<대한민력>에 함의된 대항적 시간질서

김미화는 ｢3·1운동과 대항적 시간질서｣에서 3·1운동 이후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대한민력󰡕이 발행·배포된 맥락과 그 효과에 대해 살폈다. 동유럽과 이슬람의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전 세계는 현재 그레고리우스력과 표준시라는 동질적인 시간을 공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휴일, 기념일 등 고유한 달력 시간을 통해 다른 민족과 차별화된 정체성을 형성하고 내부적 연대를 강화하기도 한다. 즉, 근대의 달력시간은 ‘국민국가화’와 ‘세계표준화’라는 두 개의 큰 흐름에서 비롯된다.

근대 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기존의 ‘미신적’인 달력을 폐지하고 ‘달력시간의 국민국가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간질서의 보급은 여전히 국가가 그 간행과 유통을 독점하는 전근대적인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달력 반포의 상징성이 컸던 동아시아 사회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총독부 역시 식민지기 전반에 걸쳐 조선의 역서 간행을 독점해 󰡔조선민력󰡕을 발행했다. 역서 간행은 총독부가 합법적 통치자의 권위를 물려받음과 동시에 새로운 시간질서를 조선에 확립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인 달력들이 곧잘 유통되었다. 이러한 ‘비공식력’ 중에서도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대한민력󰡕이다. 󰡔대한민력󰡕이 다른 비공식력과 다른 점은 다른 국민/민국 공동체와 집합정체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권을 확립하고자 하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달력이라는 점이다.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력󰡕 편집·간행을 임시정부 학무부에서 담당했다는 점, 매년 수만 부라는 적지 않은 양을 인쇄해 배포했다는 점이다. 한정된 물력과 인력을 고려해 󰡔조선민력󰡕을 저본으로 삼아 기념일과 입절시각 등을 조선 고유의 것으로 수정해 재인쇄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기념일로는 3·1절과 ‘국치일’, 당시 민족 통합의 상징으로 부각된 단군을 기리는 ‘개천절’과 ‘어천절’, ‘한글날’ 등이 눈에 띤다. 해당 달력은 당연히 특별 단속 대상이었고, 달력에 표기된 기념일은 ｢고등경찰관계주의일표｣를 통해 일본 경찰의 ‘주의일’이 되었다.

미주지역에서 발행된 󰡔공립신문󰡕과 󰡔신한민보󰡕의 기년법의 변화를 살펴볼 때, 해외에서 주로 유통된 󰡔대한민력󰡕의 시간질서는 실제로 한인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적어도 미국·하와이의 한인사회가 임시정부를 ‘정부’로 간주하고 지지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것이 김미화의 결론이다.

■ 문장원 기자 creep0927@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