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중국을 이해하는 열 개의 열쇠

위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문학동네, 2012.

한영인 문학평론가

  위화의 『형제』를 구입한 건 버스 터미널에 위치한 간이 서점에서였다. 중국 소설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그때는 위화가 누군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그냥 거기 있던 책 중에 가장 두꺼운 책을 집어들었을 뿐인데 아무래도 혼자 떠나는 여행이니만큼 빈 시간을 채워줄 무언가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버스에 앉아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한 후부터 안타깝게도 여행에 대한 다른 기억은 별로 남은 것이 없다. 이 책이 모든 기억들을 집어 삼켜버린 탓이다. 그만큼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강렬하고 신선했다. 나는 홀린 듯이 빠져 들었고 혼자 미친놈처럼 웃고 울었다.
  위화의 소설을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널리 알려진 『인생』과 『허삼관 매혈기』에서부터 『가랑비 속의 외침』과 『내게는 이름이 없다』등을 거쳐 『제 7일』에 이르기까지, 나는 번역된 그의 작품을 시간 나는 대로 구해 읽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한국 소설은 재미없다는 유구한 불평을 접할 때마다 위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새 위화는 내게 ‘소설의 재미’에 관한 한 어떤 규준 같은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한국 소설에서 이와 비슷한 ‘충격적 재미’를 맛 본 것은 천명관의 『고래』를 읽었을 때였다.)
  모든 훌륭한 소설가가 훌륭한 에세이스트는 아니겠지만 삶과 인간의 진실에 대해 깊이 파고드는 어떤 소설가는 필연적으로 매혹적인 에세이스트가 된다. 이때 소설가가 쓰는 에세이는 흔히 말하는 ‘잡문’이 아니라 소설과는 다른 방식으로 문학적 진실을 열어젖히는 대체 불가능한 단 하나의 작품이 된다.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이 책은 인민, 영수(領水),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등 열 개의 단어로 매개로 현대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그려내 보이고 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1930년대 독일 사회를 규정하면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압축근대화를 겪은 한국 사회의 중층적 복합성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동원되는 말인데  위화의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는 두 ‘극단의 시대’ -  문화대혁명으로 대표되는 ‘정치의 시대’와 개혁개방 이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자본의 시대’ -를 통과해 온 현대 중국이야말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의미를 거듭 깨닫게 만드는 문제적 현장임을 절감하게 된다. 이 책은 이러한 현대 중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소설가 특유의 생생한 직관을 다양한 에피소드와 핍진한 서술로 흥미진진하게 펼쳐놓는다.
  위화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맨 앞의 짧은 글에서 자신의 소설관에 대해 피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소설은 “‘5월 35일’식의 표현방식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천안문 사건이 일어난 6월 4일이 중국의 인터넷에서는 금지된 날짜이기 때문에 네티즌들은 정부 당국의 인터넷 검열을 피해 ‘5월 35일’이라는 가상의 날짜를 만들어 사용하는데 당국의 탄압과 검열에 맞선 이러한 다양한 표현의 개발이야말로 풍부한 암시와 비유, 풍자와 조소, 과장과 연상을 극대화하여 역설적으로 문학적 풍요로움의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중국 정부의 탄압을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탄압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탄압의 반작용으로 터져 나오는 다양한 문학적 실험에 대한 긍정이다. 그의 작품 속에 짙은 비애와 천진한 웃음이 절묘하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낙관의 힘인지도 모른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0 23:0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