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파국의 시간, 침묵할 수 없는 존재로부터의 사유


- 알랭 바디우, 서용순 옮김,『철학을 위한 선언』, 도서출판 길, 2010.

허 민 (문화연구자, 인문학협동조합)

소멸되는 가능성은 개념화될 수 있는가? 아니, 개념화 될 수 없는 현실을 형식화할 수 있는 사유는 어떻게 ‘다시’ 가능한가? 알랭 바디우의 저작 『철학을 위한 선언』(1989)은 ‘철학의 종말’이 선언되던 시기에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포스트-주의는 철학의 중심 개념인 '진리'와 '주체'를 부정함으로써 철학을 의심의 자리로 추방하고 있던 것이다. ‘하나의 진리’, ‘단일한 주체’에 대한 근대적 물신이 행한 폭력을 상기한다면, 의미 있는 시도들이었다. 하지만 바디우는 철학에 대한 이 ‘정당한’ 불신을 철학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요청한다. 우선 그는 ‘철학의 종말’이, 바로 그 종언의 형식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던 철학의 불가피함을 사유한다. 즉, “형이상학의 종말에 대한 확신이 그 확신의 형이상학적 요소 속에서 움직이는 것”임을 폭로하며, ‘주체 개념의 해체가 요구하는 중심 범주의 결정론적 역사규정’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p.46) 그러면서 단언한다. “철학이 오늘날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가능성이 종말에 의해 관통되는 형식을 갖지 않는다”(p.48)고 말이다.

바디우의 이 단언은 의미심장하다. 철학이 부정되는 자리에서 철학의 소멸하는 가능성을 붙잡겠다는 선언이기에 그러하며, 바로 그러한 가능성을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형식화하겠다는 것이기에 그러하다. 바디우는 의심의 개념(존재, 진리, 주체)들을 다시 개념화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선언을 증명한다. 그는 ‘존재’와 ‘진리’를 일자가 아닌 다수로 사유한다. “존재는 다수이기 때문에 그리고 진리는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진리는 다수일 것이고, 따라서 그 진리는 상황의 진리로서 상황의 다수적 부분”(p.155)이다. 진리는 단독적인 지점, ‘사건의 자리’에서만 개시된다. 이때 ‘사건의 자리’란 현시하지만 재현되지 않는 장소를 의미한다. 분명 우리 주변에는 엄존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식별되지 않는 장소들이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일터나 성소수자들의 삶터 등을 꼽을 수 있겠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단독적인 다수의 자리는 사건을 예비한다. 물론 ‘사건의 자리’ 모두에서 사건이 출현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우연히 도래하며, 진리는 사건 이후에, 그에 대한 충실성에서 비롯된다. 충실성을 떠맡는 자가 바로 주체이다. 주체는 진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함에도, 기성의 지식에 진리-사건을 강제한다.

바디우의 성취는 철학의 중심 개념들을 새롭게 각색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외려 철학의 가능성을 사회적으로 배제된 장소로부터 찾으려 했다는 실천적인 의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실천성의 성격이 중요하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바디우적 사유에서 우연성이 함의하고 있는 독특한 지위를 환기해보는 것도 좋다. 사건은 우연적으로 출현하며, 진리가 산출되는 과정의 담지자인 주체(화) 역시, 사건에 대한 충실성의 우연한 궤적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사유되기 때문이다. 진리의 유적 절차에 있어 우연성의 필연적인 지위를 논한 바디우의 도착(倒錯)은 그가 ‘필연성’의 보장이 없는 ‘특수한 계급’의 ‘보편적 지위’를 ‘합의’하는 의회주의적 발상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해 바디우는 시간의 내부로부터 보편성(영원성)을 기입하기 위한 특수한 계급의 우연한 정치적 주체화(충실성)를 합의나 계약에 기초하지 않은 채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합의에 대한 의회주의적 맹신이 정치 고유의 영역을 소멸시킨다는 논리를 전제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국의 시대를 맞이하여 다만 종말을 선언하는 자들은 그러한 종말 앞에서 결코 침묵할 수 없는 자들의 존재를 ‘다시’ 망각할 가능성을 열어 놓는 것이기도 하다. 종말과 파국은 자신을 대표-표상 할 수 있는 자들로부터 사후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종언의 개념적 종언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철학의 종말’이 논의되던 시기에 “철학을 위한 선언”을 감행한 바디우의 의지를 살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바디우는 침묵할 수 없는 자들의 장소를, 침묵이 강제된 시간 위에서 사유하는 것만이 철학을 구제할 수 있는 길임을 알려준 것이다.  
      
무언가의 종말을 말한다는 것은 전혀 겸손한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표현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시대에 대한 어떤 ‘확신’ 위에서 가능하다. 반대로 ‘종언의 형식’에는 소멸되는 가능성들을 마주하기보다는 일소해버리고 마는 반지성적인 ‘나약함’이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자기를 확신하는 자들의 나약한 시대인식이라는 역설적인 (반)사유의 문법이 종언의 논리인 것이다. 어쩌면 바디우는 종말 자체는 선언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선언한 것일 수도 있다.『철학을 위한 선언』은 종말의 시간 안에서 소멸되어 가는 가능성을 붙잡기 위한 철학적인 지침이라 할 수 있다. 종말을 맞이하는 자들, 그러니까 파국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는 자들은 그 자체를 개념화 할 수 없다. 종말에 대한 선언은 언제나 그로부터 거리가 확보된 자들에 의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대표하거나 재현할 수 없는 자들의 침묵에 경청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침묵의 장소들이야말로, 세계의 변화를 예비하고 있는 가능성의 공간일 테니 말이다.    
  

출처 : 고려대학교 고파스 2024-04-26 05:43:50: