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파’의 맹점? - 최원,  <라캉 또는 알튀세르>

염동규

최원의 책 󰡔라캉 또는 알튀세르󰡕는 2016년 출간된 직후 마련된 북클럽에서 김정한이 말한 것처럼 ‘너무 늦게 도착한 책’이다. 좀 더 일찍 등장했더라면 한국의 이론 연구에 정말 폭발적인 기여를 했겠다 싶을 만큼, 이 책의 학술적 가치는 막대하다. 특히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그러하다. 첫째, 최원의 책은 슬라보예 지젝으로 대표되는 슬로베니아 학파가 라캉과 알튀세르에 덧씌우고 재생산해놓은 대단한 오해들을 성공리에 바로잡는다. 덕분에 우리는 이제 알튀세르를 새로 읽어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지게 되었음은 물론, 라캉에 대한 온갖 비일관적 잡설들을 거부할 만한 실질적 준거를 얻게 되었다. 둘째, ‘구조주의’라는 유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재구성한 이 책은 구조주의라는 지적 전통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킨다. 이 책을 거점 삼아, 우리는 구조주의가 정녕 무엇이고 어떻게 출현하였으며 어떻게 (데리다적 의미에서) ‘상속’ 되었는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분명한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라캉 또는 알튀세르󰡕에는 논평할 것보다 배워야 할 것이 훨씬 많지만 고평은 이쯤에서 그쳐두고, 이 책의 전반적인 입장이 가지고 있는 듯 보이는 맹점을 언급해보고 싶다. 그것은 바로 이 책이 요청하는 ‘실천’, 혹은 그러한 실천의 ‘위치’에 대한 것이다. 최원은 이렇게 말한다. “구조 외부의 ‘주체’라는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없다면, 이는 정확히 이런 행위의 원인이 구조 내부에서, 이데올로기의 내부에서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p. 334.) 이 책을 거의 일관적으로 관통한다고 할 수 있는 바로 이 논점이, 󰡔라캉 또는 알튀세르󰡕의 출간 직후의 북클럽에서 이성민과 김정한에게 공통적으로 의문시되었다. 책의 부제이기도 한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라는 과제는 해결되지 않은 모순일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반박에 대해 최원은 ‘이데올로기의 바깥은 없다’는 명제를 고수하면서 오히려 반문한다. ‘대체 이데올로기의 바깥이 무엇인가? 그것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물리적인 전쟁, 순수한 폭력밖에는 되지 않는”게 아닌가?’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 계급의 것이라는 맑스의 명제(또한 이것은 알튀세르가 별 유보 없이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명제이기도 하다)에 대한 발리바르의 반박―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피지배자의 이데올로기다―을 적실하게 계승하면서 최원이 내어놓는 이런 식의 대답(거칠게 말해 최원은 이데올로기의 ‘내파’를 주장하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은 한편으로는 매우 만족스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이유는 1)이런 식의 생각이 민주주의에 대한 기성적·통념적 생각과 정말로 거리를 갖는 것인지가 의문으로 남고(발리바르에게 의회주의라는 혐의가 제기되는 이유와도 관계될지 모른다), 2)‘내파’에 대해서만 행해지는 강조는 그러한 ‘내파’가 돌발하는 순간에 대한 무력한 기다림에 생각 외로 쉽게 흡수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다.

특히 두 번째 논점에 주목하는 이유는, 최원이 슬로베니아 학파를 주축으로 한 많은 논자들이 환기시키는 ‘이데올로기 바깥’이라는 문제틀(내 생각에 이것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표현적 인과론이다)의 ‘강력한 흡인력’(그것의 이론적 미진함은 차치하고서라도)을 다소 쉽게 기각하는 것 같다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가령 프레드릭 제임슨이 쓴 불세출의 명작 󰡔정치적 무의식󰡕은, 알튀세르의 구조적 인과론을 최원과 거의 일치된 방식으로 수용하면서도, 라이프니츠로부터 연원한 표현적 인과론이 지닌 국부적 쓸모를 설득력 있게 인정하는 관점을 내보이는데, 맑스주의 이론이 결국 실천과의 관련 속에서 파악될 수밖에 없는 한에서 이 정도의 균형 감각(?)이 요청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제임슨의 지적대로, 어떤 시대에건 개인이 역사에 대해 사고할 때마다 이미-개입되어 있는 ‘지배적인 서사’가 있게 마련인데 본디 지배적인 서사란 ‘구조적 인과론’의 모델이 아니라 ‘표현적 인과론’의 모델에 따라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오히려 “이를 원천 봉쇄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실제적 경험에서 역사라는 텍스트 및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실질적인 억압을 가져”오는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우리는 제임슨의 논의를 따라, 최원이 갈라놓기만 하는 표현적 인과론의 모델과 구조적 인과론의 모델이 이중구속적인 관계에 있다는 주장, 표현적 인과론 없는 구조적 인과론은 불가능하다는 그럴듯한 주장까지 펼쳐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최원의 논의 속에서 표현적 인과론의 모델이 기각되기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령 알튀세르의 ｢피콜로 극단｣을 참조하여 내보이는 관점(멜로드라마의 구제)이 그렇다.(p. 408.) 하지만 최원의 다른 몇몇 논의(여기서 나는 특히 최원이 2014년에 󰡔문화/과학󰡕에 발표한 ｢공산주의라는 쟁점｣을 염두에 두고 있다)를 참고해 봐도 그에게서 표현적 인과론과 구조적 인과론의 이중구속에 대한 문제의식은 없다시피 한 듯하다. 󰡔라캉 또는 알튀세르󰡕를 거점으로 삼으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더 많은 질문들을 제기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