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 사회 침묵 깨운 ‘신호탄’

4월 22일 30명 첫 시국선언 … 6·29선언까지 80여개 단체 6000여명 동참

최근덕 (74) 성균관 관장

‘유림은 정치에 간여하지 않고 초연해야 한다’는 온건파와 ‘옛날 선비들이 상소문을 올릴 때처럼 연좌해야 한다’는 강경파 사이의 의견을 조정하다 시국선언 막바지에 의사 표시를 하게 됐다.

손진책(60) 극단 미추 대표

연극이 자주 체제나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표현돼 왔듯 대부분 연극인이 개헌과 민주화에는 공감할 것이 틀림없다.

다만 당시만 해도 불이익을 전제로 한 것이라 참여인원을 가능한 줄이려 했다.

명진 (57) 스님

불자들과 시국선언에 동참함으로써 정권과 야합하는 게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중생과 더불어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봉사하는, 진정한 부다의 자비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호국불교임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한영철(55) 치과의사

당시 많은 선배 동료들과 함께 ‘우리가 중산층으로 너무 영리와 안락한 생활에만 빠져왔다’는 반성에서 시국선언을 통한 현실 참여를 이뤘다. 의료 기능인이 아닌 시대를 아파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이영진(51) 시인

당시 시국 상황이 워낙 촉박해서 연락이 되는 문인들만 모았는데 뒤에 ‘왜 나를 빼놓았느냐’는 항의를 하며 추가 서명을 한 문인이 많았다. 6·29 선언까지 모두 280여명의 문인이 시국선언에 나섰다.

“무섭기도 했지만 시국선언문을 벽보에 붙이니 교수와 학생 모두 축제 분위기가 됐어. 두려움으로부터의 해방, 자유가 곧 인간을 평온하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했지. 벽보가 붙던 날 모두 고대 본관 앞에 모여 ‘아침이슬’을 불렀던 감격이 생생해.”

6월 항쟁의 한 가운데엔 지식인 사회의 집단 행동이 있었다. 특히 고려대 교수들의 첫 시국선언은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발을 기층에서 전방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한 후 고대 이문영(80·사진) 명예교수 등 30명은 4월 22일 시국선언을 발표해 지식인 사회를 깨우는 기폭제를 쏘아 올렸다.

‘개헌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시국선언문은 ‘호헌 철폐’와 ‘민주화’로 집약됐다. 5개항으로 구성된 짧은 글이었지만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었고, 사회로 퍼진 울림은 매우 깊었다.

고대 교수들은 시국선언문에서 △민주적 개헌은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에 기초한 정부의 확립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절대적 요청이라고 역설했다.

시국선언문에서 제시된 5개항의 요구사항은 △정부의 개헌 노력 중단을 납득할 수 없다 △개헌 추진의 책임은 누구보다도 정부 운영을 맡은 사람들에게 있다 △개헌에 관한 국민의 논의를 봉쇄하려는 모든 시도는 중지되어야 한다 △이번에 민주적 개헌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앞으로의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의 취약함으로 인해 정부와 국민 모두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정부는 계속되어 온 강권과 절망의 궤도에서 벗어나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정치대도를 걸어가 주기 바란다 등이었다.

고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이후 지식인 사회의 침묵을 깨는 신호탄이 됐다. 6월 29일 직선제 선언까지 대학과 시민단체 등 80여개 단체 6000여명의 시국선언을 이끌어냈다.

6월 26일 치안당국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고려대 교수 시국선언으로부터 6월 25일까지 시국성명 발표자는 48개 대학의 교수 1510명, 목회자 변호사 문화예술인 의사 약사 한의사 초중고교 교사 등 34개 사회단체 회원 4136명이었다.

◆교내에서 첫 교정시위도 벌여 = 고대 교수들은 시국선언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이문영 교수 등 고대 교수 19명은 87년 6월 19일 고대 본관 앞에서 첫 교정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명의 교수들은 연좌시위를 벌이며 “오늘의 난국은 이제 더 이상 악화되어서는 안 될 마지막 고비에 접어들고 있으므로 정부·여당은 이미 확인된 민의에 지체 없이 순응, 민족적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부르짖었다.

연좌시위에 들어간 서명교수 19명을 둘러싸고 1000여명의 학생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합창했으며 교수와 학생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숙연했다.

교수들은 연좌시위에 앞서 이날 오전 최루탄을 맞아 사경에 놓여 있는 연세대생 이한열군의 부모를 방문해 고려대 교수들이 모금한 성금 137만원을 전달하며 위로했다. 다시 고대로 돌아오는 길에 ‘정부가 비상대책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한 교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둘 모여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의사표명을 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성명서 작성에 들어갔다.

시위교수 중 신문방송학과 김경근 교수가 붉은색 페인트가 든 분무기로 광목천 플래카드 2개에 ‘민의는 확인됐다’ ‘확인된 민의에 순응하라’고 썼고, 피켓 5개에 ‘학생들의 주장이 옳았다’ 등의 구호를 적어 시위에 들어가자 학생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문영 교수는 “근간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생·시민들의 시위는 그동안 각계 지성인들이 요구해 온 4·13 조치 철회 및 민주개헌 촉구를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정치 일정을 강행하고 있는 정부·여당의 비민주적 처사에 대한 저항이라고 본다”고 낭독했다.

3000여명으로 불어난 학생들은 중요한 대목마다 성명서를 복창하다 이 교수가 낭독을 마치자 갈채와 함께 ‘교수님 만세’를 삼창한 뒤 교내 시위에 들어갔다.

◆시국선언 교수들은 지식인의 대명사 = 당시 고려대는 지식인의 대명사인 대학교수들의 시국 인식에서 중요한 흐름의 진원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문영 교수는 고려대 시국선언 교수들의 지주처럼 비쳐지는 인물이었다.

국내 신문은 물론 외신들도 서명교수의 중심인물로 이 교수를 부각시켜 보도했다. 이 교수는 세 차례 반복된 7년여 동안의 해직과 복직, 또 세 번에 걸쳐 치러야 했던 4년 10개월간의 수감생활 등으로 ‘대표적인 반체제 지식인’으로 인식됐다.

이 교수는 “나는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라며 “하지만 겁보다 우선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성숙도에 비해 주어진 권리와 자유가 너무 왜소하다고 느껴질 때, 겁을 제치고 저항의 힘이 분출한다”며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 외압이 클 때 용기가 더 솟는 것 같다”고 밝혔다.

현재 자서전과 ‘새 문명에서의 공직자’라는 책을 저술중인 이 교수는 노자에 나오는 ‘공성이불거(功成而不居 ; 공을 이루면 머무르지 않는다)’를 좌우명으로 새기고 있다.

이 교수는 “민주화라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으니 현실 정치에서 떠나 있는 게 도리”라며 “언제든지 나라와 민족이 어려울 때는 행동으로 나서는 지식인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내일신문 2007/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