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돼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와 연결된 인간


한나 아렌트에 관한 두 권의 책이 발간됐다. 한 권은 한국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인 홍원표의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이고, 다른 한 권은 아렌트의 박사논문과 그에 관한 편자(조안나 스코트, 주디스 스타크) 및 역자(서유경)의 해설이 실린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아렌트의 여러 저작들의 저변에 흐르는 근간을 정치적 사유로 읽어내고자 한 것이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의 시도라 한다면, 아렌트의 학적 독립과 사유의 기원에 관한 단서를 우리에게 제공한 것이 서유경 역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성과라 하겠다.

아렌트는 1929년에 박사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제출했고, 이후 그것을 수정했다. 조안나 스코트와 주디스 스타크는 아렌트 박사논문의 영역본과 수기본 뭉치를 들고 작업에 착수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세상에 내놓았다. 따라서 이번에 국내에 번역 소개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일차적으로 1950~60년대의 아렌트의 사유의 기록이다. 그러나 아렌트의 수정 작업은 완결되지 않았고, 스코트에 따르면 박사논문에서의 논문의 주제나 결론에 대한 신념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논문의 주축인 서론과 3부는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렌트 사유의 기원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 결코 무리한 진술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권의 저작은 모두 아렌트의 시작을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어떻게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등의 정치철학자로서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 그 한나 아렌트가 되었나? 여기서는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중점적으로 살핀 후,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받은 학적 영감들이 그녀에게서 훗날 또렷하게 개념화된 내용들을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의 논문에 주목해 소개하겠다.


대담한 현세적 독법

한나 아렌트는 1906년 10월에 하노버 근교에서 독일의 유대인으로서 태어났다. 유대인이었으나, 유대인의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세운다는 실정적 의미에서의 시온주의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히틀러가 부상한 이후 그녀는 유대인 조직에 참여하기 시작했지만, 그때에도 그녀가 시온주의자였던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그녀가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이후, 아렌트는 프랑스로 망명해서 반나치 운동을 했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고 한 해가 지난 1941년, 아렌트는 미국으로 망명해 1951년까지 무국적자로 지냈다. 뉴욕에서 그녀는 여러 잡지에 글을 기고했으며, 유대인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유대문화재건기구의 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정치철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고 1951년에 그녀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표했다. 파시즘과 스탈린식 사회주의 체제는 모두 광기와 공포의 반정치이며, 자유의 말살을 일삼는 전체주의라는 것을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밝히려 했다. 히틀러의 부상과 반나치 운동, 그리고 무국적자로서의 오랜 시간을 거치기 이전인 1929년에 아렌트는 논문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적 세계에 관한 정치 일변도적 접근으로 잘 알려진 아렌트가 학자로서 중요한 첫 걸음을 떼던 바로 그 시기에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탐구했다는 것은 곱씹어볼 만한 부분이다. “철학은 나의 첫사랑이었다”는 그녀의 고백처럼,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철학자와 정치이론가 사이 어딘가에 서 있는 아렌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24세의 한나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대담한 현세적 독법을 감행했다. 초기 기독교 교부이자 5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를 그녀는 한 사람의 사회이론가로 읽고자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 교부로서 도덕적 선택과 이웃사랑을 주장했으며 구원의 메시지가 세계와 별개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렌트는 바로 이 점에 주목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를 어두운 시대에 맞서 반항의 언어를 구사한 한 사람의 사회이론가로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라. 그러나 네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주의하라

사랑을 갈망으로 정의하고 인간의 현세에서의 처신 태도를 미래에서 도출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렌트는 주목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애와 탐욕을 구분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고, “사랑하라. 그러나 네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조심하라”에 아렌트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보기에 자애와 탐욕은 모두 갈망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올바른 사랑인 자애와 그릇된 사랑인 탐욕이 있다는 것을 그는 말한다. 탐욕은 필멸할 것에 대한 집착이고, 자애는 영원과 절대미래를 향한 추구이다. 탐욕은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잃어버릴 수 있는 것에 대한 갈망이다. 탐욕은 악의 근원이고 자애는 선의 근원이다.

자애와 탐욕의 구분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들이 행복 및 자유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된 삶은 그에게 영구적이고 행복한 삶을 뜻한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자는 삶을 두려워한다. 그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며, 바로 이것이 갈망으로서의 사랑을 규정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탐욕과 자유를 연결시키는 것에 반대한다.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을 수 없는데, 자유는 본질적으로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애는 그 두려움을 내어던지게 하므로 자유와 긍정적으로 이어진다. 자애는 나의 내부에 존재하는 것, 더 이상 소멸될 필요가 없는 순전한 실재에 대한 사랑이다. 내적 영원, 어떤 시공간에도 담길 수 없는 영원한 실재가 내부에서 스스로 현시한 것이다.

자애는 존재하려는 경향을 완성하는 반면에, 탐욕은 무(無)로 다가간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탐욕이 아니라 자애를 추구하기 위해서 사람은 자기를 버려야 한다. 자신은 창조주의 피조물임을 받아들이고, 다시 창조주에게로 돌아가 도움을 간청하는 것, 즉 자기부정은 오직 자애 안에서만 성취된다. 이제 피조물은 창조주와 화해한 자인 동시에 그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사실과도 화해한 자로서 재창조된 자다. 피조물인 인간이 자신을 포기한다. 바로 여기서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이웃을 만날 수 있는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사랑의 완수는 신의 은총에 달려 있고,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은 신에 대한 사랑에 달려 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신이 하는 대로 사랑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완전하게 사랑함으로써, 오히려 사랑하는 자에게 세계가 하나의 사막이 되도록 만든다. 신의 현전은 인간의 절대적 고립을 발생시킨다.

아렌트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웃의 적실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로부터 인류의 기원에 관한 대답이 이중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첫째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인간의 실존에 관해 심문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신이 각 개인들 모두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개인 개념이 발견된다. 둘째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 족속의 기원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우리 모두의 공통된 조상이 있으며 인류는 공통적으로 원죄를 공유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기원은 모순적이지만, 이웃사랑이라는 교의는 두 질문이 결합되어 있다는 통찰을 제공한다. 신의 현전 속에서의 개인의 고립은 타자의 입지를 단단하게 하고, 동시에 인간 족속의 일원으로서의 타자는 우리의 이웃이 된다. 인간은 고립돼 있으면서 동시에 모두와 연결돼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의에서 사람의 실존에 관한 이중적 원천을 발견해 내는 아렌트의 모습은 정치적 실존주의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그녀의 이론적 연원을 유추할 수 있도록 한다.


탄생, 시작할 수 있는 자의 시작

홍원표의 『한나 아렌트 정치철학』은 아렌트에 관한 그의 11편의 논문집이다. 이 중 2장에서 그는 아렌트의 개념적 사유, 특히 ‘탄생성’에 대해 다룬다. 아렌트에게 ‘새로운 시작’은 만년에 이르러 완전한 의미를 드러내는 개념이지만, 학자로서의 그녀는 처음부터 이 개념에 천착했다. ‘새로운 시작’은 아렌트의 사유에서 ‘개시, 참신, 출생, 탄생, 절대적 시작, 상대적 시작’ 등으로 변주되며 등장한다. 홍원표는 아렌트의 ‘새로운 시작’ 개념의 분화과정을 살핀다. 아렌트의 ‘새로운 시작’은 종교적·세속적·개인적·사회적·정치적 의미로 분화되는데, 그 분화과정의 앞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관한 연구가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창조되었기에 하나의 시발점이 수립되었다”고 말했다. 아렌트는 여기서 새로운 시작의 존재론적 차원과 실존적 차원을 파악한다. 탄생함으로써 인간은 시작되었고 또 시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탄생에서 시작능력의 근원과 현존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아렌트는 또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이해를 종교적 맥락에서 세속적 맥락으로 전환한다. ‘창조’라는 신학적 개념은 『인간의 조건』에서 ‘탄생’이라는 용어로 바뀐다. 노동·작업·행위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인 탄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행위는 아렌트가 보기에 정치활동인데, 여기서의 노동이 단순히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활동이고, 작업이 인위적 세계를 구성하는 활동이라면, 행위는 인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으로서 다원성이란 인간조건에 조응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렌트의 행위는 다원성과 자유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정치활동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홍원표가 아렌트를 연구하는 방식은 이처럼 그녀의 중요한 개념적 사유가 어떻게 정치적 사유와 연결돼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꾸준한 정치적 사유, 과거의 사상가들에 대한 대담한 현세적 독법, 실존에 대한 천착 등을 통해 그녀는 우리에게 알려진 바로 그 한나 아렌트가 되었을 것이다.

■ 박성태 기자. clsrnofu@korea.ac.kr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5 14:2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