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공기, 2017년의 음악

-포크라노스 컴필레이션 Vol. 1 ‘Emerging’

서정민갑(대중음악의견가)

한국대중음악사에는 오래 남을 컴필레이션 음반들이 있다. 컴필레이션 음반. 그러니까 전부 한 뮤지션의 곡으로만 채워진 음반이 아니라 여러 뮤지션들의 곡으로 채워진 음반 말이다. 음반에 참여한 뮤지션의 이름을 다 쓸 수 없어 Various Artists라고 표기하는 음반들이 바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컴필레이션 음반은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자신들만의 지향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거나, 특정 장르와 이슈를 한 음반 안에 담기 위해 만드는 경우가 보통이다.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컴필레이션 음반을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가장 자주 거명하는 음반은 바로 [우리노래전시회] 음반이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총 4장으로 이어진 [우리노래전시회] 음반은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거대한 분출을 예고하고 기록한 걸작이다. 아직 컴필레이션 음반이라는 말보다 옴니버스 음반이라는 말이 더 익숙했을 때 출반된 첫 번째 [우리노래전시회] 음반에는 이광조의 <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 전인권의 <그것만이 내 세상>, 시인과 촌장의 <비둘기에게>, 어떤날의 <너무 아쉬워 하지마>, 강인원의 <매일 그대와>, 최성원의 <제발> 등의 노래가 실렸다. 뮤지션과 수록곡의 면면만으로도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이들이 그 후부터 지금까지 어떤 음악을 해냈는지 이미 잘 알고 있다. 동아기획과 하나음악으로 이어진 음악세계가 바로 한 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에서 비롯되었다.

그 후로도 컴필레이션 음반은 간간히 이어졌다. 하나뮤직이 계속 내놓은 여러 컴필레이션 음반들과 1990년대 헤비메탈 밴드들이 참여했던 [Friday Afternoon] 음반이 대표적이다. 민중가요 진영의 [노동가요 공식음반]도 빼놓을 수 없다. 인디 신의 초기에 <춘천가는 기차>를 리메이크 해서 화제가 되었던 [Indie Power 2001] 컴필레이션도 의미 있는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2010년대부터는 컴필레이션 음반들이 좀 더 늘어나는 추세이다.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장르의 분화, 레이블의 증가 때문이다. 대충 훑어보아도 라이브 클럽 빵에서 만든 컴필레이션 음반, 블루스 뮤지션들이 내놓은 [블루스, 더 Blues], 여성뮤지션들이 만든 [이야기해주세요] 음반, [제비다방 컴필레이션] 음반, 세월호 추모 컴필레이션 음반, [강의 노래], 젠트리피케이션 음반, 신중현 트리뷰트 음반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들이 금세 떠오른다.

요즘 만들어지는 컴필레이션 음반은 대개 인디 신에서 나온다. 컴필레이션 음반은 여러 뮤지션들의 음악을 한꺼번에 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인들의 스타일을 훑어보기에도 효과적이다. 2010년대 전후로 만들어진 인디 신의 컴필레이션 음반은 인디 신의 다양한 경향과 분화를 증거할 뿐만 아니라, 뮤지션들의 관심과 지향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컴필레이션 음반에 수록된 음악들의 고른 완성도는 한국대중음악의 수준과 현재를 증거하는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주류의 음악, 인기 있는 음악만 완성도 높지 않고, 일렉트로닉과 팝과 힙합 음악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디 신의 컴필레이션 음반들은 충분히 보여준다.

최근 발매된 일렉트릭 뮤즈 레이블의 10주년 기념 컴필레이션 음반도 완성도와 의미를 고르게 갖추고 있다. 이호석, 강아솔, 김목인, 이아립, 드린지오, 빅베이비드라이버, 세이수미, 빅베이비드라이버트리오, 빌리카터, 빛과소음, 시크릿아시안맨, 글리터링블랙니스, 폴이 참여한 컴필레이션 음반은 한 레이블의 역사와 존재의미를 담아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 음반만이 인디의 전부라고 할 수 없으나 이 레이블과 이 뮤지션들을 빼고는 인디 신을 이야기 할 수 없을만큼 지금의 인디 신에서 꾸준히 활동해온 뮤지션과 레이블의 활동이 두 장의 컴필레이션 음반에 빼곡하게 담겼다. 포크와 로큰롤, 사이키델릭, 포스트록 등의 장르를 여전히 살아있게 하는 뮤지션들이 새롭게 만든 곡을 담은 음반은 단지 곡 모음이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의 현황을 음악으로 담아둔 보고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지난 9월 21일 좋은 컴필레이션 한 장이 더해졌다. 포크라노스에서 배급하는 [포크라노스 컴필레이션 Vol. 1 ‘Emerging’] 음반이다. 포크라노스는 음반사나 레이블이 아니다. 레이블인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가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디지털 음악 유통사이다. 주로 인디 신의 음반과 음원을 소개하고 유통하는 포크라노스가 처음으로 컴필레이션 음반을 내놓은 것이다. 음반에 수록된 곡은 총 12곡. 이 중에서 이번 컴필레이션 음반을 만들기 위해 새로 만든 곡은 없다. 모두 이미 발표한 적이 있는 곡이다. 그럼에도 이 음반은 충분히 좋은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이 현재 인디 신에서 가장 새롭게 주목받는 뮤지션들의 곡이자 좋은 곡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음악을 듣는 이들마다 주목하는 인디 뮤지션이 다르다. 인디 신의 역사가 20여년에 이르는 동안 인디 신에서 수많은 뮤지션들이 명멸했다. 어떤 이들은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으로 인디 신을 기억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스웨터와 슬로우 쥰, 전자양으로 인디 신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지금 인디 신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이나 혁오, 요조 같은 뮤지션들이 널리 알려진 편이다. 그렇지만 몇 명의 스타가 신의 전부는 아니다. 스타는 신을 친숙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신을 새롭게 만들지는 못한다. 신은 두터운 지층에 쌓이고 쌓인 흙과 바위와 풀과 나무로 이루어진 숲처럼 울창하다. 꽃이 피지 않을 때 숲이 멈춰있지 않고, 그 숲에 오가는 사람이 적다고 스스로를 유폐하지 않듯 신은 항상 부지런히 움직인다. 항상 누군가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놓는다. 더 이상 다른 음악이 나오지 않을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몰랐던 이들이 다른 음악을 만들고 있다. [포크라노스 컴필레이션 Vol. 1 ‘Emerging’] 음반에 수록된 뮤지션들은 그 가운데 낭중지추처럼 가장 도드라지는 뮤지션들이다. 지금 인디 신에서 새소년, 신해경,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 이랑, 데카당, 신세하, 예서, 위아더나잇, 사비나앤드론즈, 파라솔, 김사월X김해원, 오존만큼 떠오르는 뮤지션이 있을까. 지금 인디 신에서 가장 힙하다고 할 수 있을 이름들이다. 음반의 타이틀 [Emerging]처럼 최근 주목받고 있는 인디 뮤지션들이 죄다 모였다. 어쩌면 이 중에서 제 2의 장기하, 제 2의 혁오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훗날 누구나 알게 될 뮤지션을 미리 발견하기 위해서 이 음반을 들을 필요는 없다. 이제 취향과 안목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이 되면서 특정 공간, 식당, 책, 음악, 영화 등을 다른 이들보다 먼저 발견하고 소비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많은 이들을 괴롭히고 있다. 혼자서 조용히 알고 있으면 안되고, 반드시 소셜미디어에 올려야 할 것만 같다. 자기가 알고 있거나 발견했다는 사실을 인증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스스로 좋아서 하는 행위를 항상 과시하고 노출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은 얼마나 피곤한 일이고, 주객이 전도된 일인가. 물론 좋은 음악은 같이 들으면 더 좋지만 어차피 음악은 대부분 혼자 듣는다. 음악은 스스로 감응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듣는 것이지 스스로를 돋보이려고 듣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음악이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시대도 아니다. 이 음반에 실린 뮤지션들 가운데 누군가는 떠서 유명해질지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이들 가운데 누군가는 계속 활동하고 더 유명해질 수도 있으며 더 좋은 곡을 발표하게 될 수도 있지만, 다른 누군가는 곧 활동을 중단하고 잊혀질지 모른다. 그러니 그저 음악에만 집중하자.

3인조로 구성된 밴드 새소년의 곡 <긴 꿈>에서부터 수록곡들은 훌륭하다. 훌륭하다는 말이 전혀 어색하거나 과장스럽지 않을 만큼 수록곡들은 생생한 에너지와 참신한 어법을 함께 갖추고 있다. <긴 꿈>에서 보컬을 맡은 황소윤의 허스키한 보컬과 몽롱한 사운드는 매혹적이다. 올해 주목받고 있는 신해경의 <모두 주세요>는 몽환적인 보컬과 아름다운 멜로디가 잘 연결된 기타 팝 음악이다. 포스트록의 자장 안에 있는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의 <#>은 투명한 해맑음으로 고요한 격정을 펼쳐놓고 조용히 사라진다. 한국대중음악상을 받기 전부터 독특한 어법과 솔직한 노랫말로 주목받은 이랑의 노래는 노래가 이야기의 음악적 표현이고, 동시대의 반영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킨다. 록과 흑인음악의 장점을 연결해낸 데카당의 음악은 인디 신에서 벌어지는 자유분방한 시도를 대표할만큼 인상적이다. 트렌디한 신스팝과 알앤비를 체화한 신세하의 음악은 인디 신의 폭넓은 영토와 대안적 역량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렉트로닉 뮤지션 예서의 <Rude>는 친숙한 멜로디와 복고적인 질감을 결합시켰고, 일렉트로닉 밴드인 위아더나잇은 팝으로 완성도 높은 <그대야 안녕>을 들려준다. 침잠하며 위로하는 사비나앤드론즈의 노래 <Don’t Break Your Heart>에 이어 파라솔과 실리카겔이 함께 만든 <Space Angel>은 늘어지는 보컬을 앞세우고 사이키델릭한 사운드를 가미해 특별한 공간으로 인도한다. 인디 신에서 특히 주목받는 김사월X김해원의 <허니 베이비>는 여전히 농염하고 눅진하다. 오존의 곡 <untitled01>은 몽환적이며 도시적인 리듬앤블루스 스타일의 팝으로 세련된 2017년의 음악이다.

이 음반을 들으면 어떤 공기가 느껴진다. 단지 인디 신의 공기가 아닌 당대의 공기다. 깔끔하고 세련된 사운드와 명료한 멜로디 안에 스며있는 흑인음악의 끈끈함이나 몽환적인 정서. 한 가지 장르의 방법론에 충실하지 않은 여러 장르의 어울림과 탈주. 곡과 곡을 넘나드는 나른함과 갑갑함 같은 것들. 음악은 노랫말로 말하고, 멜로디와 비트로 말하고, 사운드로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음반에서는 이 밖에 무엇이 더 보이는지. 이제 이 음반을 들으며 음악 언어로 말하는 것들을 모두 찾아보시길. 그리고 음악 밖으로 연결해 의미를 부여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