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나라인가? 강제된 아나키즘, 그 변화의 ‘낮은’ 가능성을 위하여
: 데이비드 그레이버. 나현영 옮김,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 포도밭, 2016.

허 민(문화연구자)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정권의 국기문란에 대한 규탄이 확산되고 있다. 전국의 대학가를 비롯해 시민사회, 종교계는 ‘탄핵’과 ‘하야’를 거론하며, 정권 퇴진을 강하게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 서열의 수위(首位)에 오른 적이 없는 이 ‘가짜’ 대통령에 대한 ‘하야’ 요구는 적잖이 허망키도 하다. 가져본 적이 없는 권력을 내놓아야 하는 자에게는 퇴진조차 위선일 테니 말이다. 나아가 그러한 ‘텅 빈 요구(?!)’를 구호 삼아야 하는 시민들의 비참도 서로 마주해야 한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성토 역시, 자신들의 국가를 부정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한탄이 아니라, 외려 이미 부재했던 국가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에 가까울 것이다. 분노와 규탄의 대상조차 불명료한 아노미적 공간에서 국가를 상실한 자들의 저항은 어떻게 조직될 수 있는가. 그리하여 이번에는 이곳에서 강제된 아나키스트들을 위한 실천이론을 소개하려 한다. 정부가 없다고 상상된 사회에서의 삶과 정치의 가능성이 가장 긴급한 과제로 주어졌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은 아나키즘 사회의 인류학적 보고라 할 수 있다. 인류학적 사고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의 범위 자체를 첨예하게 인식하고 있는 한, 그것은 언제나 아나키즘과 친연성을 갖고 있다’(53쪽)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가능성이란, 국가와 정부가 없는 사회적 삶에 대한 상상을 의미한다. 그러한 기대 위에서 저자는 남아메리카 북부의 피아로아족 사회나, 나이지리아의 티브족, 마다가스카르의 아리보니마모 마을 등의 내재한 아나키적 속성을 탐구한다. 그들은 법에 굴복하거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반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며 그로부터 평등주의적 합의를 기초한다. 혹자는 이러한 아나키적 속성을 ‘원시성’이나 ‘부족성’이란 규정을 내세우며 폄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가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로부터 국가에 대한 대안적 사고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인 것이다. 아나키적 사례에 대한 ‘흔한’ 반박이기도 한 이런 주장들은 국민국가를 유일한 형태의 사회체제로 전제한 채 제기된다. 또한 근대와 전근대를 단절적으로 사유한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나키적 조직 형태가 국가를 닮을 필요는 없으며, 특정 사회체제를 진화론적으로 특권화하거나 무시할 수도 없다. 이처럼 저자는 국가를 인간이 처한 조건의 ‘불가피한 해결책’으로 사유하는 일련의 태도를 문제시한다. 국가가 아닌 조직형태에 대한 사회적 상상을 구체적 사례분석을 통해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정부, 법과 권위에 기대지 않는 평등적인 사회체제는 어떠한 실천 위에서 가능할까?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점진적 혁명’이라 칭할 수 있을 만한 실천 전략을 제시한다. 흔히 혁명이란 ‘페러다임의 전환’과 유사한 무엇을 함축한다. 이전까지의 범주와 체계가 더 나은 형태로 대체된다는 발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단절’을 강조하는대신, 나아가 ‘대혁명’이란 ‘지각변동적 균열’을 사고하는 대신, ‘혁명적 행동’의 작은 사례들을 의미화하는 것은 어떨까? “혁명적 행동이란 특정한 권력 혹은 지배형태를 거부하고 그에 맞서 사회관계를 재구성하는 모든 집단행동”(96쪽)을 일컫는다. 따라서 혁명적 행동의 목표가 반드시 정권 정복과 같은 거창한 것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국가에 포섭되지 않는 자립적인 공동체를 구성해보는 것도 좋다. 비록 소규모일지라도,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간의 연대와 소통의 체계를 수립해 보는 것이다. 혁명은 일시에 섬광처럼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천의 오랜 축적 위에서 ‘느리게’ 다가올테니 말이다.

박근혜 정권의 국기문란은 국가를 상실한 자들 간의 연대를 요청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은 쉽게 ‘하야’ 하지 않을 것이며 ‘탄핵’도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한국 헌정사상 유래가 없는 파문 앞에서, 모두가 국가 부재의 한국적 상례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이제 누구도 국가와 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겐 아나키즘적 사유가 강제된 것일 수도 있다. 국가와 정부에 기대지 않는 삶-정치의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 변화의 ‘낮은’ 가능성을 위해, 도처에 산재하는 “아니키스트 인류학의 조각들”을 수집해 보길 권하는 바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09:1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